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이드1

“재앙의 시작”

<열왕기상 14:1~20> 

– 열왕기상(24) –

 

 

2017년 5월에 우리나라의 문재인 대통령은 우리나라 최대 동물보호단체 중 하나인 ‘케어’라는 곳에서 ‘토리’라는 이름의 유기견 한 마리를 입양했습니다. 이 동물권 단체의 대표는 뮤지컬배우 출신인 박소연이란 사람이 맡고 있습니다. 이 케어라는 단체는 정기 후원 회원만 5천 명이 넘고, 지난 한 해 공개된 후원금만 20억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단체가 이렇게 성장하는데 박 대표의 영향이 매우 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라고 합니다. 뮤지컬 배우 출신답게 눈물을 흘리며 호소력 있는 목소리로 동물권 보호를 위해 시민들에게 호소하고, 각종 언론에 종종 노출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정말 이 사람이 동물을 사랑하며 돌보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많은 후원금을 보냈던 겁니다. 그래서 그녀에겐 유기된 애완동물들의 ‘구조의 여왕’이란 수식어가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작년부터 계속해서 이 단체와 박 대표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었고, 이번 주에 한 TV 시사고발프로를 통해 다시 한 번 안락사를 비롯한 동물학대와 자금 횡령 등이 집중 부각되어 검찰로 송치되어 조사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검찰수사가 마쳐져야 정확한 범법사실 여부가 드러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국민들은 박 대표의 이중생활에 대해 큰 충격을 받았고, 그녀의 행위들에 대해 분노를 느끼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녀가 구조의 여왕이 아니라 개 학살자로 지탄받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녀가 처음 동물권 보호 시민단체에서 활동할 때의 초기에는 정말 동물을 사랑했을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현재 방송과 언론매체들을 통해 밝혀지고 드러나고 있는 내용만을 갖고 보면, 동물을 사랑하던 그녀의 순수하던 마음이 퇴색되거나 변질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고 이제는 이 단체의 존폐위기에까지 놓여지게 된 것입니다. 한 개인의 인생에도, 우리나라 최대 동물권 시민단체에도 왜 이런 재앙이 오게 되었을까요?

 

1. 탐욕의 종이 되지 말라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재앙의 원인은 결국 인간의 탐욕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처음에 순수하고 열정적일 때는 그렇게 잘 성장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다 그 순수함과 열정보다 내 안에서 더 커지는 게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걸 조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1절 말씀을 보시면,

“그 때에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가 병든지라”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는 이름의 뜻이 ‘여호와는 나의 아버지시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여로보암은 우리가 알다시피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고, 그는 단과 벧엘에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백성들에게 ‘이것이 여호와라’고 하며, 우상숭배를 장려했던 악한 왕이었습니다. 또 레위인이나 아론의 후손이 아닌 아무나 원하기만 하면 백성의 제사장으로 삼았고, 초막절(수장절, 장막절) 절기의 날짜를 임의로 다른 날짜로 바꿔 버리기까지 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자기의 정치적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던 겁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의 이름은 여호와 신앙을 뜻하는 ‘여호와는 나의 아버지시라’는 의미입니다. 이름은 보통 부모가 짓는데 그렇다면 여로보암이 왕이 될 초기에는 어쩌면 그는 여호와 신앙을 갖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아들을 낳고 이런 신앙적인 이름을 지었던 거 같습니다.

그리고 이 아들은 아버지 여로보암과는 달리 정말 그 이름과 같이 선하게 살았던 거 같습니다. 13절에 보면, 이 아들에 관해서 “여로보암의 집 가운데에서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선한 뜻을 품었음이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비야 왕자가 죽자 18절에서는 “온 이스라엘이 그를 장사하고 그를 위하여 슬퍼하니”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백성들에게 신임과 사랑을 받던 왕자였고, 여로보암의 뒤를 이을 서열 1위인 왕자였기에 모두가 그의 죽음을 슬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 1절로 돌아와서 백성들의 사랑을 받고, 아버지 여로보암 왕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그 후계자 아들인 아비야 왕자가 병들어 죽게 된 것입니다.

 

2절 말씀을 보시면,

“여로보암이 자기 아내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일어나 변장하여 사람들이 그대가 여로보암의 아내임을 알지 못하게 하고 실로로 가라 거기 선지자 아히야가 있나니 그는 이전에 내가 이 백성의 왕이 될 것을 내게 말한 사람이니라”

 

아들이 죽어가니 여로보암 왕이 어떻게 합니까? 마음이 급하니 하나님의 사람 선지자 아히야를 찾습니다. 이 아히야 선지자는 여로보암이 북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을 예언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도움을 구하지도 않던 사람이 위급한 일을 겪게 되면 하나님을 찾는 거랑 비슷한 거 같습니다. 물론 그런 시련과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찾고, 그 분을 만나고, 믿음과 은혜를 회복하는 기회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은 이렇게 하나님을 찾는 일 역시 뭔가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 해 그런 재앙이 왔으면 진정으로 눈물로 회개하며 그 하나님 앞에 자기가 직접 나아가 엎드려도 부족할 텐데 여로보암이 어떻게 합니까? 자기 아내를 불러서 변장을 하게하고 아히야 선지자에게 보내는 겁니다. 그리고 아들이 어떻게 될지 알아보라는 겁니다.

