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이드1

“비범한 평신도”

<사도행전 8:26~40> 

– Acts(26) –

 

우리가 흔히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한 분들을 ‘모태신앙(母胎信仰)인’이라고 합니다. 제가 처음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고,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고 신앙생활을 시작했을 때, 가장 부러웠던 사람들이 모태신앙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부모님과 함께 교회를 다니고, 어렵고 힘든 순간마다 부모님의 기도를 받고, 가정의 분위기가 신앙 안에서 따듯하고 단란해 보였던 그 분들의 가정도 많이 부러웠던 거 같습니다.

 

그런데 모태신앙에 관한 우스갯소리가 하나 있습니다. ‘기도도 못해, 봉사도 못해, 헌신도 못해, 아무것도 못해…’ 그래서 ‘못 해 신앙’이라고 합니다. 물론 대부분의 모태신앙인들은 웬만한 시험에는 끄덕도 없을 정도로 믿음이 견고하고,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에 크게 쓰임 받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간혹 ‘모태신앙’임에도 불구하고, ‘못해 신앙’으로 살아가고 있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든 10년만 하면 전문가가 된다’는 말이 있는데, 하루에 3~4시간씩 10년을 하면 1만 시간 정도가 되는데, 그래서 캐나다의 ‘말콤 그래드웰(Malcolm Gladwell, 1963~)’이란 분이 『아웃라이어(Outlier)』라는 책에서 ‘1만 시간의 법칙’이란 것을 제시하고 있는 겁니다. 특정분야에서 진정한 전문가가 되려면 1만 시간 정도는 거기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는 그 분야의 전문성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신앙생활을 오래 했으면 좀 뭔가 다른 게 있어야 하는데, 지금 내 삶에 변화가 없다? 여전히 영적인 어린아이와 같다? 작은 시험 하나에 믿음의 뿌리마저 흔들린다? 기도도 못하고, 봉사도 못하고, 헌신도 못하는 ‘못해 신앙’에 머물고 있다면… 내가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을 했어도 제대로 안 한 겁니다.

 

입으로 주여! 주여! 라고는 하지만, 마태복음 7장 23절에 증거하고 있는 것처럼 주님께서는 그들을 향해서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이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C.S.루이스가 우리 인생을 계란에 비유하고 있는 것처럼, 교회 안에 있다고 안전지대가 아닐 수 있습니다. 아무리 교회를 다니고 있다고 해도 그 계란이 부화하지 않고 그대로 있으면 썩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다니는데 전혀 변화가 없다는 것은 지금 내가 썩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사도행전 8장에는 비범한 평신도 한 사람 빌립 집사님이 전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가 교회에서 저처럼 목회하는 사람을 ‘성직자’라 하고, 여러분과 같은 성도님들을 ‘평신도’라고 말합니다. 목사님들은 풀타임으로 주의 일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성직(거룩한 직분)’이라 하는 거 같고, 성도님들은 성직이 아닌 세상의 일들을 하다가 주일에 교회에 나오는 성도들이기 때문에 ‘평신도’라고 부르는 거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명칭에서 하나의 오해가 있는 거 같습니다. 성직자는 당연히 그 정도의 믿음도 갖고 있어야 하고, 그 정도의 삶은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평신도는 평신도니깐 그 정도까지의 믿음은 없어도 되고, 그 정도까지 헌신적인 삶은 안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에 ‘성도, 신도’라는 단어는 많이 나오지만, 성경 어디에도 ‘평신도’라는 말은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9절에서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

