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이드1

“무엇을 따를 것인가”

<열왕기상 12:21~33> 

– 열왕기상(22) –

 

 

커피는 19세기 말 고종황제와 서양선교사들을 통해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것으로 보는데, 근 10년 전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닝커피로 시작해서, 점심식사 후에도 의례 커피를 찾게 되고, 저녁에 친구들을 만나면 또 커피를 마시기도 하면서 하루에 2~3잔을 기본으로 마십니다. 그래서 세계 커피 시장 매출에 있어 미국에 이어 중국과 함께 2~3위를 다툰다고 합니다. 인구수에 비례하자면 어쩌면 우리나라가 전 세계 1위라 해도 과언이 아닌 듯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커피 바리스타 1세대이며, 커피의 명인으로 불리는 ‘박이추 선생’이란 분이 계십니다. 재일교포 2세로 자라서, 일본에서 낮에는 트럭운전을 하고 저녁에는 커피를 배워 한국으로 들어와 일본국적을 버리고 조국에 귀화했습니다.

 

1988년 서울 혜화동에 ‘보헤미안’이란 커피 점을 열어 생두를 직접 볶고(로스팅), 핸드 드립 커피를 선보이면서 한국에 커피 문화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장본인입니다.

지금은 강원도 강릉 카페거리에서 커피 점들을 운영하고 있는데, 오후에 문을 닫는 날이 많기 때문에 저녁엔 영업 안 하는 날도 많고, 어떤 날들은 ‘오늘의 커피’ 한 종류만 테이크 아웃이 되는 배짱 운영을 하고 있습니다. 보통 커피 점에 가서도 바로 앉지 못하고 1시간 정도는 기본적으로 기다렸다가 들어가서 커피 맛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또 1시간 뒤에는 다음 손님들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야 하고, 카페 내에서 노트북과 독서 등을 하지 말아야 하고, 오로지 커피 만 마시고 잠시 머물다 나와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도 이 커피 전문점에는 앉을 자리 찾기가 어렵다는 겁니다.

기자가 그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박이추 선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비결이 있다면 말로만 말고 진심으로 미쳐야 한다. 미치면 재밌어진다.”

 

새로운 커피 맛을 찾으려고 하루에 열잔, 열다섯 잔씩 커피를 마셔가며 40년 가까이 매일 커피를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이 분에게 장사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돈에 신경을 쓰면 돈이 도망간다. 돈은 생각 안 할 때 들어오더라.”

 

이 분은 커피에 미친 겁니다. 그래서 저 연세 되도록 커피를 내리면서 여전히 부족하다 생각하고 최고의 커피를 찾고 있다고 합니다. 평생을 커피에 미쳤고, 커피를 내리는 바리스타의 길을 따르며 살아왔더니, 어느 날 대한민국 커피의 명인이 되어 있었고, 유명해 져 있었고, 돈은 따라왔더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인생을 살면서 무엇을 따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과 운명이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커피에 미쳐 커피를 따르던 한 사람은 커피의 명인이 되었고, 성공도 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올 해 상반기 내내 뉴스와 가십 기사가 되었던 것이, 아직 한창인 젊은 유명 연예인들의 마약과 성매매와 추행 그리고 유명 정치인들 역시 비슷한 죄들로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우리는 지켜봤습니다. 세상의 쾌락과 일락을 좇던 이들의 결말을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5장 6절에서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지금 당장은 큰돈을 만지고 있고, 크게 성공한 거 같아 보일지라도 그 선택과 그 길은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향락(일락)을 좇는 자는 살아있지만 죽은 것과 같다고 성경은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 길로 계속 가다가는 인생의 재앙을 만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무엇을 따를 것인가? 어떤 길로 갈 것인가? 어떤 가치를 갖고 살 것인가?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의 기로에 늘 놓여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과 운명은 결정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역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어떤 선택의 기로에서 무엇을 따라야 할까요?

 

1. 감정이 아닌 말씀을 따르라

광야 40년을 지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를 앞세워 가나안 땅을 정복했고, 요단강 서쪽과 동쪽을 12개로 나눠 12지파가 그 땅을 차지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과 다윗과 솔로몬에 이르기까지 약 120년 동안 12지파가 하나의 이스라엘로 있었습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이스라엘의 수도는 예루살렘이었고, 왕궁도 예루살렘에 있었지만 온 이스라엘 앞에 왕의 대관식을 위해서 에브라임 지파의 세겜 땅으로 갔었습니다. 하지만 다윗 가문이 속한 유다지파와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10개 지파가 여로보암이란 사람을 앞세워 반역을 했고, 여로보암을 북이스라엘 10개 지파의 왕으로 세웠던 것입니다.

