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7:54~8:1>
요즘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버킷 리스트(Bucket List)’라는 것이 유행처럼 번져있습니다. 2007년에 개봉한 헐리웃 영화 『버킷 리스트(The Bucket List)』 때문이기도 한 거 같습니다.
그런데 이 말의 유래를 살펴보면 약간은 섬뜩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중세 시대 교수형을 집행하거나 자살을 하게 될 때 올라서는 양동이를 걷어차다(Kick the bucket) 의미에서 이 말이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말은 ‘죽 다’라는 뜻으로 쓰이는 속어적인 표현입니다.
그래서 ‘버킷 리스트’는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 이란 의미로 쓰여 지고 있습니다.
『버킷 리스트(강창균 유영만 著, 한국경제신문사, 2011)』라는 책도 있습 니다. 이 책에는 흥미로운 실험이 하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54명의 노벨상 수상자들을 냈고, 미국의 최상위권 대학 중에 하나인 코넬 대학교의 철학과 2학년 학생 32명 을 대상으로 1985년에 버킷 리스트 작성 실험을 했습니다. 그 중에 12명의 학생들은 그 실험에 ‘관심 없는 사람 들’이었습니다. 그래서 4명은 백지로 냈고, 2명은 시 한 편 을 적어 냈고, 2명은 여자 얼굴을 그렸고, 1명은 소련을 이 기는 방법을 장황하게 적어냈고, 3명은 두서없는 글을 썼다 고 합니다. 그런데 버킷 리스트를 통해 나머지 20명의 학생들은 그 실험에 ‘진지하게 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각자의 삶의 목표를 적기도 하고, 살아가는 목표를 진지하게 적은 학생들도 17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2000년 4월에 15년 전 버킷 리스트 실험에 참여 했던 학생들의 소재를 모두 파악했습니다. 그들의 현재 직 업이 무엇이고, 거주지는 어디에 있고, 삶에 대한 만족도는 어떤지 등등을 조사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결과물을 볼 수 있었습니다. 버킷 리스트를 성실하게 작성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 은 사람들보다 사회적 지위가 높았고, 재산은 평균 2.8배 정 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90% 정도의 사람들은 현재 삶에 만족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또한 이혼 경험 없이 행복한 가정생활을 만끽하고 있 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버킷 리스트를 작성하지 않았거나 성의 없이 작 성한 사람들 같은 경우는 80% 이상의 사람들이 조사를 했었 다는 기억조차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고, 자살을 했거나, 자살 시도, 결혼에 실패하고, 가정불화, 사업의 실패, 직장 문 제 등등을 겪고 있었고, 그런 미국 최상위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교도소를 다녀온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전도서 7장2절에서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 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 어다”
‘버킷 리스트’는 어디에 여행가고, 인생을 즐기고, 못 해 본 것을 경험해 보는 엔조이(enjoy)적인 의미보다는 모든 사람에게 찾아오는 죽음에 대해서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 에 가는 것보다 나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초상집 에 가면 한 인생의 최후를 볼 수 있습니다. 그 최후를 보면 여러 가지 느끼는 바가 많은 겁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건데, 우리가 마지막에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 각해 본다는 것은 ✓ ‘그러면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란 질문으로 귀결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는 스테반 집사에 관한 내용이 나와 있습니 다. 그는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이었지 만, 죽는 모습까지도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었습 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스테반 집사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죽음은 어떠해야하는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1. 감정의 한계를 넘어라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폭발적인 부흥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전념하고, 따 로 일곱 명의 집사를 세워 그들을 통해 봉사와 구제 사역을 담당시키게 됩니다. 스테반 집사님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가 장 충만한 성령의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종교교육과 예배 등을 위해 도시 곳곳에는 ‘회당’이란 곳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어느 날 스테반이 회당 에 갔었는데 터키의 길리기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리비 아의 구레네에서 온 유대인들과 논쟁을 하게 된 겁니다.
