“이제라도…”

<에스라 10:1~8> 

우리나라에서 가창력 있다는 가수들이 불러서 유명해 진 CCM이 하나 있습니다. 고형원 씨가 작사 작곡한

[너무 늦은 건가요] 너무 멀리 왔나요 주님께 돌아가기엔
사랑의 주님 그 품을 떠나 내 영혼 잃어버린 지금
너무 늦은 건가요 내 영혼 회복하기엔
수많은 죄악 속에 갇혀서 주님을 잃어버린 지금
하지만 내 영혼 주님 기다려요 변함없는 주님의 사랑을
내 모습 이대로 주께 돌아가요 나의 손을 잡아주소서
다시 주님의 얼굴 내 영혼 볼 수 있도록 나를 구원하소서
다시 주의 임재 가운데 내 영혼 살 수 있도록
https://youtu.be/uz5aHeY2Bzo )
이 노래를 들으면 자연스럽게 탕자의 비유가 떠오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께서 남기실 유산 중 자기에게 줄 재산은 미리 달라고 조릅니다. 결국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성화에 못 이겨 큰 재산을 떼어 둘째에게 건넵니다. 그 아들은 그렇게 큰돈을 평생에 만져본 적이 없었고, 때문에 어떻게 재산을 불리고 관리해야 할 줄도 몰랐습니다. 결국 멀리 타국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생활하며 가진 재산을 모두 허비하고 먹을 것을 찾아 돼지가 먹는 음식을 주어먹다가 눈물 흘리며 아버지께로 되돌아가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아버지를 다시 뵐 면목이 없어서 아버지의 품꾼이나 종으로라도 받아주시기만 한다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아버지께로 되돌아갑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맨발로 뛰어 나와 아들을 안아 주시고, 신발을 신기고 손에 반지를 끼워주시면서 종도, 품꾼도 아닌 아들로 다시 받아 주십니다(눅15장).

우린 늦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이제라도 괜찮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다 글렀다고, 나 같은 사람은 가망이 없다고, 더 이상 새로운 기대를 갖는 건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주님은 이제라도 다시 돌아오기만 한다면 새로운 인생은 시작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도착해 보니 유대인들의 영적 상태는 심각한 문제들을 안고 있었습니다. B.C.537년 바벨론 1차 포로 귀환 이후 에스라가 2차 귀환한 때가 B.C.458이었으니깐, 약 80년의 세월이 흐른 겁니다. 분명 귀환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그들만의 종교적 문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사장 겸 율법학자로서 에스라가 그들을 볼 때는 하나님 말씀에서 벗어난 심각한 죄의 문제들이 뒤섞여 있었고, 정말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정도였던 것입니다.

에스라 9:2절을 보시면,
“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

가나안, 헷, 브리스, 여부스, 암몬, 모압, 애굽, 아모리 사람을 가리지 않고 이스라엘 남자들이 이방인들의 여자를 데려다가 살고 있었습니다. 외국인과의 결혼이 문제가 아니라 고대 사회에서는 그 일을 통해 그들의 우상도 섬기게 되고, 우상숭배는 곧 도덕적 질서가 무너지는 것과 같았던 겁니다. 때문에 모세를 통해 신명기 7:3절, 4절에서 이방인과의 혼인을 금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에스라가 더 기가 막혔던 것은 ‘방백들,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라 9:5절, 6절을 보시면
“저녁 제사를 드릴 때에 내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을 찢은 채 무릎을 꿇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에스라는 민족의 죄가 너무 부끄럽고 낯이 뜨거웠습니다. 150년 전 그 문제들 때문에 자기 조상들이 심판을 받아 자기들이 전쟁포로로 잡혀가 그렇게 고생을 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잠시 은혜를 베푸셔서 이렇게 다시 고국에 돌아왔는데, 그 후손들이 똑같이 그 죄를 반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라10:1절을 보시면,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에스라는 민족의 죄를 놓고 울며 회개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던 어린아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모든 백성들도 함께 울고 통회하는 일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2절, 3절을 보시면,
“엘람 자손 중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 이방 여자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았으나 이스라엘에게 아직도 소망이 있나니, 곧 내 주의 교훈을 따르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가르침을 따라 이 모든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다 내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백성들이 잘못된 모든 죄들을 회개기도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제라도 그들의 잘못된 모든 것들을 바로 잡겠다고 한 겁니다. 이방인 아내와 소생을 모두 내보내기로 한 겁니다. 물론 달라스 신학교의 ‘존 마틴, 진게츠’같은 학자들은 10:16,17절을 근거로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한 경우를 제외하고, 여전히 이방의 신을 버리지 못한 여인들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몰락하고 약 150년의 세월 동안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서 많이 벗어난 삶을 살았습니다. 그 모든 것들을 다시 바로 잡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겠습니까? 아무리 이방여인이고, 그 소생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내보낸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에서 많이 벗어난 것을 다시 되돌린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이제라도 돌이켜야 합니다. 과거 그 일로 망했었는데, 다시 반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라도 제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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