이라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니깐 성직과 평신도의 구분이 없는 겁니다. 목사님이니깐 당연히 그 정도는 헌신해야하고, 그 정도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목사도 하나님 앞에 똑같이 성도고, 제사장인거고, 우리 성도님들도 하나님 앞에 왕 같은 제사장이고, 하나님의 성도인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님들이든, 성도들이든 하나님 앞에 거룩한 성도로서 똑같이 주님을 섬겨야 하는 겁니다. 목회자는 ‘목자’로서 성도들은 양육하고, 교육하는 일을 담당하는 것이고, 성도들은 여러 가지 봉사의 일을 하며 교회와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한국교회 성도들이 자신을 평신도라고 생각하면서 신앙 생활하니깐 영적으로 늘 밑에 있는 겁니다. 자신의 영적 기준을 너무 낮춰 놓다보니깐 기도도 못해, 봉사도 못해, 헌신도 못해… 라고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의 빌립 집사님에 관해서 우리가 지난주부터 말씀을 나누고 있는데, 빌립 집사님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평신도고, 순교하신 스테반 집사님도 평신도 아닙니까? 그러나 그들의 삶은 그렇게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그렇게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평신도라는 말 자체가 없지만, 그들은 비범한 평신도로서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이렇게 평범하다 못해 능력도, 역사도, 간증도 없는 무기력한 교인의 모습으로 말 그대로 평신도로서만 살아야겠습니까? 이제 이 무기력한 평신도의 옷을 벗어버리고 비범한 크리스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라

우리가 비범한 크리스천으로 살기 위한 첫 번째 교훈은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살아가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6절 말씀을 보시면,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이후 성난 유대인들은 더 기세가 등등해서 예수 믿는 자들을 대대적으로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유대 각 지역으로도 흩어졌고, 유대인들이 거의 없어 예루살렘보다는 안전한 사마리아 지역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전도자들은 그곳에서도 복음을 전했고, 유대인들이 이방인 취급을 했던 사마리아 도시 곳곳에 놀라운 변화들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천사가 사마리아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있던 빌립에게 ‘지금 일어나서 남쪽으로 가되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그 길은 광야라’하시는 겁니다.

사마리아에서 가사라는 지역까지는 직선거리로도 140km가 넘는 거리입니다. 세부에서 오슬롭 고래상어(Oslob Whale Shark) 보러가려고 하면, 차 안 막히는 새벽에 일어나서 3~4시간 차 타고 가야 하는데, 여기서 오슬롭까지 134km 거리입니다. 그런데 2천 년 전 당시 별다른 교통수단도 없이 그 거리를 이동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그 길은 광야라는 겁니다. 광야라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라는 얘깁니다.

하나님께서 빌립에게 지시하신 것은 거기까지입니다. ‘거기로 내려가다 보면 사람 얼굴처럼 생긴 커다란 바위가 나오는데, 그 앞에 작은 집이 하나 있고, 그 문을 두드리면 사람이 나올 거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라…’ 뭐 이런 식의 구체적인 지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빌립에게 ‘일단 일어나라. 그리고 가사까지 그 가는 광야 길로 가라’라는 것이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인도와 지시가 우리의 생각과 다를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인도라는 것이 구체적이지 않고, 막연한 지시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에게도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라고 말씀하셨지만, 구체적으로 어디로 가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일단 일어나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셨었습니다. 빌립도 ‘하나님 거기는 걸어가기에 너무 멀어요. 그리고 가사까지 가는 것 까지는 알겠는데, 뭐 하러 사람도 살지 않는 광야 길로 가라고 하시나요? 좀 더 구체적으로 알려 주세요’ 라고 질문하고 싶었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해 가실 때 아주 구체적이지 않을 때도 참 많습니다. 하지만 정말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면 그거 순종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식의 말씀은 그 분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으면 구체적이지 않아도 바로 일어나 길을 떠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그 분에 대한 믿음이 필요한 겁니다.

