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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놓치지 말아야 할 것”

<사도행전 13:42~52> 

– Acts(40) –

 

 

요즘 한국에서는 미세먼지 때문에 보기 힘든 풍광인데, 우리가 살고 있는 세부는 하늘과 구름 그리고 바다가 정말 아름다운 곳입니다. 그래서 거의 매일 이런 경치를 볼 수 있습니다.

 

 

이 사진은 어제 새벽에 우리 바이크선교회 형제들과 만나 자전거 타고 탑스에 올라가서 제가 직접 찍은 사진입니다. 저는 자전거로 세부의 이 언덕과 저 능선 그리고 산들을 타고 다니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부가 이렇게 아름다운 곳인 줄 몰랐습니다. 세부는 아름다운 곳이 정말 많았습니다. 다들 바쁘니깐 자전거를 일주일 중에 하루 정도 밖에 못 타고 있지만, 그 때마다 느끼는 건 왜 이렇게 아름다운 곳을 지난 6년 동안 다 놓치고 살았을까? 하는 겁니다.

‘이 시대 최고의 지성’으로 불리며, 20여 년간 이화여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문화부 장관을 역임하기도 한 이어령(1934~) 문학평론가는 8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를 다니며 왕성하게 강연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십여 년 전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셨습니다. 이 분의 어떤 인터뷰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지금 (암) 투병 중 이에요. 고통스럽고 절망스럽지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거죠.”

“젊은이들의 가장 큰 실수는 자기는 안 늙는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러나) 젊은이는 늙고 늙은이는 죽어요.”

“그러니깐 내일 산다고 생각하지 말고 오늘 이 순간의 현실을 잡으라는 거죠.”

 

이 분은 대학교수부터 언론인, 저술가, 국문학자, 문화부 장관 등을 역임했습니다. 그러면 이 분처럼 삶을 알차게 보내신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쳐버린 인생의 무엇인가를 후회하고 아쉬워하고 계신 겁니다. 그래서 앞으로 조금 더 인생을 살게 될 젊은이들을 향해서 ‘오늘 이 순간의 현실을 잡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생은 사실 그리 길지 않습니다. 요즘은 얼마나 빨리 시간이 흐르는지 모릅니다.

 

시편 90:10절에서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120세까지 살았습니다. 요즘 사셨다면 세계 최고령 중에 한 분이셨을 겁니다. 하지만 그 120년의 세월이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기도했었습니다. 때문에 우리 생애에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돈은 조금 못 벌어도 괜찮습니다. 대단히 큰 성공은 못해도 괜찮습니다. 아주 유명해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렇게 되면 좋지만 그렇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9:27절에서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오늘의 현재가 오늘 뚝딱하고 나타난 게 아닙니다. 1년 전, 10년 전에 하셨던 여러분의 어떤 결단과 선택으로 인해 오늘의 현재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생에서의 우리의 선택과 결정은 우리의 미래와 내세의 삶을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현세를 살면서, 내 생애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1. 복음의 본질을 놓치지 말라

바울과 바나바는 오늘날의 터키 땅 중부내륙에 위치한 ‘비시디아 안디옥’이란 곳으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때마침 안식일이 되어 예배하기 위해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으로 가게 됩니다. 그곳의 회당장들은 멀리 예루살렘에서 그리고 시리아의 안디옥에서 온 성경교사들인 바울과 바나바에게 설교해 줄 것을 청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애굽 땅에서 430년간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의 출애굽부터 광야생활과 가나안 정복전쟁을 비롯해 사울 왕과 다윗 왕으로 이어지는 왕정시대까지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사실과 부활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시고 승천하신 사실을 증거 하게 됩니다.

