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이드1

“기도 응답의 열쇠!”

<이사야 59:1~2>

 

 

미국의 소총 사격 선수인 ‘매튜 에몬스(Matthew D. Emmons, 1981~)’ 50m 소총 복사의 세계기록 보유자입니다. 그래서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금메달 1순위 호보였습니다. 그런데 2004년 올림픽 이후 이 선수에게 ‘헛총질 에몬스, 덜렁이 에몬스’라는 별명이 하나 붙었습니다.

2004년 올림픽 사역 50m 소총3자세 경기에서 매튜 에먼스는 사람은 금메달을 바로 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 때까지 쏜 점수가 너무 좋아서 2위와 격차도 많이 벌어져 있고, 마지막 발을 평소처럼 8점 정도만 맞혀도 금메달을 따고도 남았습니다.

그런데 매튜는 결승에서 극도로 드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2번 레인에 서서 그만 3번 레인의 표적을 쏘고 말았습니다. 표적은 제대로 맞추었지만 엉뚱한 표적인 까닭에 점수는 0점 처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확실한 금메달 후보의 순위는 8위로 떨어져버렸습니다(Kyle Idleman / 팬인가 제자인가 / 두란노).

아무리 실력이 좋은 선수라고 하더라도 잘못된 표적을 쏜다면, 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실력이 좋은 운동선수처럼 우리 주변에 열심히 기도하는 분들이 있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 3일 금식도 힘든데 40일을 금식하는 사람.

– 새벽에 일어나는 게 거의 불가능한 사람도 있는데 평생 새벽기도를 빠져 본 적이 없는 사람.

– 5분만 기도하면 더 이상 기도할게 없는데 2시간 3시간을 기도해도 지치지도 않고 기도할게 아직도 많다는 사람.

– 매일 밤 이불 싸들고 40일씩 1년에 몇 차례씩 기도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 제가 전에 섬겼던 어떤 교회 식구들도 ‘세이레기도회’를 저녁 8시에 시작해서 다음날 새벽5시까지 기도했다고 합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그렇게 기도하다가 대상포진에 걸린 청년도 있다고 들었어요. 물론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받으셨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런데 기도 목소리는 제일 크고, 보여 지는 건 대단한데 응답이 없다? 면 뭔가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요? 물론,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방법으로 지체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도 있겠지만… 분명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우리 기도를 듣고 계실 거 아닙니까?

 

이사야 1:15절에서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실력이 좋은 사격선수가 잘못된 표적을 쏜다면 그것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처럼, 우리가 아무리 많이 기도할지라도 상을 받을 수 없는 기도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각 방의 문을 여는 열쇠가 있고, 금고와 창고 문을 여는 열쇠도 각각 다릅니다. 천국의 문은 어떤 열쇠로 열리겠습니까? 천국의 문은 믿음이라는 열쇠를 통해서만 열수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기도응답이라는 문’을 여는 열쇠가 무엇일까요?

 

1. 기도 응답을 가로 막는 것은 ‘죄’입니다.

자녀의 급한 소원을 들어주는 부모가 좋은 부모입니까? 아니면, 자녀가 바른 자녀로 성장하도록 돕는 부모가 좋은 부모일까요?

우리가 ‘기도’하면 ‘응답’을 생각합니다. 기도가 도깨비 방망이나, 알라딘의 요술램프 정도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소원 들어주는 분으로만 믿고 있는 분도 많습니다. 그러나 기도응답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도생활을 통해 영적으로 바른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하고, 하나님께서도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전에 TV프로 중에 ‘우리 아이가 달라 졌어요’라는 것이 있어요. 그걸 보면 아주 버릇이 없고, 막무가내인 어린 꼬마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자녀들이 그렇게 된 데에는 그 자녀의 양육과 훈육을 제대로 하지 못한 부모의 문제가 크다는 것을 늘 결론적으로 말해 줍니다. 그래서 자녀가 변화되기 위해 부모가 먼저 클리닉을 받습니다. 그렇게 부모가 바뀌면 자녀가 변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런 부류의 부모들이 잘 못하는 것 중에 하나가 자녀가 무엇을 달라고 하든지 다 해 준다는 겁니다. 그러니깐 아이들이 점점 버릇이 없어지고, 감사도 모르고, 무서운 게 없고… 그렇게 되가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버릇없는 망나니가 되길 바라지 않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이 땅에서 높아지고, 존경받고, 축복받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누리는 인생이 되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기도 응답이 더디다 생각하지 마시고, 지체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더 깊이 묵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응답을 가로 막는 것은 ‘죄’입니다.

