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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 프로세스(Vision Process)”

<사도행전 14:1~7> 

– Acts(41) –

 

 

우리사회에 ‘낙하산인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회사나 어떤 단체에서 공정한 경쟁을 거치지 않고 하늘에서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듯이, 배후의 어떤 권력에 의해 어느 날 갑자기 그 조직의 핵심인물이 되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낙하산이라는 말이 성립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능력’과 ‘인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자리에 앉을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지는 않은데, 배후의 어떤 힘 있는 사람의 인맥을 통해 공정한 경쟁 없이 그 자리에 앉게 된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2016년 대한민국을 혼란에 빠뜨린 ‘국정농단 주범의 딸, 정OO 씨’의 경우입니다. 이 땅의 수많은 학생들은 밤잠을 설쳐가며 열심히 공부해서 어렵게 들어가는 학교를 이 사람은 권력과 돈으로 쉽게 들어갔고, 학점까지 쉽게 얻었습니다. 권력을 등에 업고 약 35억 원에 달하는 엄청난 돈을 말 구입과 승마활동비로 대기업으로부터 지원 받습니다. 이런 사실들이 들어났을 때 국민들이 분노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결과만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과정을 무시한 사람의 결말, 과정이 탄탄하지 않은 이들의 결말은 비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아직 스물두 살 밖에 안 된 이 사람은 ‘고등학교 졸업 취소’가 되었고,

그녀가 입학 했던 ‘대학교 입학 무효’가 되었고,

그녀의 부정과 불법을 도왔던 여대의 교수들은 구속되어 버렸습니다.

또한 당시 정부의 실세들 역시 모두 구속되었고,

우리나라 최대의 기업이고, 세계적인 기업인 S그룹의 총수까지 구속되는 엄청난 사건들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꿈과 비전을 향해 나아갈 때, 그 꿈과 비전을 이루어나가는 과정이 참 중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은 ‘비전 프로세스(Vision Process)’라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인 복음 전파와 선교를 위해 각 마을을 다니며 전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비전은 곧 하나님의 비전이었고, 그들의 꿈은 곧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꿈과 비전이 얼마나 귀합니까? 그러나 그 꿈과 비전이 아무런 과정도 없이 그냥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비전이 이루어지는 과정에는 여러 가지 방해와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1. 부정적 의견에 흔들리지 말라

바울과 바나바는 터키의 ‘비시디아 안디옥’ 지역에서 동쪽으로 ‘이고니온’이란 마을로 이동해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에 들어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절 하반절에 보시면,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a great number of Jews and Gentiles believed)”고 되어 있습니다. NIV영어번역에서는 ‘great number’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이고니온 지역의 전도에 놀라운 성과가 있었던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2절 말씀을 보시면,

“그러나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어디에나 선과 악이 그리고 빛과 어두움이 공존하고 있듯이 여러분이 꿈과 비전을 향해 나아갈 때, 분명 좋은 성과들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성과들 때문에 기쁘기도 하고, 보람을 느끼기도 하고, 꿈을 향한 기대가 더 커지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항상 좋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의 발목을 잡는 것이 나타날 것입니다. 여러분을 시기하는 사람이나, 조직들이 여러분을 괴롭히기 시작할 것입니다. 여러분을 낙심하게 할 만한 여러 가지 상황들이 벌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여러분을 환영할 거란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모든 사람들이 여러분을 좋아하고, 여러분에게 협조하고, 여러분을 적극적으로 지지할 것이라고도 기대하지 마십시오. 분명 반대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2003년에 진보진영의 후보였던 분이 우리나라의 대통령에 취임하게 됩니다. 지금까지도 이 분을 존경하는 국민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분이 취임하고 미국에 방문해서 미국 대통령을 만나고 여러 가지 미국에 대해 좋은 이야기를 했던 겁니다. 예를 들어 “미국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나라, 자유와 정의가 항상 승리해온 나라로 대단히 부럽고 정말 좋은 나라다”고 하신 겁니다. 우방국의 대통령으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우리 대통령은 귀국하자마자 5.18행사장에 방문했는데, 거기서 일부 진보적 성향의 사람들이 대통령의 친미 발언을 성토하고 규탄하면서 소란을 피운 겁니다. 대통령 역시 진보성향이 강한 분인데, 자신을 더 지지해 줘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대통령을 규탄하고 그러니깐 대통령이 속이 좀 상했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그 때 대통령이 “이렇게 사사건건 문제 삼으면 이러다가 대통령직 못 해먹겠다.”라고 얘기를 한 겁니다. 얼마나 그 자리가 힘드셨으면 그렇게 말했겠습니까?