사도행전 6:10절 말씀을 보시면,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 하여”
스데반의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유대인들은 능히 당해 낼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러면 ‘당신 말을 들어보니깐 정말 그런 거 같네요. 나도 예수를 믿어봐야 겠습니다.’라고 하면 되는데, 어떤 논쟁에서 밀리면 사람들이 이렇게 반응하는 경 우는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데반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어 그를 유 대 사회의 최고 의결과 재판을 담당한 ‘산헤드린 공회’에 고 발하여 그를 재판대위에 세우게 됩니다. 스데반은 아브라함 으로 시작된 믿음과 언약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로 성취되 었고, 그가 유대인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을 사도행전 7:1절부터 53절까지에 걸쳐 선명하게 밝혔 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54절 말씀을 보시면,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그들은 스데반의 말을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스데반을 향해 이를 갈고 있는 겁니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마음에 찔림이 왔으면 그들의 잘못된 태도를 바꾸거나, 회개하거나, 변화되어야 하는 것입 니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 그럴 생각은 하지 않고 스데반을 향한 분노가 가득차서 이를 갈고 있는 모습입니다. 스데반의 변론을 들은 유대인들이 마음이 찔렸다는 것은 그 말이 하나도 틀린 말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스데반의 말이 모두 거짓이고, 틀린 말이라면 유대인들이 마음에 찔 림을 받을 필요도 전혀 없는 것입니다.
이들은 감정의 한계를 못 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가 살아가면서 이렇게 자신의 감정의 한계를 못 넘어 더 큰 것을 잃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 이 유대인들은 너무 옳은 말만 하는 스데반이 기분 나쁜 겁니다. 논쟁에서, 말 싸움에서 밀려 기분도 엉망이고, 자존심도 상한 겁니다.
그런데 이게 자존심이고, 기분과 감정이 문제가 아니라 스데반이 말하고 있는 이 사실을 인정하고, 진정한 메시야 이신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영혼 이 구원 받고 살 길인 것입니다. 그깟 감정 하나 때문에 살 고 죽는 문제가 결정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부부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내 감정의 문제 하나 때문에 사랑하며 살아야 할 부부가 서로 한 마디도 안 하고 원수처 럼 담을 쌓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 라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닙니다. 내가 내 마음만 잘 다 스리면 사실 아무 것도 아닌 겁니다. 그런데 어떤 큰 그룹 의 리더가 되려고 하고 있고, 더 크게 세상을 다스리려고 하는 큰 꿈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작은 자기 마음 하나도 다 스리지 못한다면 그보다 작은 그 어떤 것도 다스릴 수가 없 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여러분 쓸데없는 감정싸움에 여러분의 시간 과 인생을 낭비할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찬양팀을 함께 하고, 남녀전도회를 하고, 목장모임을 하고, 선교와 구제팀 을 함께 하는데… 사람이 모인 곳에는 분명 모든 것이 다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습니다. 그 안에는 분명 내 감정을 건드리는 사람도 있을 거고, 내 의견이 무시될 수도 있을 겁니다. 또는 아무 이유 없이 내 말에 자꾸 트집 을 잡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면 얼마나 피곤합니까? 의도적으로 남 의 감정을 건드리는 사람도 그렇고 또 그런 사람들과 상황 속에서 감정적으로 진정이 안 돼 누르락푸르락 하는 사람 역시 너무 피곤한 겁니다. 그것 때문에 맘도 힘들고, 스트 레스도 받고, 잠도 잘 안 오고, 머리도 아프고, ‘이 사람한테 어떻게 되받아칠까? 어떻게 복수할까?…’ 하는데 여러분의 감 정을 낭비하게 되는 겁니다. 심플하게 사는 게 좋습니다.
– 누가 내게 뭐라 하건, 어떤 상대방이 나에 대해 그렇 게 말한다고 해서 내가 그 사람이 말한 대로 되는 건 아닙 니다. 그 사람의 말이 다 진실은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내게 대하여 진실도 아닌 이상한 말을 하는 사람이 문제지 결코 내가 문제는 아닌 겁니다. 그냥 ‘거 참 이상한 사람일 세~, 저 사람은 마음이 아픈 사람이구 나…’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시는 게 좋습니다.
– 아무 이유도 없이 너무 여러분을 괴롭히고 힘들게 하 는 사람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에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 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12:19절에서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 문제도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맡기시는 겁니다.
