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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을 망치지 말라”

<창세기 12:10~20>

– 40일 특새 : 갑절의 은혜를 구하라(7) –

 

 

지난주일(6월30일)에는 정전협상 66년 만에 미국 대통령이 판문점을 통해 북한 땅을 밟고 남북미 정상회담이 있었습니다. 역사에 길이 남을만한 명장면이기도 했고, 통일의 날이 점점 다가오는 거 같기도 합니다. 모쪼록 평화적인 방법으로 우리민족의 통일이 오길 계속 기도해야겠습니다.

남북정상회담이 있었던 작년에 북한의 지하자원에 관한 기사가 하나 있었는데, 미국 온라인 경제전문매체인 [쿼츠]에서는 “북한은 손도 대지 않은 광물이 약 7조 달라(약 7500조원)에 달한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삼성전자의 시가총액이 약 350조원인데, 사실상 우리나라를 먹여 살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삼성과 같은 회사 20개가 땅속에 고이 묻혀 있는 겁니다.

 

 

중국과 러시아, 일본과 미국 등 주변의 강대국들이 북한에 대해 눈독을 들이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에 비해 우리 남한은 지하광물의 자급률이 극히 낮아서 88.4%를 다른 나라에서 수입해다 쓰고 있는 겁니다. 우리 남한은 북한에 비해 지하자원이 별로 없는 겁니다. 그러니깐 북한은 엄청난 축복을 깔고 앉아 있는 것과 같습니다. 가난해 질 수 없는 조건을 갖고 있었던 나라가 북한인데, 지금 북한은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라는 것이 아이러니입니다.

 

 

작년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남북한의 경제력을 비교한 그래프가 하나 있는데, 명목상의 GNI가 남한은 1,646조원이고 북한은 36조원 그리고 1인당 GNI의 경우 남한은 3,212만원이고 북한은 146만원입니다. 여기서 GNI라는 것은 ‘국민총소득’을 말합니다. 우리가 경제용어를 잘 몰라도 수치 자체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남북한의 경제력은 크게 차이가 나 있습니다. 이것이 2016년 통계인데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경제재재를 받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더 많이 벌어져 있습니다. 남북한은 40~50배 정도의 경제력 차이가 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비교를 하나 말씀드리자면, 북한은 세계기독교 역사에 길이 남아 있는 1907년 ‘평양대부흥 운동’이 일어났던 평양을 수도로 삼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영적 대부흥 운동이 일어났을 정도로 평양과 북한은 한반도의 영적, 정치적 중심지였습니다.

그런데 1948년 김일성을 중심으로 공산정권이 수립되고, 남북한이 분단되면서 남한과 북한은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북한은 교회와 기독교를 지금까지 박해하면서 철저하게 ‘김일성-김정은 부자(父子) 우상화’를 이어왔습니다.

하지만 남한은 전쟁의 폐허위에서 교회들을 중심으로 위로와 소망 중에 일어나 오늘날 세계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습니다.

2015년 워싱턴포스트가 ‘미국식 메가처치는 어떻게 세계로 전해지고 있는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올렸는데, 미국을 제외한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대형교회를 가진 곳이 ‘한국’이었는데, 약 38개에 달한다고 합니다. 인구 600만 명도 채 안 되는 싱가폴도 14개나 있는 것은 특이할 만한 통계이기도 합니다. 오래된 통계이긴 하나 우리나라 경제가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던 1993년의 통계에 의하면 세계 50대 교회 중에 23개 교회가 한국에 있었습니다.

북한에 비해 지하자원 자체가 아무것도 없다고 할 수 있는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뜨겁게 하나님을 섬기는 국민이 되었던 겁니다.

북한은 70년 동안 무궁무진한 지하자원을 주변나라에 팔아먹고 있으면서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되었고, 아직도 수치를 헤아릴 수 없는 엄청난 자원의 보고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 자원을 갖고 싶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어쩌면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북한이란 나라에 그 엄청난 선물과 축복을 주신 겁니다. 그런데 그 축복을 감사치도 않고 오히려 지난 70년간 교회를 박해하고, 믿는 자들을 핍박해왔습니다. 축복을 받았지만 그 축복을 망치고 있는 정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셨지만 그 축복을 망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북한이 가난하기가 힘든 조건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나라가 망가져 있는 것처럼, 어떤 사람은 잘 안되기가 힘든 조건을 갖고 있는데 지독히도 안 풀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공 안하기 어려운 조건 그러니깐 하나님께서 이미 그 사람에게 여러 가지 좋은 축복과 조건들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전을 면치 못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망치지 않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플랜에 따라 그 축복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교훈하시고 있습니다.

 

1. 부르심이 있는 곳에 머물라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립니다. 때문에 아브라함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어떻게 믿음이란 것이 시작되고, 그 믿음이 유지되고, 성장하는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초신자였던 아브라함의 실수와 믿음의 모습, 부정적 측면과 긍정적 측면을 통해 우리의 신앙생활의 모범으로 교훈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10절 말씀을 보시면,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을 거쳐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당시 가나안 땅은 중동의 비옥한 초승달지역에 속한 기름진 땅이었고, 키가 크고 강대했던 거인 족들이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살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아브라함은 그곳 어디에서도 정착할만한 땅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점점 쫓겨 내려가 광야와 같은 불모지가 대부분인 남방(Negev : 네게브) 사막지대로 가서 거주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그 땅에 심한 기근까지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가장으로서 가족들과 종들과 가축들을 이끌고 나일강으로 인해 늘 풍요로웠던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이런 결정과 선택은 어쩌면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맡고 있었던 아브라함에게는 당연한 결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26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때에도 크게 흉년이 들어 이삭이 가족들을 이끌고 애굽으로 내려가려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26장 2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애굽으로 내려가려고 하던 그의 계획을 막으시는 겁니다.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창세기 26장 3절을 보시면,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그리고 이삭이 그 가나안 땅을 떠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삭의 경우도 그 땅에 큰 흉년이 들었던 겁니다. 그래서 가족부양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었던 가장으로서 애굽 행은 당연한 결정이었던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흉년의 땅에 그대로 머물라는 겁니다. 그 땅에 있어야 복을 주시겠다는 겁니다. 그 부르심의 자리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그리고 이삭을 가나안 땅으로 부르셨습니다. 장차 그 땅을 그들에게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언약과 축복이 있었던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장의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그 땅을 떠나려고 하는 아브라함과 이삭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어쩌면 무모한 명령을 내리시고 계신 겁니다.