 

27절 말씀을 보시면,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빌립은 그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왜 그 먼 곳까지 가라하시는지, 그것도 사람이 안 사는 광야 길로 가라 하시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일어나 그 먼 길을 떠났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광야 길에서 누구를 만나요?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고위 관리(아마도 총리급 정도 지위)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가 다시 에디오피아로 내려가던 중이었습니다. 빌립이 그 내시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제가 처음 개척에 대한 부르심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구체적으로 알려주시지 않았습니다. 생전 개척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본 적도 없었던 제게 주님은 ‘교회를 개척하라’는 비전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이 제게 주신 말씀이 사실인지를 놓고 많은 기도를 드렸었습니다. 그리고 ‘예. 사실 조금 두렵기도 하지만 주님의 뜻이라면 개척하겠습니다.’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무 연고도 없는 ‘필리핀 세부에 한인교회를 개척하라’하시는 겁니다. 이것 역시 얼마나 막막한 말씀인지 몰라요. 한국에서 교회 개척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필리핀 세부에서 한인교회를 개척하는 것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런데 그 말씀을 놓고 기도하다가 ‘예 그러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제가 아는 사람도 없고,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처음엔 한인이 어디에 많이 사는 지도 몰랐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니깐 그냥 말씀하시는 대로 저는 하나씩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거 아세요? 그렇게 내가 계획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하나씩 순종하다 보니깐, 하나님께서 사람도 붙여주시고, 가장 적당한 자리에 교회 공간도 얻게 하시고, 거기서 예배도 드리게 하시더라구요.

그런데 나중에 정신 차리고 보니깐 세부에서 우리교회 위치만큼 좋은 자리에 한인교회를 세운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오고가다가 ‘여기에 한인교회가 있네’라고 하는 찾기 쉬운 곳에다 교회를 세웠던 겁니다. 제가 5년8개월 전 여기에 교회를 세울 때만해도 이 근처에는 저 너머에 교회 한 개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여기저기서 한인교회들이 이곳으로 이사를 와서 이 지역에 무려 다섯 개의 교회가 있습니다. 그 만큼 이 지역이 한인선교의 요충지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처음 세부에 십 여일 만에 교회를 개척했는데, 제가 이 지역에 대해 아는 게 뭐가 있었겠습니까? 다만 하나님의 인도만 따라 온 겁니다.

우리 집사님들이 여기서 정착을 하고, 장사를 하는데 여러분이 생업과 기업을 이뤄 가실 때도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 집사님 중에서 가족들과 함께 세부에 와서 정착하려 하는데, 영어도 잘못하고,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내가 뭘 해서 돈을 벌 수 있을까? 하면서 그냥 6개월 동안 돈 까먹으면서 새벽마다 기도만 했었어요.

그러던 중에 집사님이 한국에서 전자제품 관련 일을 하셨었기 때문에 ‘휴대폰 수리와 중고폰을 팔아야 겠다’라는 마음이 들더랍니다. 그런데 가게를 여길 해야 하나, 저길 해야 하나, 가게 세도 비싸고, 비즈니스 퍼밋 문제도 그렇고, 세금 문제도 그렇고… 복잡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닌 겁니다.

그러다 교회 옆 BTC에 자리가 난 겁니다. 집사님과 그 부분에 대해서 함께 얘기하면서 꼭 BTC에 들어가길 바랐었거든요. 그래서 세금문제도, 비즈니스 퍼밋 문제도, 가게새 문제도… 모든 게 한 번에 깨끗하게 다 해결되는 아주 만족스러운 장소에 샵을 내고, 이제 6개월 됐는데, 벌써 자리를 잘 잡아서 막탄에서부터 세부까지 휴대폰 고치려고 하는 사람들이 집사님한테 다 오고 있어요. 친절하고, 잘 고치고, 서비스도 잘 해 주니깐 소문이 좋게 났습니다.

우리 권사님이 김치가게를 집에서 하고 계셨는데, 늘 BTC에 작은 코너 하나에 냉장고 놓고 김치와 반찬들 팔았으면 좋겠다 하며 늘 그 부분 놓고 함께 기도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정말 여러 가지가 만족스러운 상황 속에서 거기에 반찬가게 하나를 내게 된 겁니다.

