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2:15~25>
저는 목회자로서 심방사역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목사로서 성도의 가정을 심방할 때, 저를 통해서 그 성도의 가정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을 자주 봅니다. 때때로 치유와 회복의 시간이 되고, 믿음의 견고함이 생기고, 새로운 비전이 임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 역시도 성도의 가정을 심방할 때 늘 기대하는 마음으로 기도로 준비합니다.
그런데 어떤 가정의 경우는 목사의 심방을 얼마나 사모하는지 모릅니다. 심방예배를 위해 집안 대청소도 해 놓고, 맛있는 간식이나 음식도 준비하고, 정성껏 준비한 심방감사헌금과 가정의 간절한 기도의 제목들을 빼곡하게 써 놓고 심방을 받는 겁니다. 이런 가정에 심방을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 그 충만함이 느껴지는 겁니다. 우리가 영적인 존재인지라 거기에 영적으로 반응하게 되어 그 가정을 위한 간절한 축복기도가 나오는 겁니다.
하지만 심방예배를 전혀 사모하지 않는 가정들도 꽤 있습니다. 목사가 ‘대심방이니깐 심방 받으라고 꼭 받아야한다’고 해야 미루고 미루다 겨우 마지못해 심방을 받는 겁니다. 심방에 대해서 전혀 기대감도 없고, 사모함도 없고, 거기에 어떤 믿음도 없는 것입니다. 목사님이랑 관계도 있고, 교회 생활도 무시할 수 없고… 해서 받는 겁니다. 그런 가정에 가서 기도하려고 자리에 앉으면 목사로서 성도를 축복해야 하니깐 어떻게든 그 성도가 변화 받고 축복된 삶을 사시기를 바라는 마음에 기도는 해 보지만…, 영적으로 느껴지는 게 있어서인지 그리 간절한 기도가 나오지 않는 겁니다.
존 비비어(John bevere) 목사님의 『홀리 스피릿(Holy Spirit)』이란 책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성령은 자신이 존중받지 않는 곳에서는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신다. 성령은 자신이 존중받지 못하는 곳에서는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을 존중하지 않으면 삶에 그리스도의 임재와 능력이 결여된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셔서 놀라운 가르침과 역사와 능력을 나타내셨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고향으로 돌아가셔서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분명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 가르침과 지혜에 놀라게 됩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3:57절, 58절에 보시면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환영하는 곳에서는 역사하셨으나, 자신을 배척하거나 믿지 않는 곳에서는 능력을 행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15절을 보시면,
“맞은편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제자들이 그를 보며 말하기를 엘리야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엘리사 위에 머물렀다 하고 가서 그에게로 나아가 땅에 엎드려 그에게 경배하고”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는 승천하면서 제자였던 엘리사에게 그 사역을 계승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인간적인 계승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에서 “성령이 하시는 역사(9절, 15절)”라는 표현이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성령의 사역을 이어받은 영적 계승자였던 것입니다.
19절에 보시면,
“그 성읍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우리 주인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의 위치는 좋으나 물이 나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여리고 성읍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엘리사에게 “우리 주인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라고 자신들을 낮추고,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를 높이며 말을 합니다. “이 성읍의 위치는 좋으나 물이 나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여리고 성읍 사람들은 엘리사에게 역사하시는 성령을 통해 어떤 도움을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에 엘리사가 새그릇에 소금을 담아 자신에게 가져오라고 했더니 그들이 그대로 순종합니다. 그리고 21절입니다.
“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에 던지며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부터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을지니라 하셨느니라 하니”
여리고는 지정학적 위치가 매우 좋은 곳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물이 안 좋았습니다. 그래서 농사가 늘 흉작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여호수아 6:26절에 의하면 여호수아가 여리고성 전투 이후에 여리고 성을 저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땅은 역사적으로 저주받은 곳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저주 받은 땅에 살던 여리고 성읍의 사람들이 여호와의 선지자 엘리사를 환영하며 은혜를 구하자, 그 땅은 다시 회복되고 치유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23절부터 25절까지는 대조적인 사건이 등장합니다. 23절을 보시면,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그가 길에서 올라갈 때에 작은 아이들이 성읍에서 나와 그를 조롱하여 이르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벧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소입니다. 그 민족의 조상 야곱이 바로 그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하나님의 집(벧엘의 뜻)’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그 벧엘에 갔더니 작은 아이들이 엘리사를 향해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산 속에서나 살아라’ 는 의미)”하며 조롱했던 것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작은 아이들이 왜 그런 말을 했겠습니까? 그것은 분명 어른들에 의해 영향 받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집이었던 벧엘은 어느 순간부터 영적으로 타락해서 여호와의 선지자를 조롱할 정도로 부패했고, 그 어른들이 식탁에서 조롱하던 선지자를 볼 때 작은 아이들이 어른들의 말을 그대로 말했던 것입니다. 이에 엘리사가 그들을 저주하매 암곰 둘이 나와 그 성읍의 아이들 중 42명을 죽이게 됩니다. 선지자를 조롱하던 그 성에는 큰 재앙이 임한 것입니다.
여호와를 환영하는 곳에서 성령은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성령은 자신이 존중받지 못하는 곳에서는 역사하시지 않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