이 장면은 마치 사울 왕이 자기가 왕이 아닌 것처럼 하고 속이고 신접한 자를 찾았던 장면과 유사하게 보입니다. 이 두 사람의 특징은 모두 ‘속임과 거짓’에 있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을 보시면,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모든 속임과 거짓은 마귀에게로부터 오는 겁니다. 뭔가 감추려고 하다 보니 자꾸 거짓을 말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서론에서 어떤 동물보호단체의 대표에 관한 이야기를 잠시 드렸는데, 그가 진실한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곧 세상에 다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만약 그가 거짓을 말했다면 그것은 국민 전체를 속인 것과 같은 겁니다.

그런데 왜 속이겠어요? 왜 감추겠어요? 자기의 어떤 이기적 욕구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진실하게 하면 뭔가 자기에게 떨어지는 게 없고, 속여야 자기가 더 많은 것을 누리고 가져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속이는 겁니다. 결국 속임의 원인은 ‘탐욕’인 것입니다.

여로보암 왕은 아들이 죽어가는 마당에, 하나님의 선지자를 만나 기도를 받고 도움을 받을까 말까한 상황 속에서도 ‘속임과 거짓’의 종이 되어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 믿음의 방법이 아니라 여전히 세상적인 방법으로, 마귀가 원하는 방법으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여로보암이 첫째 아들을 ‘여호와는 나의 아버지시라’는 뜻의 ‘아비야’란 이름으로 지은 것으로 봐서 그도 여호와 신앙을 갖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의 순수한 모습을 보고 그를 선택하여 북이스라엘의 왕권을 그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왕 위에 올라서 다스리다 보니깐 그 왕권에 대한 욕심이 점점 커졌던 겁니다. 백성들이 이스라엘의 3대 절기 때만 되면 남유다의 예루살렘 성전에 오고가는 모습을 보며 여로보암은 백성들의 마음이 남유다 왕에게로 돌아갈까봐 불안한 마음을 갖게 되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 왕권수호를 위해 단과 벧엘에 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제사장을 아무나 세우고, 절기도 편의에 따라 바꾸기도 하는 등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버렸던 겁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말씀을 버린 겁니다.

 

9절 말씀을 보시면,

“네 이전 사람들보다도 더 악을 행하고 가서 너를 위하여 다른 신을 만들며 우상을 부어 만들어 나를 노엽게 하고 나를 네 등 뒤에 버렸도다”

 

이 구절의 하반절에 보니 “나를 네 등 뒤에 버렸도다”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여로보암은 자신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 하나님을 버린 겁니다. 자신의 탐욕 때문에 하나님을 멸시했던 것입니다.

우리 안에 어떤 탐욕이든 그것이 우리의 믿음보다 커지도록 내버려 두면 그건 우리가 망하는 길입니다. 물질적 욕심이든, 성적 욕망이든, 세상 명예와 권세에 관한 욕망이든… 결코 하나님보다 커지거나, 우리의 믿음보다 더 커지도록 내버려두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앉아 계셔야 할 자리에 그런 것들이 앉아있기 시작하면 우리에게 재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15절 말씀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욕심을 내면 내가 모든 것을 더 많이 얻을 거 같지만, 그 결국은 망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16세기 프랑스의 사상가요 철학자인 ‘몽테뉴(Michel Eyquem de Montaigne 1533 ~ 1592)’는 탐욕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탐욕은 일체를 얻고자 욕심내고서, 도리어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TV 뉴스에 나오는 정치인이든, 경제인이든, 교육가든, 연예인이든, 서론에서 말한 시민단체 대표든 아니면 성직에 종사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떤 종류의 탐욕이든 그 탐욕의 종이 되기 시작하면 그것은 그가 망하는 길입니다. 탐욕을 가진 그 순간부터 재앙은 그 때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시점이 오게 되면 자기가 그토록 원했던 모든 것은 한 순간에 잃게 되는 것입니다.

 

2. 재앙 중에도 보호 받다

여로보암은 자신 안에서 자라던 그 탐욕을 꺽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탐욕의 종이 되어 하나님과 그 분의 말씀을 버렸습니다.

 

10절 말씀을 보시면,

“그러므로 내가 여로보암의 집에 재앙을 내려 여로보암에게 속한 사내는 이스라엘 가운데 매인 자나 놓인 자나 다 끊어 버리되 거름 더미를 쓸어 버림 같이 여로보암의 집을 말갛게 쓸어 버릴지라”

 

우리가 탐했던 모든 것을 얻게 될 때는 그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달콤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단물 속에 섞인 독약과 같이 그것은 독배를 마시는 것이 될 것입니다.