 

21절 말씀을 보시면,

“르호보암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유다 온 족속과 베냐민 지파를 모으니 택한 용사가 십팔만 명이라 이스라엘 족속과 싸워 나라를 회복하여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에게 돌리려 하더니”

 

르호보암 왕은 예루살렘으로 급히 피신해 비상계엄령 같은 걸 선포하고, 유다 족속과 베냐민 지파의 군사들을 모집했더니 18만 명이 모였고, 그들은 여로보암을 비롯한 북 이스라엘의 반란을 잠재우려고 했습니다.

르호보암 왕은 당황스런 상황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을 것입니다. 온 백성이 르호보암 왕 만세를 부르며 다윗의 손자, 솔로몬의 아들인 자신을 위한 왕의 대관식을 거행할 것으로 알았다가 백성들로부터 뒤통수를 맞은 것입니다.

그래도 지난 73년 동안 다윗 왕가의 통치로 나라는 그 주변 어떤 나라들 보다 강대해졌고, 태평성대 속에 은을 돌처럼 흔히 여기는 부유한 나라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이 위대한 할아버지 다윗 왕의 통치와 지혜의 왕이었던 아버지 솔로몬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그런 공로는 모르고 반란을 일으켰다고 생각이 들었고, 그것은 순간적인 감정의 폭발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급히 군대를 조직하고, 반란군들을 진압하기 위한 전쟁을 시작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예배 말씀을 나눌 때 우리 인간에게 ‘감정의 뇌’라는 것과 ‘이성의 뇌’라는 것이 있는데, 감정이라는 뇌가 강하게 자극이 될 때 이성의 뇌의 활동을 막아버린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어떤 감정이 폭발해 버리면 이성을 잃게 되고 끔찍한 일을 저지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 순간 이성이 마비가 된 겁니다. 그 때 뇌의 상태는 감정의 뇌가 우리 뇌 전체를 장악해 버린 것입니다. 이 때는 누구의 말도 안 들리기도 합니다.

여러분의 잘못된 감정들, 상처나버린 감정들, 열등감과 같은 감정들, 슬픔과 우울의 감정들, 미움과 분노의 감정들이 여러분의 뇌를 장악하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울증 환자들이 자살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그런 감정을 이겨내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감정이란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늘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감정의 폭발을 막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을 수 있지만, 우리가 늘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나를 비춰보고, 하나님의 뜻에 내 마음과 감정을 비춰보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전 인격이 주님의 말씀과 지배와 통치 아래로 들어가는 겁니다. 내 인생의 모든 기준이 하나님과 그 분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말도, 마음과 감정의 상태도, 행동도, 계획도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믿음으로, 말씀으로 우리의 감정도 조절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잘못된 감정에 휘둘려 ‘욱’했다가 그것이 발단이 되어 걷잡을 수 없는 실수로 이어진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로 인해 어떤 이들에게 깊은 상처를 입히기도 하고, 어떤 이들과의 관계는 깨져버리기도 하고,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얼굴을 못들 정도로 수치스러울 때도 있는 것입니다.

 

24절 말씀을 보시면,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는 올라가지 말라 너희 형제 이스라엘 자손과 싸우지 말고 각기 집으로 돌아가라 이 일이 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하셨다 하라 하신지라 그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돌아갔더라”

 

그렇게 르호보암 왕과 유다와 베냐민이 전쟁을 시작하려고 하는 순간 하나님의 사람 스마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것입니다. 형제인 이스라엘 자손들과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르호보암 왕과 유다와 베냐민의 군사들은 그 말씀을 따라 들끓던 감정을 내려놓고, 집으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말씀이 감정을 컨트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감정을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감정이 아닌 말씀을 따르기로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으면 화내고 싶은 것도 참고, 미워하는 마음도 참고, 용서도 하고, 기꺼이 포기도 하고, 손해도 보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완전한 나의 감정이 아닌 진리의 말씀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정이란 것은 자주 우리를 속입니다. 그 감정 따라 가다 망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2. 계산이 아닌 말씀을 믿으라

여로보암을 왕으로 세운 북이스라엘에는 또 다른 변화들이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은 그 동안 약 73년간 다윗 왕에 의해 세워진 예루살렘이 수도였습니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이스라엘 역사에 의미가 있었던 세겜을 북이스라엘의 수도로 삼고, 세겜 성을 보수하고 증축하여 성곽으로서의 위용을 갖추게 됩니다. 하지만 북이스라엘의 왕이 된 르호보암의 마음에는 여전히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27절 말씀을 보시면,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들의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의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문제는 다른 게 아니라 다윗과 솔로몬에 의해 약 73년 간 신정왕국이었던 이스라엘이 갑자기 분열이 된 겁니다. 이스라엘 왕국의 정통성은 예루살렘 성전 예배를 빼고는 결코 생각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은 남유다 왕국에 속해 있었고,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하기 위해 남유다의 예루살렘으로 자꾸 오고가게 되다보면 이스라엘의 정통성 있는 왕은 남유다의 르호보암 왕이라고 생각하고, 백성들이 자신을 죽이고 르호보암 왕에게로 돌아갈거 같았습니다.

