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죽고 예수로 산다”

<열왕기하 5:1~14> 
Breakthrough 40 특별저녁기도회(4)

우리나라 땅에 기독교가 전파된 것은 우리 개신교 보다 천주교가 훨씬 오래 전에 들어왔습니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17~18세기경에 들어온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인 조선은 ‘유교와 불교와 무속신앙’의 사상적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정치적인 격동기에 있었습니다. 그런 사상들과 정치적인 상황이 맞물려 천주교는 극심한 박해를 받게 됩니다.

지금은 천주교가 초기에 들어왔던 신앙에서 많이 변질되어서 조상 제사까지도 허용하고 있지만, 조선에 천주교가 소개되어 확장되고 있던 1715년 교황 클레멘트(Clement) 11세와 1773년 교황 베네딕트(Benedict)14세 역시 ‘조상숭배는 우상숭배이므로 조상 제사를 절대 허락해서는 안 된다’는 회칙을 공포하고 엄명을 내렸었습니다.

또한 ‘천주교(天主敎)’라는 이름과 같이 한 나라의 왕보다 하늘의 주인이시고 천하를 다스리시는 ‘하늘의 주’ 즉 ‘천주(天主)’의 명령이 우선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절대왕권의 조선시대에는 대단히 위험스런 가르침이었던 겁니다.

때문에 천주교는 임금도 모르고, 아비도 없는 종교라는 오해가 있었고, 거기에 천주교에서 조상제사를 금하니깐 그것으로 인해서 수많은 순교자와 배교자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조선의 왕 고종3년인 1866년부터 1871년까지 대규모의 천주교 탄압인 ‘병인박해(丙寅迫害)’가 벌어지게 됩니다. 대표적인 박해 사건 중에 하나가 ‘절두산 순교’입니다. 마포구 합정동에 한강변과 맞닿은 작은 언덕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 수많은 천주교인들을 끌고 가서 참수형을 시켰다고 합니다. 이 병인박해를 통해 약 8천여 명의 천주교 성도들이 목숨을 잃게 됩니다.

이렇게 100~200년간 우리나라는 기독교에 대해 폐쇄적이었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뭐였습니까?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지만 우리나라 대대로 오랫동안 갖고 있었던 전통(조상숭배제사)에서 벗어난다는 겁니다. 만약에 지금까지도 그렇게 기독교에 대해서 배타적이고, 우리 국민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면 오늘의 우리는 이 자리에 함께 앉아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한 세기 동안 우리 민족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놀라운 축복들도 경험할 수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오늘 본문 중에 8절부터 14절까지는 우리가 7월8일(주일)에 『브레이크스루(Breakthrough)40일 특별저녁기도회』를 앞두고 준비하면서 주일 낮에 성도들과 함께 나눈 브레이크스루 시리즈 첫 번째 말씀이기도 합니다.

지금의 시리아 지방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했던 아람국은 앗시리아나 바벨론 제국이 등장하기 전까지 그 지역의 패권국이었습니다. 때문에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침략해 그들을 괴롭혔습니다. 그렇게 아람이 세력을 확장해 나가는 데 큰 공을 세운 사람이 오늘 본문의 나아만 장군이었습니다.

1절을 보시면,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

당시 중동의 강대국인 아람 왕이 가장 총애하는 군대 장관이었으니 그 세력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중반절에 보시면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는 표현이 나와 있는데, 나아만 장군은 민족을 위기에서 건진 민족 영웅과 같은 존재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왕이 얼마나 그 장관을 아꼈겠습니까?

나아만 장군은 민족의 영웅이었고, 왕 다음으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있었고, 부와 명예와 영광 그는 모든 것을 누리고 있었던 정말 부족함이 없는 인생을 살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에게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1절 하반절에서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는 겁니다. 그는 큰 용사였고, 민족의 영웅이었고, 부와 명예와 영광 등 부족함이 없는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시 불치병이었던 나병에 걸렸던 겁니다.

참 이상하게도 우리에게 항상 어떤 기도제목이 될 만한 어려움이 있는 거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무 걱정과 근심도 없는, 모든 일이 형통한 삶을 살기 바라지만 우리의 인생에는 근심과 걱정이 완벽하게 사라지는 일은 없는 거 같습니다.

그런데 내 인생 속에 기도할 제목이 있는 건 감사한 일입니다. 만약 모든 일이 형통하고, 아무 근심과 걱정이 없다면… 과연 우리가 하나님을 구하고 찾을까요? 그러나 여러 가지 기도제목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구하고 찾고 기도하는 삶을 살고 있는 거 아닙니까?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그래서 말할 수도 없는 인생의 3중고를 겪으며 살았던 믿음의 사람 ‘헬렌 켈러(Helen Adams Keller, 1880~1968)’는 이런 말을 합니다.