 

43절을 보시면,

“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바울의 설교는 성공적이었습니다. 그 회당 모임이 끝난 후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44절에서 증거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일주일 뒤 다음 안식일에는 그 마을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몰려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45절 말씀을 보시면,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그런데 우리가 ‘복음’ 즉, 아무리 복된 소식을 전한다할지라도 어디에서나 환영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세부에서 성경적인 교회를 세워가고, 바르게 살고, 특별히 나쁜 짓을 저지르는 것도 아닌데 이유 없이 누군가는 우리를 미워할 수도 있을 겁니다. 여러 가지 나쁜 말들을 만들어 나를 모함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을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가는 곳마다 환영 받지는 못하셨습니다. 어떤 마을에서는 환영하셨지만, 도리어 예수님의 고향에서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복음을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하물며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저 역시도 누군가 저를 싫어한다고 하면 마음이 참 무겁고 어렵습니다. ‘목사로서 내가 좀 부족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어떤 큰 악을 행하는 것도 아니고,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아닌데, 저 분은 왜 나를 이토록 싫어하실까?’ 이런 걸 생각하면 억울한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어떤 잘못된 일이 있어서 그런 대접을 받는 건 마땅하다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그런 일을 겪을 땐 마음이 답답한 겁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상황들을 접하게 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선한 의도를 갖고 했던 말들과 일들이었지만, 상대방은 오해하고 오히려 나를 나쁜 사람 취급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거기서 느껴지는 모욕감과 분노가 있을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런 일들로 인해서 여러분이 맘 상할 이유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서 있고, 그 분 앞에서 부끄럽지 않다면 됐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그것을 잘못 받아들이고, 잘못 반응하는 사람이 사실 문제인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어떤 유대인들이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왜 이런 반응을 보인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까?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 사람도 아니었고, 그 교회 교인도 아니었습니다. 다른 지역에서 온 성경교사들이며, 설교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한 번의 설교로 그 회당에 모인 사람들이 바울의 복음에 매료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시기가 가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나바와 바울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가 배울 게 많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나바의 바울에 관한 리더십 부분입니다. 바나바는 예루살렘 초대교회에서 가장 존경 받는 목회자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과거 예수 믿는 자들을 박해했던 청년 사울(바울)이 회심했고,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았지만 예루살렘의 교회와 사도들은 그의 회심을 믿지 못했고, 그를 늘 경계했습니다. 하지만 청년 사울을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데려가 그의 회심을 입증하고, 그를 교회 앞에서 본격적으로 사역할 수 있도록 도운 사람이 바나바였던 것입니다.

바나바가 수리아의 안디옥에 목회자로 파송 받아 사역할 때, 협력목사로 사울을 청빙해서 함께 안디옥에서 사역했고, 두 사람이 성령의 지시로 최초의 선교사로 파송 받을 때만 해도 성경에는 이름의 순서를 ‘바나바와 바울’이라고 했었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선교사역지인 바나바의 고향 구브로 섬에 도착했을 때만해도 바나바에게 리더십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섬의 총독에게 복음을 전할 때 바울이 본격적으로 앞으로 나서기 시작합니다. 바울은 율법에 정통했고, 그 구약을 해석하고 복음을 전하는데 탁월한 설교자요 전도자였던 것입니다. 이때부터 성경은 ‘바울과 바나바’라는 순으로 이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리더십이 교체된 것이고, 바나바는 바울 뒤에 그림자 같은 존재로 선교여행에 동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이와 비슷한 상황이 다윗과 그의 친구 요나단의 관계 속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요나단은 사울 왕의 아들로 왕위 서열 1순위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그의 친구 다윗이 왕이 될 것을 알았고, 기꺼이 그 자리를 다윗에게 내어주었던 것입니다.

바나바와 요나단에겐 자기의 이익과 자리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리더가 되느냐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본질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뜻과 말씀이 먼저였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그 자리를 후배에게, 친구에게 내어주어도 상관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유대인들은 바울의 복음을 듣고 시기가 가득해진 것입니다. 바울의 복음이 진리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며, 수천 년 전부터 예언되어 있었던 그 메시야의 복음인 것은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그들의 기득권을 잃을 것이 염려가 되었고, 백성들이 자신들이 아닌 바울과 바나바에게 관심을 갖는 게 싫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깟 기득권, 잠시잠깐의 인기와 관심과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위해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도 엉뚱한 것들 때문에 정말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을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예배시간에 예배와 말씀과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은혜가 내려지고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은혜를 받아 누릴 생각을 하지는 않고, 성도들을 향한 잘못된 선입견에 괴로워하고, 설교자를 향한 여러 가지 오해의 시선을 갖고 있어 말씀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세부 교민사회가 너무 좁다 보니깐 한 사람만 건너면 모두 다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 중에도 과거 한인들을 꺼려해서 한인들 안 만나려 교회조차도 안 나오셨었던 분들이 계셨습니다. 지금이야 우리교회에서 가장 앞서 봉사하시고 성도들을 섬기시는 분들이 되셨지만, 한 때는 그런 적도 있으셨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싶고 또 우리교회를 나오고 싶기도 한데, 어떤 사람을 교회에서 마주치기가 불편할 수도 있을 겁니다. 세부 바닥이 워낙 좁아서 그런 일이 아주 많습니다.