 

 

그래서 28절을 보시면,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마치 광야 40년 중에 모세의 형 아론과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이 출애굽 시킨 하나님이라고 섬겼던 것과 같은 겁니다.

예루살렘은 유다 왕국 내에 있었고, 백성들이 자꾸 예루살렘을 들락거리는 게 마음에 거슬렸던 겁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의 북쪽 끝 경계인 ‘단’과 남쪽 끝 경계인 ‘벧엘’지역에 각각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백성들에게 이제는 힘들게 예루살렘까지 갈 필요가 없다고 하고, 그 금송아지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고 선포해 버린 것입니다.

그 외에도 레위자손이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게 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금송아지를 만들고 섬기게 한 레위인들이 반발이 있었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경건한 레위인들은 남 왕국으로 탈출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어기고 있었던 것입니다(31절).

그 뿐만 아니라 장막절(수장절)이라고 하는 절기를 그들의 종교력인 7월 15일이 아니라, 8월 15일로 임의로 바꾸어 지키게 했습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에게 맞게 임의로 바꾼 것입니다(32절).

사람들은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그것을 대신하거나 대체할 사람이나, 어떤 물건이나, 우상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단들의 특징을 보면 ‘저게 왜 이단이지?’라고 생각할 만큼 잘 모르는 사람은 기독교의 한 분파처럼 보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성경을 갖고 있고, 그들도 하나님도 믿고 예수님도 믿는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로보암이 32절에서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하고’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그냥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그 속으로 들어가 보면 여로보암의 탐욕과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계산이 있는 것과 같이 그 이단 교주의 욕망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의 주요 이단들과 사이비 종교의 교주들이 하나같이 엄청난 물질 문제와 또는 심각한 성적인 문제들이 있어왔고, 이것은 외국에서 시작된 이단인 몰몬교 같은 경우도 예외는 아닙니다. 몰몬교의 창시자 조셉 스미스 같은 경우도 약 30여명의 아내를 두고 있었고, 그 이후에도 여전히 몰몬교 내에서 일부다처를 허용했었습니다. 이슬람의 창시자 마호멧 역시 13~21명의 아내가 있었고, 가장 어린 아내는 9살짜리도 있었습니다. 마호멧이 그랬으니 이슬람은 지금까지도 그 전통을 따라 일부다처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죄다 비슷하게 무엇인가를 만들어 자신들의 종교만이 진정한 종교고, 기독교라고 하지만 가짜인 것입니다. 그 배후에는 여로보암의 계산과 같은 탐욕의 계산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런 계산을 하고 있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말씀 그대로 따르다보면 자신의 감춰진 욕망이 다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14, 15절 말씀에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욕심과 욕망의 시험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도 이런 시험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런데 그 욕심에 끌려 욕망을 따르다 보면 그것은 죄를 낳게 되고, 그 죄로 인해 그는 멸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22절을 보시면,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가운데 있는 모든 유혹의 욕심을 버리고 성령 안에서 새 사람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그렇다면 그런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다 라고 하면 성경인 것입니다. 성경이 아닌 것,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 예수가 아닌 것, 주님의 뜻이 아닌 것들은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살 길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여로보암 왕으로부터 시작된 북이스라엘의 역사는 약 200년간 이어지는데, 왕조가 9번이나 바뀝니다. 왕은 20번이나 바뀝니다. 평균 10년 동안씩 왕을 한 겁니다.

그런데 남유다는 345년 동안 다윗 왕조가 계속 이어지게 됩니다. 남유다 역시 20명의 왕이 있었는데, 다윗 왕가임을 감안할 때 다윗과 솔로몬까지를 포함한다면 425년간 하나의 왕조가 이어집니다. 그리고 평균 집권기간은 약 20년씩 다스린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르호보암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니깐 그대로 순종하는 겁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은 말씀을 완전히 벗어나 통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줬는데 2년 만 통치하다 반란이 일어나 다른 왕조가 들어서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북이스라엘의 역사는 다 이런 식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 분의 말씀을 따르지 않으니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도 그 사람에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감정이 아닌 말씀을 따르십시오. 계산이 아닌 말씀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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