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타협

“믿음은 타협하지 않는다”

<예레미야 38: 14 ~ 28>

전도를 하다 보면 효자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들은 지금 교회 다니고 싶은 마음도 있는데, 부모님 제사 때문에 못 온다고 말합니다. 그 제사 문제는 선교사님들이 한국에 들어오셔서 선교할 때, 큰 문제 중에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한국교회는 제사를 조상숭배와 우상숭배로 정하고 제사를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천주교의 경우는 좀 다릅니다. 601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는 선교사들에게 이 같은 칙령을 내립니다. “민간신앙과 풍습을 제거하지 말고 그리스도교 교리롤 변환시켜라.”는 겁니다. 만약 한 나라에서 사람들이 어떤 나무를 숭배한다면, 그 나무를 제거하지 말고 예수의 이름으로 그 나무를 거룩하게 한 뒤 계속 나무를 숭배하라는 겁니다. 이런 칙령은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이 카톨릭으로 개종하는데 큰 효과를 거뒀습니다.

1939년 교황 비오 12세 역시 중국 제사제도에 대해 “제례 문제에 관해서는 극동지방의 선교와 토착화를 위해 교황청에 전면적인 허용 조치를 청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이런 예식은 카톨릭 신앙과 상반되지 않음으로 불필요한 오해와 마찰은 카톨릭 선교와 토착화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깐 조상숭배와 제사에 대해서 전면 허용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한국의 천주교 역시 조상 숭배 제사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런 타협점이 카톨릭 선교에 큰 도움을 줬을 지 몰라도,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참된 진리는 결코 타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 순종의 대상인 것입니다. 타협은 변질과 타락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불러 여러 차례 하나님의 말씀을 묻습니다.

예레미야는 17절 말씀에서

“예레미야가 시드기야에게 이르되 만군의 하나님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바벨론의 왕의 고관들에게 항복하면 네 생명이 살겠고 이 성이 불사름을 당하지 아니하겠고 너와 네 가족이 살려니와”

예레미야는 왕의 위협에도 굽히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이 분명하고도 정해진 하나님의 뜻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할 마음이 없습니다. 왜 회개하지 않습니까? 무엇인가 그가 여전히 놓치 못하는 무엇이 있어서인 것입니다. 그의 욕심, 욕망, 고집과 같은 것들이 그를 회개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보다 그의 욕망의 크기가 더 크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것이 순종을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20절에서

“예레미야가 이르되 그 무리가 왕을 그들에게 넘기지 아니하리이다 원하옵나니 내가 왕에게 아뢴 바 여호와의 목소리에 순종하소서 그리하면 왕이 복을 받아 생명을 보전하시리이다”

시드기야는 유다 왕국의 최후의 왕입니다. 이제 곧 멸망할텐데,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그와 그의 가족들이 살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드기야는 자기 고집을 끝까지 내려놓지 못해 결국 멸망을 맞고, 그 역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서 타협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옳은 길이 아닙니다. 그길은 우리가 가지 말아야 할 길입니다. 그것은 우리 믿음의 변질과 타락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타협하지 않습니다. 다른 모든 것들은 얼마든지 유연하게 타협할 수 있으나, 하나님 말씀 앞에서 우리는 타협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타협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그것이 우리와 우리의 가정이 살 길인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에 있어서 여전히 타협하고 있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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