하지만 속담처럼 ‘구더기 무서워서 장을 못 담는 것’과 같은 겁니다.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만약 오늘 밤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거둬 가신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인간적인 사소한 문제들이 여러분의 생명을 걸만큼 대단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기꺼이 참을 수 있고, 기꺼이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복음의 본질을 놓치면 안 됩니다.

 

2. 내게 주신 복을 놓치지 말라

우리의 생애에 놓치지 말아야 할 두 번째 주제는 ‘내게 주신 복을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설교를 통해 전해진 복음은 진리였고, 그 진리의 말씀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어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 성의 수많은 사람들도 그 복음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어떤 유대인들은 바울의 똑같은 설교를 같은 자리에서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바울의 말을 반박하고 비방하기 바빴습니다. 그들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전한 복음을 거절했습니다.

 

46절 말씀을 보시면,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터키 지역에 살고 있었던 유대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먼저 구원 받을 기회를 줬던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복음을 거부합니다. 그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임한 복이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에게 먼저 온 영생의 복을 놓쳐버리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민족입니다.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에게 시작된 이스라엘 민족은 온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다른 민족보다 수가 많기 때문도 아니고,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도 아니었습니다. 신명기 7장 8절에서 그들을 선택하신 이유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을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그들은 430년 동안 애굽인들의 노예로 살던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을 보며 출애굽을 했고, 홍해의 마른 바닥을 걸어서 건넜고, 40년 내내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받았고, 만나와 메추라기, 반석에서 터뜨려진 물을 먹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정말 어떻게 이럴 수 있지?’라고 할 만한 그런 형편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오래토록 참으시고 참으셨습니다. 그리고 언약하신 대로 유다지파 다윗의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나시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그를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박해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바울 사도가 전하는 복음 역시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전하고 전해도 당사자가 끝까지 거부하면 더 이상 방법이 없습니다. 그 사람에게 주셨던 복인데, 그것을 거부하고 또 거부하면 결국 그 복은 다른 사람에게 건너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먼저 주신 복을 놓쳤던 것입니다. 때문에 그들의 나라는 AD70년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고, 유대인들은 전 세계로 흩어져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46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그 복음은 이방인들에게로 흘러가기 시작하고, 특별히 터키와 그리스를 중심으로 유럽 전역이 복음화 되기 시작하고, 유럽의 2천년 역사는 기독교 역사를 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역사가 됩니다. 그리고 그 유럽은 2천 년 동안 세계를 지배하는 문명으로 성장해 나가게 되고,

그들이 복음을 거절하자 그 복음은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을 통해 세계 역사의 큰 흐름이 움직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복음이 지금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중국과 인도 같은 나라의 역사를 바꿔가고 있는 겁니다.

특히 중국과 인도의 성도들은 많은 박해와 핍박 중에도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히려 고난 중에 그들의 믿음은 더 순수하게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국과 인도의 교회들은 급성장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미국이 기독교 인구가 가장 많지만, 각각 1억 명 내외의 기독교인구의 중국과 인도의 교회성장이 만만치 않고, 교회의 성장과 함께 중국과 인도는 7%내외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고 있고, 인도 같은 경우는 구매력 기준 세계 3위의 경제 대국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는 더더구나 중국과 인도를 절대 무시할 수 없게 된다고 합니다.

복음을 거부한 이스라엘은 A.D. 70년 멸망했고, 그 복음이 들어간 나라마다 놀라운 변화들이 일어났고, 또 일어나고 있습니다. 민족과 국가에도 복음이 들어갈 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데, 복음을 받은 한 개인과 가정에는 어떤 일들이 시작되겠습니까? 내게 주신 복을 놓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좀 부족하거나 없어도 되지만, 복음은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한 사람의 인생과 자녀의 미래와 가정과 가문의 미래를 바꾸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노래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라는 곡이 만들어진 배경을 노래와 함께 영상으로 만든 자료가 있는데, 함께 보시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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