– 오늘 본문의 경우와 같이 마음에 어떤 찔림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든 우리를 고쳐 쓰시려는 겁니다. 그럼 감사한 겁니 다. ‘하나님 제가 잘못했네요. 저를 고쳐주세요. 저를 새롭게 해 주세요. 저를 변화시켜 주세요.’하고 주님 앞에 겸손히 손을 내미시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 속에 수도 없이 감정의 한계에 부 딪치는 순간들이 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소한 감정 하 나 때문에 그 감정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크고 중요한 것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생각하 고 있다면, 이제 우린 순간순간 찾아오는 그 감정의 한계를 넘어가는 훈련을 해야 하는 겁니다. 그걸 못 넘기면 내 인 생과 시간과 감정만 낭비하며 살아가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감정의 한계를 넘지 못해 복음(Good News) 를 거부합니다. 그 감정 하나 때문에 지옥의 불구덩이로 떨 어져 버린 것입니다.
2. 관점의 한계를 넘어라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를 고민한다면, 우리의 관 점의 한계를 넘어야 합니다.
55절과 56절을 보시면,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looked up)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 고(saw), 말하되 보라(Look)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I see) 한대”
지금 스데반은 성난 유대인들에게 둘러싸여 생명의 위협 을 느끼고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여기저기 유대인들은 소 리를 지르고, 욕을 하고, 저주를 퍼붓고… 당장이라도 달려 와 스데반을 죽이려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그 때 스데반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 러 보는데, 하늘의 문이 열리고 그 높은 곳에 하나님의 영 광의 보좌가 보이고, 그 우편에 일어서 계신 예수님이 보이 는 겁니다.
그런데 이 구절들에 보시면, –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looked up)’ –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saw)’
– ‘말하되 보라(Look)’ – ‘인자(예수)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I see)’
산헤드린 공의회는 71명의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 율법학자, 사두개인…과 같은 유대사회의 종교와 정치에 가 장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스데 반을 고발한 유대인들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모두다 두 눈을 뜨고 있어도 스데반이 보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 중에는 성경을 달 달 외울 정도로 뛰어난 율법학자도 있었을 것입니다. 학식 이 높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사회에서 꽤 크게 성공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정치적으로 유대 사회 속에서 가 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정치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적 스펙이 뛰어나고, 학식이 많아도 영적인 눈이 감겨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이 보고 있는 것을 그들은 볼 수 없는 겁니다.
관점(a point of view)이 달랐던 겁니다. 그들은 세상적 인 눈, 일반적인 눈, 세상 학문의 눈… 그 뿐이었습니다. 그 런데 스데반은 하나님의 눈, 믿음의 시각, 성경의 관점, 성 령의 관점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관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이 상황 속에서 도 스데반은 천사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불안 에 벌벌 떨고, 목숨을 구걸해야만 겨우 살아남을 수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의 눈은 이 땅에 있지 않았습니다. 나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의 분노에 집중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눈은 하늘을 향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향해 있었습 니다. 하나님께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는 두렵지 않았던 겁니다. 지금 당장 돌에 맞아 죽을 거 같을지라도, 지금이 내 생의 마지막 순간처럼 느껴지는 순간 속에서도… 그는 두려워하 지 않았던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 관점의 한계를 넘어가기 시작하면 우리의 삶에는 많은 변화들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기저기서 자금을 끌어다가 새롭게 사업을 시작했는데 불안한 겁니다. ‘과연 매달마다 버틸 수 있을까? 직원들 월급 은 제대로 줄 수는 있을까? 자리가 좋지 않은 거 같은데, 나는 경험도 없는데, 내가 여기서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이런 생 각이 왜 안 들겠습니까?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시작하면 모든 상황들이 모두 내게 기회로 보여 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 집사님 이 로빈슨 갤러리아 몰에 한국에서 건너온 질 좋은 페브릭 (천, 이불, 쿠션, 수건, 의류 등등) 제품들을 제작 판매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과연 될까…?’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세부 (필리핀) 유일의 질 좋은 한국 페브릭 제품 유통 숍이다. 때문 에 질 좋은 페브릭 제품을 원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곳으로 오 게 되어 있다. 더 나아가서 우리 회사가 필리핀 전역에 한국 페브릭 제품을 유통하는 무역회사도 될 수 있다.’라고 비전을 확장해 나가는 겁니다.