여러분이 기도할 때, 때로는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 같고, 하나님께서 아무 말씀도 안 하시는 것 같지만…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무기력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돈만 까먹고, 기도만 하고 있는 거 같지만, 기도자는 하나님을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평범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을 평신도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사는 사람은 비범한 크리스천이 되는 것입니다.

 

2.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라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빌립이 사마리아로부터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광야 길로 가는데, 거기서 에디오피아의 총리급 정도 되는 고위 관리가 수레를 타고 구약 성경 중 이사야 53장의 예언을 읽고 있는 것을 듣게 됩니다.

 

29절을 보시면,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그 때 성령께서 빌립에게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라고 지시하신 것입니다. 만약 빌립이 성령 충만하지 않았다면 그 성령의 음성이 민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했던 빌립은 성령의 음성을 듣고, 반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령으로 충만하려면 그건 결코 저절로 되는 게 아닙니다. 오순절 120명의 성도들이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 약 일주일 동안 마음을 같이 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고 사도행전 1장 14절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때 성령의 충만함이 임했던 것입니다. 갈릴리의 천한 어부들이었던 제자들에게 성령의 권능이 임했습니다. 각 나라의 방언을 말하고, 그 방언을 통해 복음을 전하고, 3천명, 5천명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역사들이 나타났습니다.

요즘 『2018 다니엘 기도회』를 하고 있는데, 여러분이 집에서 인터넷으로도 얼마든지 찬양도 듣고, 말씀도 들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시간에 TV 앞에 앉아 있거나, 밖에서 놀고 있는 것보다야 집에서라도 다니엘 기도회에 참여하는 건 정말 잘 하시는 겁니다.

하지만 교회에 성도들과 모여 함께 참여하는 것보다는 안 좋을 겁니다. 집에서 인터넷 틀어놓고 혼자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제 밤에도 예수전도단에서 오신 목사님 한 분이 설교하시는데 얼마나 큰 은혜가 되었는지 몰라요. 말씀 후에 기도할 때도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때 제 마음에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겁니다. ‘이 자리에 함께 앉아서 함께 예배하고 기도하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성도들이 있는데, 그 분들의 빈 자리가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우리 학생들이 지지난 주에 마닐라에서 하는 『2018 필리핀 코스타』에 참여해서 많은 은혜들을 경험했습니다. 매일 밤마다 강단 앞으로 나가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 입에서는 찬양이 흘러나오고, 표정이 밝아지고, 목소리 톤이 달라지고, 벌써 내년도 코스타를 기대하는 말들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다녀 온지 열흘밖에 안 지났는데 벌써 그 때의 감동을 잃어버린 친구들이 많은 거 같습니다. 코스타 다녀온 다음 날 토요일 저녁 다니엘 기도회에 우리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젠 그 은혜 다 까먹고, 다른 일들에 바빠 보여 제 마음이 안타까웠었습니다.

 

에베소서 5장16절, 17절, 18절에서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성령 충만하기를 원한다면 여러분이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를 점검해 보셔야 합니다. 때가 악하기 때문에 여러분이 자칫 방심하는 사이 여러분이 죄의 자리에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그 분을 더 알아가고, 은혜 받을 수 있는 자리를 놓치지 마십시오. 그런 이들이 주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작가 중에 한 분인 ‘존 비비어(John Bevere, 1959~)’목사님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입니다. 우리 한국 분들도 존 비비어 목사님의 책을 좋아합니다. 이 분이 쓰신 ‘Holy Spirit(성령)’이란 책에 보니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성령은 자신이 존중 받지 않는 곳에서는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신다.”