여로보암의 집에 재앙이 내리게 됩니다. 여로보암에게 속한 모든 남자들이 다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반절에 보니깐 ‘거름 더미를 쓸어버림 같이 여로보암의 집을 말갛게 쓸어버릴지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완곡한 표현으로 거름 더미라 했지만, 원어 상으로는 ‘똥’을 말합니다. 과거 길거리에 그런 것들이 종종 있었는데 그 더러운 걸 깨끗하게 치우지 대충 좀 남아있도록 치우지는 않는 것입니다. 여로보암의 집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여로보암의 대를 끊을 것이고, 그의 왕가를 몰락시킬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11절을 보시면,

“여로보암에게 속한 자가 성읍에서 죽은즉 개가 먹고 들에서 죽은즉 공중의 새가 먹으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니라 하셨나니”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당시 고대 사회에서 죽은 사람의 시신이 온전히 묘실(묘지)에 모셔지지 않고 길에 버려지게 되고 굶주린 들개가 그 시체를 먹고, 공중의 까마귀나 매와 같은 것들이 그 시체에 앉아서 그것을 뜯어 먹는 것은 가장 비참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이 그런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될 것임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12절을 보시면,

“너는 일어나 네 집으로 가라 네 발이 성읍에 들어갈 때에 그 아이가 죽을지라”

 

여로보암 왕의 장자인 아비야 역시 그 질병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죽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13절을 보시면

“온 이스라엘이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장사하려니와 여로보암에게 속한 자는 오직 이 아이만 묘실에 들어가리니 이는 여로보암의 집 가운데에서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선한 뜻을 품었음이니라”

 

그런데 그 아들 아비야의 죽음에 관한 기록은 여로보암과 그에게 속한 이들의 죽음과는 다른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온 이스라엘이 아비야의 죽음을 슬퍼하며 장사할 정도로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슬퍼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 이 아들만 묘실에 장사가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로보암 집 가운데에서 이 아들만 여호와를 향하여 선한 뜻을 품었던 의로운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얼핏 보면 아비야의 죽음도 재앙인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여로보암 왕 입장에서는 자신이 가장 총애하던 왕자를 잃게 되고, 이스라엘 백성들 입장에서도 차기 훌륭한 왕이 될 재목을 잃었으니 그들에게는 재앙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비야 왕자에게 그것은 재앙이 아니었습니다.

 

이사야서 57:1절 말씀을 쉬운성경으로 보시면,

“하나님을 따르는 의로운 사람이 죽어도 아무도 마음에 두지 않는다. 경건한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도 아무도 의문을 갖지 않는다. 아무도 하나님께서 악으로부터 의인들을 보호하신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아비야가 아버지 가문의 재앙을 보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거둬 가시는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악으로부터, 모든 재앙으로부터 의인들을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도표는 창세기 5장에 기록된 아담의 후손들의 연대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담의 아들 가인이 동생인 아벨을 죽이는데, 가인 계열은 불순종의 세대를 의미하고, 아벨계열은 믿음의 세대를 의미합니다. 아벨이 죽고 그 이후에 믿음의 계열을 잇는 ‘셋’이란 아들을 주셨는데 그 후손 중에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에 올라간 ‘에녹’이란 아들이 있었고, 에녹의 아들은 역사상 가장 오래 산 사람으로 기록된 ‘므두셀라’란 사람입니다. 그리고 므두셀라의 아들은 ‘라멕’이었고, 이 라멕이 인류 대홍수 속에서 방주를 만들어 살아남아 새로운 인류의 조상이 된 ‘노아’을 낳은 것입니다. 그리고 노아가 600세 되던 해에 인류를 멸망시킨 대재앙인 홍수가 쏟아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5장을 읽다보면 특이한 점이 나옵니다. 경건한 믿음의 후손들이라 할 수 있는 셋 계열의 후손들이 노아 홍수전까지 ‘향수하고 죽었다’ 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러니깐 살만큼 살고, 평안히 죽음을 맞이했다는 얘깁니다. 그 누구도 그 후손 중에 홍수의 재앙에 죽은 이들이 없다는 기록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에녹은 더 오래 살 수도 있었지만 365세 때 죽지 않고 천국에 간 사람이 되었고, 그 아들 므두셀라는 969세를 살았는데 그가 죽고 난 이후 홍수가 땅에 쏟아졌고, 므두셀라의 아들은 라멕은 아버지보다 장수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죽기 4년 전에 라멕이 먼저 평안히 죽음을 맞습니다. 그러니깐 아무도 홍수라는 대재앙 속에 죽지 않았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노아 같은 경우는 방주를 만들어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재앙 중에도 보호해 주셨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가장 악한 왕 여로보암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그 아들 아비야는 여호와 신앙을 갖고 있었고, 성경은 그가 여호와를 향해 선한 뜻을 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가문의 재앙을 보기 전에 그를 데려가신 것입니다. 그가 일찍 죽었기 때문에 비참하다 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이 땅의 사는 삶은 짧지만 천국의 삶은 이생의 삶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긴 ‘영원’의 시간인 것입니다.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비야를 재앙 중에 보호하셨다라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5절에 보시면,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하나님의 사람들, 믿음의 사람들, 하나님을 향해 선한 뜻을 갖고 있는 이들을 하나님은 재앙 중에서도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어렵다 어렵다 해도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의 자녀들을 보호하시고 축복하실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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