“쉽고 편안한 환경에선 강한 인간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시련과 고통을 통해서만 강한 영혼이 탄생하고, 통찰력이 생기고, 일에 대한 영감이 떠오르며, 마침내 성공할 수 있다.”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그래서 말할 수도 없는 평생 동안 헬렌 켈러가 겪어야 할 그 인생의 짐은 얼마나 무거웠겠습니까? 그러나 그녀는 24살에 미국의 레드 클리프 대학교를 졸업하면서 시각, 청각 장애인으로서 최초로 학사학위를 받은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독일어를 비롯한 다섯 개의 언어를 구사했다고 합니다. 그녀가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 모든 장애인들에게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고린도전서 10:13절에서는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그리고 시편 119:71절에서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수밖에 없는 기도의 제목이 있는 것은 감사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당장의 고난과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만, 사실은 그 기도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놀랍도록 성숙해 져가고, 헬렌 켈러의 말과 같이 더 강해지고 단단해 져 가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그 기도 기간을 통해서 우리를 이전 보다 더 아름답게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나아만 장군은 거의 완벽에 가까운 만족스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불치병이었던 나병 때문에 늘 근심과 걱정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병 때문에 그는 하나님을 만날 기회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 병이 아니었다면 그는 하나님을 찾을 일도, 의지할 일도, 믿을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나아만 장군이 그 집에서 일하는 여종(이스라엘에서 잡아 온 포로)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은 그 마음이 가난해질 때로 가난해 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그가 모든 일이 잘 되고, 계속 형통하기만 했다면 그의 마음은 높아질 대로 높아져서 누군가의 말을 잘 듣지 않았을 겁니다. 더더구나 이스라엘에서 잡아온 어린 여종의 말에 귀를 기울일 이유가 없었던 겁니다. 그런데 질병으로 인해서 마음이 가난해 지니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그 말에 귀를 기울였던 겁니다.

그래서 나아만은 아람 왕의 친서를 받아들고, 은 340kg, 금90kg, 의복 열 벌을 들고 과거 자신이 짓밟고 약탈하고 죽이고 파괴했었던 이스라엘 땅으로 갑니다. 전에는 강자로서 약탈자가 되어 무엇인가를 빼앗으려고 그 땅을 갔었는데, 이제는 가난한 심령으로 어떻게든 도움을 받기 위해서 그 땅을 다시 찾은 것입니다.

이제 나아만 장군이 말들과 병거들과 군사들을 거느린 상태로 선지자 엘리사의 집 문 앞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10절을 보시면,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그런데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진 겁니다. 나아만 장군은 중동의 패권국인 아람국에서도 왕 다음으로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어딜 가나 나아만 장군이 가면 모두가 벌벌 떨면서 땅 바닥에 바짝 엎드려 그에게 경의를 표했습니다. 이스라엘 왕까지도 나아만 장군이 왔더니 벌벌 떨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를 만나기 위해서 엘리사의 집 문 앞에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데, 정작 버선발로 뛰어 나올 줄 알았던 엘리사는 나오지 않고 사환 하나가 나와서 엘리사가 한 말을 전하고 들어가는 겁니다. 그것도 더 아름답고 크고 화려하고 맑은 아람의 여러 강들도 있는데, 좁은 흙탕물 같은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면 나병이 깨끗해지리라는 믿기 어려운 말 한마디 던지고 그 사환도 들어가 버렸습니다.

11절을 보시면,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나아만은 잔뜩 화가 나서 분노하며 다시 아람으로 돌아가려고 몸을 돌이켰습니다. 나아만의 생각과 너무 달랐던 겁니다. 그런데 사실 신앙은 내 생각에 하나님의 뜻을 끌어다 맞추는 게 아닙니다. 내 생각은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내 안에 채우는 것이고, 나의 생각과 계획과 뜻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가는 것이 진정한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이해할 수 있는 표현들이 있습니다.

✓ 나아만은… 크고 존귀한 자니(1절)
✓ 그는 큰 용사이나(1절)
✓ 나아만이… 은 십 달란트, 금 육천 개, 의복 열 벌을(5절)
✓ 나아만이…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9절)
✓ 다메섹 강…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12절)

이 말들을 볼 때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아람 군대 장관 나아만이 가장 믿고 의지하는 것이 무엇인 거 같습니까? 그의 생각을 가득 채우고 있는 생각들이 무엇입니까?

그 사람의 생각 속에 가장 많이 있는 것이 그 사람이 가장 믿고 의지하는 것들인 것입니다. 그 사람이 믿고 의지한다면 그것은 모양이 있든 모양이 없는 것이든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의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엘리사의 말을 전해 듣고 화가 난 이유가 뭡니까? 나아만의 생각과 너무 달랐던 겁니다. 그 동안 나아만이 믿던 것들은 세상적인 권세와 능력, 부와 명예와 같은 외적인 것들이었습니다.

왜 엘리사가 요단강에서 씻으라고 했겠습니까? 엘리사가 그냥 안수해 주거나, 기도해 줘도 병이 낫지 않았겠습니까? 열왕기하 4장에서 나눈 말씀과 같이 엘리사가 기도만 해 줘도 죽은 아이가 다시 살아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나아만 장군도 잠깐 들어오라 해서 무릎 꿇으라 하고 안수해 주면 그 병이 싹 치유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왜 이런 특별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엘리사에게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나아만이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뜻과 경험과 방법들을 내려놔야만 진정한 신앙생활이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나를 내려놓지 않으면 진짜 신앙생활이 시작될 수 없는 겁니다. 내 욕심을 내려놓지 않고, 내 생각을 내려놓지 않고, 내 고집을 내려놓지 않고, 내 방법을 내려놓지 않으면… 절대 진정한 신앙생활이 시작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내 삶에 하나님의 역사(기적)도 나를 내려놔야 시작되는 겁니다. 수영을 처음 배울 때 물이 무서워 몸에 힘을 잔뜩 주는데 그러면 절대 물에 뜰 수도 없고, 수영을 잘 배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몸에 힘을 빼고 편안한 마음에 물에 몸을 맡기면 물 위에 몸이 뜨고, 수영이 자연스러워 지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2:20절 말씀을 보시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 생각과 욕심과 계획과 방법을 내려놔야 비로소 진정한 신앙생활이 시작되고, 내 삶에 진정한 하나님의 역사와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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