주님은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때문에 예수님을 사모하고 기다리고 환영하는 곳에서는 많은 역사들을 나타내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환영하지 않는 곳에서는 역사를 나타내지 않으셨습니다. 성령을 환영하십시오. 성령 충만을 사모하십시오. 성령을 존중하십시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민감하게 반응해 보십시오. 성령께서 빌립에서 ‘에디오피아 고위 관료의 수레에 올라가라’라고 말씀하시는데, ‘제가 왜요? 뭐 하러요? 저 쑥쓰러움 많이 타는 거 아시잖아요? 안 하면 안되요?’ 그러고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든 그건 여러분에게 복 주시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통해 뭔가를 하시려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에 뭔가를 자꾸 들려주신다면, 여러분을 통해 어떤 역사를 만들어 가시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복을 차 버리면 안 되는 겁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든, 그 말씀에 민감하게 반응하십시오. 순종하십시오.

 

3. 사람 살리는 인생을 살라

수레에 올라탄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그 이사야 53장의 말씀을 깨닫느냐? 고 묻습니다. 그런데 이사야서 53장에 어떤 말씀이 나와 있어요? 오늘 본문 32절, 33절에도 말씀하시고 있지만, 이사야서 53장은 메시야 수난 예언입니다. 메시야가 죄인들을 위해서 수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내용이 예언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필이면 에디오피아 고관은 바로 그 부분을 읽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복음을 전하기 좋은 기회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인도와 성령의 음성을 따른다는 게 이런 기회를 잡게 하는 것입니다.

 

35절입니다.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전도자 빌립이 이 기회를 놓칠 이유가 없었습니다. 빌립은 에디오피아 내시를 그 자리에서 전도했고, 수레를 멈추고 그 자리에서 세례까지 받게 함으로, 그를 에디오피아의 첫 번째 그리스도인으로 세우게 된 것입니다.

 

 

에티오피아(Ethiopia)에 관한 간단한 역사를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에티오피아는 B.C.980년경에서 부터 기원합니다. 성경에도 나오는데 시바라는 왕국의 여왕이 솔로몬에게 왔었을 때, 이것은 그들의 건국 전설이기도 하지만 솔로몬과 시바여왕이 사랑을 하게 되어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메넬리크 1세고, 그가 지금의 에티오피아로 가서 나라를 건국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전혀 근거가 없는 게 아닙니다. 에디오피아 사람들은 자신들이 솔로몬의 후예로 믿고 있습니다. 또 나라를 건국할 때 여러 유대인들이 함께 했기 때문에 혼혈민족이 탄생했고, 그래서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그 주변 아프리카 사람들과 달리 피부가 좀 더 밝습니다. 또 아프리카에서 미인이 많기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그 세계적인 모델인 나오미 캠벨 같은 사람이 에티오피아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에티오피아에는 ‘베타 이스라엘’이라고 불리우는 ‘아프리카계 유대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피부는 흑인과 유대인들의 중간쯤 밝기라고 합니다. 2012년 연구결과에 의하면 의학적으로 그들이 약간의 유대인 혈통을 가진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아프리카에서 여호와 신앙을 갖고 1세기까지 거의 900여년을 이어져 내려온 겁니다.

에디오피아 내시 역시 그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조상들로부터 신앙의 유산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빌립을 만나 복음을 받아들이고 에디오피아 최초의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 39절을 보면, 그 내시는 기쁘게 자신의 고국으로 돌아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치 박해 때문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듯이, 그 내시는 에티오피아로 돌아가 그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에티오피아는 A.D.330년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기 전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정한 나라가 된 것입니다. 지금도 북 아프리카 전역이 이슬람화 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에티오피아만은 기독교인이 약 62.8%나 된다고 합니다.

이 모든 일들이 빌립이 한 사람을 전도한 것에서 시작된 엄청난 역사입니다. 빌립이 에티오피아 내시를 전도했고, 그 고관은 본국으로 돌아가 나라를 바꿔놓은 겁니다. 빌립은 한 사람을 살렸지만, 그것이 한 나라의 역사를 완전히 바꿔 놓은 겁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평범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만큼은 평신도에 머무르면 안 됩니다. 빌립 집사님은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 보통 평신도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비범한 크리스천으로 살게 된 것은 그가 늘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성령의 음성에 민감했고, 사람을 살리는 전도자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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