①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듣지 않으십니다(시66:18)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② 죄를 품고 있으면 많이 기도할지라도 듣지 않으십니다(사1: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③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습니다(사59:1,2)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④ 죄를 회개하지 않고 구하는 기도는 정욕적인 기도입니다. 정욕으로 구하면 응답되지 않습니다(약4: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 못 구하기 때문이라”

 

우리가 외국에서 살고 있지만, 한국처럼 먹는 문화가 발달한 나라도 별로 없습니다. 보통 외국 음식들은 접시 하나 달랑 나오고 끝인 경우가 많은데, 우리는 갖가지 반찬이 얼마나 많습니까? 정말 한국 음식이 세계 최고인거 같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개들이 먹던 더러운 그릇이나,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는 통에다 그 비싼 음식을 넣어준다고 하면 그게 맛있겠습니까? 나에게 ‘축복의 그릇’이 준비되지 않았는데 급한 기도라고 해서 응답해 준다면, 아직 그릇이 깨끗하지 않은데… 응답 응답 응답~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지금 응답이 더디고, 눈물의 기도 시간이 길게만 느껴지지만 우리 축복의 그릇을 준비하고 계신 줄 믿습니다.

마음에 죄악을 품고 있는 상태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있다면, 기도하기 전에 그 문제부터 해결하십시오. 십자가 앞에 우리의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오랫동안, 많이 기도하고, 새벽과 철야로, 금식하며 부르짖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잘못된 표적을 향해 총을 쏘는 것과 같습니다. 결코 상이 없다는 겁니다. 그 죄는 결국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점점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정욕으로 쓰려고 구하는 것 역시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응답하신다면, 그건 응답이 아니라 재앙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 때문에 세상에서 즐기느라 하나님과 점점 더 멀어져 지옥의 형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 응답을 가로 막는 것은 ‘죄’입니다.

 

2. 회개는 기도 응답의 지름길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의 그릇을 청소하는 겁니다. 축복 받을 준비를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소원하는 것을 주셔도 그것을 제대로 담고 사용할 수 있는 그릇을 준비하는 겁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는 3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마음의 뉘우침입니다(사29:13).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둘째는 입술의 자백입니다(요일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세 번째는 회개(悔改 : 뉘우칠 회, 고칠 개)입니다(마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그런데 회개는 말이 아닙니다. 마음의 생각만으로 그치는 것도 아닙니다. 뉘우침은 마음으로, 자백은 입술의 고백으로, 그러나 회개는 행동입니다. 그것을 끊어 버리는 겁니다. 더 이상 그 자리에 가지 않는 겁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29~30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하셨습니다. 눈을 빼버리고, 손을 찍어 버리라는 끔찍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게 어찌 가능이나 한 말이겠습니까?

 

그래서 히브리서 12:4절에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철저하게 돌이키라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영적 절정기에 얼마나 충만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사도바울에게도 영적 싸움, 죄와의 싸움이 늘 치열했습니다. 그래서 죄와 싸우되 몸부림을 쳤던 것입니다(Struggling with sin).

피 흘리기까지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에 대해서 너무 관대하지 않습니까? 소돔과 고모라처럼 죄가 널려 있으니깐 그것이 죄인 줄도 모르고 그냥 무덤덤하게 우리는 넘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 흘리기까지 치열하게 싸우면 죄는 우리 삶에서 점점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축복의 그릇은 점점 넓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서 58장은 금식기도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보통 기도 중에 가장 강력한 기도가 금식기도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금식을 기도 응답의 수단으로, 방법으로 사용한다면 문제가 됩니다. 구약의 금식의 예를 살펴보면 그런 위기의 순간에 금식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죄를 회개하기 위해 금식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금식이 기도응답의 수단으로, 방법으로만 사용되고 있는 것은 분명 금식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58:6,7절 보세요.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꺽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우리말 성경은 이 말씀을 쉽게 번역해 놨습니다.