바울과 바나바가 그 마을에 들어가서 나쁜 얘기를 했겠습니까?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어떤 문제를 일으켰겠습니까? 사람들을 속이거나, 금품을 갈취했거나, 어떤 악한 일들을 벌였겠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커다란 반대에 부딪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 믿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마음까지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에게 악감을 품게 만들어버립니다. 이 구절을 메시지 성경에서는 “그러나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바울과 바나바에 대한 허위 사실을 유포하여, 사람들의 마음에 불신과 의혹의 씨를 뿌렸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제가 처음 이 땅에 교회를 개척해서 세워나갈 때 저 역시도 비슷한 경험들을 했었습니다. 제가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기 때문에 분명 실수도 했을 거고, 저로 인해서 마음이 상한 분들도 계셨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어떤 악한 짓을 했거나, 남을 속이거나, 남의 금품을 갈취하거나… 한 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세부를 돌아다니며 저에 대한 허위사실을 유포하기도 하고, 사람들의 마음에 저에 대해서 어떤 불신과 의혹을 갖게끔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깐 그런 소문을 들은 어떤 분들은 ‘저 목사님 그런 사람으로 안 봤는데…’하며 저를 향해 오해하시는 분들도 계셨던 겁니다.

저도 한국에서 20년 목회하면서 전혀 겪어보지 못했던 일을 여기 와서 겪다 보니 처음엔 정신이 없었습니다. 억울하고 분하기도 해서 잠을 설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건 기도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런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하고 싸울 수도 없었고, 진실을 밝히겠다고 삼자대면을 하고, 사자대면을 하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거짓말을 퍼뜨렸다는 사실을 드러내면 과연 그 사람이 회개하고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그러겠습니까? 절대 그런 일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더욱 더 저를 곤경에 빠뜨릴 것입니다.

때문에 저는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모든 억울함을 풀어주시고, 진실과 정의가 바로 서게 될 날을 기다리고 인내하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의 꿈과 비전이 아무리 좋고, 여러분이 바르고 정직하게 산다고 할지라도 모든 사람들이 다 여러분을 환영하고, 지지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때문에 당연히 여러분을 반대하는 사람도 나오고, 더 적극적으로는 여러분을 향해 대적하는 사람들, 방해하는 사람들, 여러 가지 악한 짓을 행하는 이들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여러분을 향한 부정적 의견에 흔들리지 마십시오. 그 사람들이 ‘신(神)’입니까? 그 사람들이 말하면 ‘짠’하고 무에서 유가 창조되듯이 그런 일이 벌어집니까? 그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여러분에게 그런 일이 벌어집니까? 여러분은 그 부정적인 사람을 그렇게 절대적으로 믿고 있습니까? 그 사람이 여러분을 향해 ‘개가 되라’ 그러면 개가 되고, ‘소가 되라’ 그러면 소가 됩니까?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저도 개척하고 얼마 안 돼서 ‘삯꾼 목사, 사기꾼목사’란 소리를 들었습니다. 목회자로 한국에서 20년 동안 사역하면서 비슷한 말 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심지어 생전 처음 들어보는, 참 기가 막히고 어의가 없는 말이었습니다.

부정적인 사람, 비관적인 사람은 항상 그런 말들을 입에 담고 삽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의 삶은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사람, 실패자의 말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참고해야 할 말은 긍정적인 믿음의 말을 하는 사람들, 기도하고 말하는 사람들, 성경 중심적으로 말하는 사람들, 하나님 중심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의 말에는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말의 품격』이란 책에 보면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 박사가 치료한 어떤 환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스트리아에 한 소녀가 살았는데, 미신을 신봉한 그녀의 할머니가 “넌 아들로 태어났어야 해. 넌 잘못 태어난 존재야.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죽을 지도 몰라.”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습니다. 소녀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할머니의 말은 소녀의 무의식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린 겁니다.

그런데 정말 스무 살이 되면서 소녀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습니다. 온 몸이 찢어질 듯한 고통이 매일같이 반복되었지만 병원에서는 그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소녀는 프로이트 박사를 찾아왔습니다. 프로이트 박사는 그녀와 상담하고 진단한 후에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몸 상태는 지극히 정상입니다. 단지 어릴 적 당신의 마음을 휘감은 할머니의 부정적인 말과 표현 때문에 그렇게 느끼고 생각하게 된 겁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타인이 지은 말의 감옥에 갇혀선 안 됩니다. 이제 그곳을 벗어나세요.”