우리 학생들이 필리핀에서 영어 배우는 게 경쟁력이 떨 어진다고 생각할 수 있을 지도 몰라요. ‘필리핀 선생님들 영 어 발음도 안 좋고, 시부아노나 따갈로그어처럼 현지어를 섞어 써서 영어 실력이 잘 안는다. 뭐 하러 필리핀 역사를 배워야 하냐?’고 불평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몇 개월 전에 ‘그레이스 리’에 대한 얘기를 해 드렸지만, 그녀는 10살 때 필리핀에 와서 영어와 따갈로그어를 자유롭게 구사해 한국 인으로서 필리핀 유일의 외국인 앵커가 되었습니다.
요즘 영어 잘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앞 으로 어디에서 살지 어떻게 압니까? 앞으로 여러분이 누구를 상대로 비즈니스를 할지, 어떤 일을 할지 어떻게 압니 까? 모두가 필리핀은 후진국이라고 고개를 돌릴 때, 어떤 사람은 아직 불모지와 같은 이 땅을 보며, 기회의 땅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제가 종종 말씀드리지만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않고 사는 사람은 이 땅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은 언젠가 이 땅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었지만, 믿음의 눈으로 그 약속과 축복의 땅 가 나안을 바라보았던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출애굽 2세대는 그 가나안 땅을 밟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겠습니까? 관점의 한계 를 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3. 사랑의 한계를 넘어라
스데반의 말을 듣던 사람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 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그를 성 밖으로 내쳤습니다. 그 리고 그에게 돌을 집어던지기 시작했습니다.
59절과 60절 말씀을 보시면,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스데반은 유대인들이 던진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자신의 영혼을 주 예수님께 부탁합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부르짖어 기도하기를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 서”라고 기도하고 죽음을 맞게 됩니다.
이 구절들은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기도하셨던 내용과 너무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못 박은 자 들을 위해 십자가상에서 이렇게 기도했었습니다. “아버지 저 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23:34)” 그래서 스데반은 예수님을 참 많이 닮은 사람이 었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 죄도 없는 자신을 향해서 돌을 던지고,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는 사람들을 위해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을까요? 이건 보통 사람에게 불가능한 기도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피해를 주거나, 나를 힘들 게 하거나, 감정이 상하게 만들면 그 사람이 미운 겁니다.
그 사람이 잘 되면 배가 아픈 겁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니 깐 원수 같은 사람이라도 저주까지는 안 하지만, 그 사람이 잘 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 겁니다. 그런 못된 사람은 꼭 벌을 받아야 할 거 같은 겁니다. 그 사람은 철저하게 망 했으면 하는 마음도 솔직히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 사랑의 한계를 넘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 다. 우리가 죄가 많아도, 실수가 많아도, 의지가 부족해도, 심지어 때때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지라도… 주님은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 데반 집사님은 바로 그 주님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를 향해 이를 갈며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위해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했던 겁니다. 인간이 사랑할 수 있 는 그 사랑의 한계를 넘었던 것입니다.
2007년에 개봉한 영화 『버킷 리스트』는 말기 암에 걸 린 두 주인공이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내용입니다. 이 영화에서 많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 명 장면, 명대사가 있습니다.
주인공 카터와 에드워드는 이집트의 대 피라미드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있습니다. 주인공 카터는 친구 에 드워드에게 특별한 이야기를 하나 해 줍니다. “고대 이집트 인은 죽음에 대해 멋진 믿음이 있었다는 거 아나? 영혼이 하늘 에 가면 말야, 신이 두 가지 질문을 했었다고 하네. 그 대답에 따라 천국에 갈지 말지가 정해졌다고 하지.” 그러자 친구 에드 워드가 “뭐였는데?”라고 묻습니다.
카터가 말합니다. “인생의 기쁨을 찾았느냐?”
에드워드가 고민하다가 어렵게 ‘그런 거 같다’고 대답하 니깐, 카터가 다음에 이어지는 질문을 하나 더 해 줍니다.
그렇다면 “자네 인생이 다른 사람을 기쁘게 했나?”
이 영화에서는 이 질문의 대답에 따라 천국에 갈지 말지 가 정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 인생의 기쁨을 찾았는 데, 그 일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 초대교회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 집사님의 마지막 죽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어떻게 죽을 것인가? 즉 이 질문은 ‘어떻게 살 것인 가?’로 이어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묘비에 여러분의 인생을 한 마디로 쓴다면 무 엇이라고 쓰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