“내가 받고 싶은 금식은 이런 것들이 아니냐? 부당하게 묶인 사슬을 끌러 주고 멍에의 줄을 풀어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을 자유롭게 놓아주고 모든 멍에를 부숴버리는 것이 아니냐? 너희가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나눠 주고 가난한 노숙자를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냐? 헐벗은 사람을 보면 옷을 입혀주고 네 혈육을 못 본 체하지 않는 것이 아니냐?”

밥 굶어 가면서 ‘주여 주여 주여’하는 거라고 나와 있지 않습니다. 아무리 그렇게 금식해도 삶의 변화가 따르지 않는 금식에 대해서 하나님은 귀를 막고 계시는 겁니다. 그런데 삶이 변해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 믿는 냄새가 좀 나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개는 행동의 변화를 회개라 합니다. 그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행하십니까? 58:8,9절 보세요.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있다 하리라…”

 

여러분, 기도 응답의 지름길은 회개입니다. 죄를 청산하는 것입니다. 죄를 청산해야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의 속성이기 때문에 죄를 회개할 때 하나님은 그의 옆에서 “내가 여기 있다”하시는 것입니다.

욥이라는 사람은 ‘동방의 의인’이란 칭호를 들을 정도로 누구보다 열심히 신앙 생활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모든 사람들에게 본이 될 만한 사람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욥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사탄이 그런 걸 잘 압니다. 그래서 그 부분을 공격하기도 합니다. 욥의 약점은 하나님 앞에 너무 의롭게 살다보니깐 어느새 마음 속에 ‘이 정도면 됐지! 나는 죄 없어! 나는 의인이야!’ 이런 생각이 자리를 잡게 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죄를 짓는 사람들을 보면 쉽게 그들을 정죄하기도 합니다. 사탄은 그렇게 욥을 넘어뜨리려 했습니다.

욥기 1장에서 42장 이전까지 욥은 ‘나는 죄 없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욥을 공격한 사람들을 미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욥기 42장에서 욥은 회개합니다.

 

욥기42:5~6절을 보면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그리고 욥은 그를 공격했던 친구들을 용서하며 친구들을 위해 기도하고 축복해줍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욥기42:10절,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욥이 회개하니깐 어떻게 되요?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할렐루야~!

바벨론의 느브갓네살이란 왕이 있었습니다. 당시 중동의 패권을 장악한 대제국의 왕이었습니다. 그 때 느브갓네살이 심히 교만해졌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서4:10절이하에 보면

“나 왕이 말하여 이르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걸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그 말을 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그 왕위를 그에게서 거두어 버리십니다. 그리고 그 왕은 그 자리에서 미친 사람이 됩니다. 왕궁 밖으로 뛰어나가더니 소처럼 풀을 먹고, 산과 들을 뛰어 나디며 짐승처럼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게 됩니다. 7년간 그 일이 계속됩니다. 그러던 중 이 왕이 하늘을 우러러 봅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 그 교만을 회개하는 마음이 들어온 겁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 영광과 왕위를 다시 그에게 주시는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기도응답을 가로막는 것은 ‘죄’입니다.

기도응답의 열쇠는 ‘회개’입니다.

 

문제는 돈이 아닙니다. 당장의 문제 해결이 아닙니다. 문제는 항상 우리의 마음이 문제였고, 우리에게 축복 담을 그릇이 준비가 안 되었던 것이 더 큰 문제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늘 기도하고 있지만, 우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한국교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 민족이 무엇이 문제입니까?

교회는 많아도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없는, 역사하시고 싶지 않은 교회가 많이 있는 겁니다. 역사하실 수 없는 목회자가 많이 있는 겁니다. 그런 성도가 많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가 세상에 영향력을 잃었습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맛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말에서도 영향력이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이제라도 돌이켜 회개하면 하나님은 한국교회를 다시 사용하실 것입니다. 다시 부흥시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청산하고 하나님과 더 친밀해 지시기를 바랍니다. 축복 담을 그릇을 준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사58:9)”

 

기도응답의 열쇠는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Add a Comment

You must be logged in to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