 

여러분, 다른 사람이 뭐라고 말하든 그것은 그 부정적인 사람의 의견일 뿐입니다. 그 의견이 여러분의 현실이 되는 건 아닙니다. 그 부정적 의견이 여러분의 미래가 되는 건 아닙니다. 그 부정적인 의견에 흔들리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 외에 그 어떤 것도 완전한 것은 없습니다. 누가 뭐라고 말하건 그 사람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비전을 향해 나갈 때, 부정적 의견에 여러분의 믿음이 흔들릴 필요는 전혀 없는 것입니다.

 

2. 주를 힘입어 담대하라

이고니온 지역의 유대인들은 바울과 바나나의 복음을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허위사실들을 유포하기도 하고, 사람들을 선동해서 불신과 의혹의 눈으로 바울과 바나바를 바라보게 했던 것입니다.

제가 처음에 교회를 개척하고 그런 힘든 일들을 겪을 때 마음에 그런 생각이 참 많이 들었습니다. ‘지금 내가 복음을 전하고, 이 땅에 교회를 개척하여 사역하기도 바쁜데 이런 쓸데없는 일들에 내 시간과 에너지와 열정을 빼앗겨서야 되겠나?’ 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오는 낙심되는 마음들이 있었던 겁니다. 바울과 바나바라고 해서 왜 낙심되는 마음들이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3절 말씀을 보시면,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그러나 그들은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도 흔들릴 뻔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그들은 주님을 힘입음으로 담대함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담대함이 임하니깐 그들을 통해 놀라운 기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계속해서 더 능력 있게 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고린도후서 4:8절, 9절을 보시면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바울 사도는 이고니온에서 겪었었던 일은 큰일도 아니었습니다. 그 외의 지역에서도 엄청난 일들을 겪었었지만, 그는 이 고린도후서 4장의 말씀과 같은 일들을 날마다 경험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동서남북 어디 하나 피할 곳이 없이 사방으로부터 우겨쌈을 당하기도 하고, 누구에게도 하소연 할 수 없고 도움 받을 수 없는 답답한 일을 당한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않았고, 심지어 박해를 받는다 될 지라도 그는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고린도후서 4:7절을 보시면,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질그릇과 같이 연약하고 깨지기 쉬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질그릇에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게 된 것입니다. 때문에 깨지기 쉬운 연약한 싸구려 질그릇이 보배함이 된 것입니다. 그것이 질그릇의 능력입니까? 그 질그릇 안에 있는 보배이신 예수님의 능력이겠습니까? 바울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약하지만 주님을 힘입는 사람마다 견뎌낼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으로 인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강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지어진 노래가 ‘약할 때 강함 되시네’라는 노래입니다.

 

가사에 보면,

“약할 때 강함 되시네, 나의 보배가 되신 주 주 나의 모든 것, 주 안에 있는 보물을 나는 포기할 수 없네 주 나의 모든 것, 예수 어린 양 존귀한 이름, 예수 어린 양 존귀한 이름”

 

우리가 아무리 연약하고 부족해도 주님을 바라보고, 주의 말씀을 의지하여 나가는 이들마다 주님을 힘입어 담대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갈 용기를 얻게 되고, 다시 일어날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여러분이 꿈과 비전을 향해 나가는 동안 여러 가지가 여러분을 낙심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힘입어 담대함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전 세계 절망 속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닉 부이치치(Nick Vujicic, 1982~)’는 호주의 목사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팔과 다리가 없었습니다. 닉의 어머니조차 수개월 동안 자신이 낳은 아들을 차마 볼 수가 없어 닉을 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닉이 성장해 가면서 늘 가졌던 질문이 “하나님 저는 왜 이럴까요?”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나요?’ 하는 것이 그의 고뇌였다고 합니다. 이것에 대한 영상을 보시고 말씀 맺겠습니다.

 

 

닉 부이치치는 스케이트 보드도 탈 줄 알고, 수영 뿐만 아니라 써핑도 할 줄 알고, 골프도 즐길 줄 안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몸을 갖고 그런 것들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에게는 한계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책을 읽어보면 그가 ‘다른 건 다 할 수 있겠지만, 결혼은 못 할 줄 알았다’고 말합니다. 자신 같은 사람과 결혼하려고 올 여자는 없을 줄 알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아름다운 아내를 얻었고, 그 슬하에 네 명의 자녀까지 두고 행복한 가정을 이뤘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제가 할 수 있으면 여러분도 할 수 있습니다.”

 

닉 부이치치는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하나의 모델입니다. 여러분이 꿈과 비전을 향해 나가는데 왜 여러분을 방해하는 것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사람들의 부정적 의견에 흔들리지 마십시오. 모든 사람들이 여러분을 환영하거나 지지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닉 부이치치와 같이 주님을 힘입어 다시 일어나십시오. 담대함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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