저는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얼마 전에 잠시 말씀드렸던 적이 있지만, 저는 부교역자로 약 20년을 사역했습니다. 여러분은 좀 실망스러우실 수도 있겠지만, 저와 같은 풀타임 사역자들이 하나님만 바라보며 사역해야겠지만, 저에게도 가족부양이라는 책임이 있고, 그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다보니 부교역자로 사역하다가 1천 명 정도 모이는 교회의 담임목사로 가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안 해 봤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입니다. 왜 그렇겠어요? 적어도 그런 경제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걱정을 덜고 목회사역에만 몰두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도 한 겁니다.

그런데 목회자가 이런 마음을 갖고 있으면 목회를 안 하고 돈 버는 직업을 선택하는 게 나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부르심과 소명과 사명에 대해서는 생각을 안 하면서 오직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서만 염려하고 걱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목회자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생활을 시작했다는 것은 이제 먹고 사는 문제에 따라서 우리의 진로가 정해지고, 우리의 인생을 결정하는 것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부르심과 소명과 사명과 그 분의 뜻이 머무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머물러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잘 먹고 잘 사는 길은 그냥 본토 친척 아비집에 머무는 겁니다. 평생 거기서 살아왔고, 거기에 모든 인맥과 그를 위한 유리한 비즈니스 환경이 있었을 겁니다. 늙어가는 나이에 새로운 환경에서 개척해 가는 일은 무모한 도전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신 겁니다. 이제부터 자신의 배경과 환경과 조건과 인맥과 재정과 같은 것들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겁니다. 이게 믿음생활의 시작인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믿음생활은 내 뜻과 내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믿고, 따르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믿음생활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했었던 것을 기억하시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그들의 먹고 사는 문제는 애굽 땅에 달려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40년 동안 물도, 먹을 것도 없고 농사도 지을 수 없었던 광야에서 생활하게 하셨지만, 그들은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만나를 먹고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또 길도 없고 표지판도 없었던 광야에서 그들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이라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갔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머무는 곳에 나도 그곳에 머물렀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먹고 살 문제가 걸려있는 것에 따라 사는 게 아니라, 나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는 곳에 사는 것이 결국 우리를 약속과 축복의 가나안으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곳에 머물러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머무는 곳이 곧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인 것입니다. 물질 따라 가거나, 먹고 살 문제 따라 가거나, 친구 따라 가거나, 환경 따라 가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어디에 있기를 원하시는 지를 깨달아 그 분의 뜻이 머무는 곳에 나도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축복의 길인 것입니다.

반대로 축복을 망치는 길은 자기 마음대로 그 길을 결정해 버리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애굽에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내려갔지만 그곳에서 오히려 큰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머무는 곳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지만, 하나님의 뜻과 다른 곳을 향해 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과 멀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을 망치는 것입니다.

 

2. 자기 합리화의 수를 버려라

우리가 믿음생활을 시작하는 것은 내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때문에 처음 믿음생활을 시작하면서 내 안에 충돌이 생기는 겁니다. 그 동안은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왔었는데 이제는 내 뜻은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하니깐 이 두 마음에 내 안에서 끊임없이 싸우고 있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애굽 땅에 가까워지자 두려운 마음이 하나 들어왔습니다. 고대 사회는 힘이 통하는 사회였기 때문에 재산도 사람도 힘 있는 자가 누군가에게로부터 뺏기도 했었던 겁니다. 아브라함은 아내와 조카 롯과 그리고 종들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깐 부족이라 할 것도 없고 그의 세력이 그리 크지는 않았던 겁니다.

때문에 애굽에 있는 사람들이 미인이었던 아브라함의 처 사라를 보고 그를 죽이고 사라를 빼앗을까봐 겁이 났었던 겁니다. 지금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었던 일들이 고대 사회에는 종종 일어났던 일입니다. 부족과 부족이 전쟁했을 때 전리품으로 부족장의 처와 여자들을 빼앗을 수 있었던 겁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생명의 위협을 느꼈고, 자신의 가족 전체가 몰살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13절 말씀을 보시면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아브라함은 하나의 꾀를 낸 겁니다. 요즘 사회에서는 있을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고대 사회에서는 있을 수도 있었던 일이었던 거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를 자기 누이라 속이려 했습니다. 그러면 사라에게 관심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기보다는 부족과 부족 간에 어떤 연혼관계를 맺으려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거 같습니다. 그러면 자기도 살고 사라도 살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가족뿐만 아니라 재산도 지킬 수 있는 길이라 생각했던 거 같습니다.

가장이었던 아브라함 나름대로 어떤 수를 써야 했고, 아브라함은 그것만이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했던 거 같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 겁니다. 애굽의 그냥 어떤 부족장 정도가 아니라 애굽의 최고 권력자인 파라오 왕이 사라를 마음에 들어 했고, 결국 결혼지참금 까지 아브라함에게 두둑하게 안겨주면서 사라를 왕궁으로 데려간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 자기 합리화를 하며 말씀을 빗겨나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결국 그것을 통해 큰 재난을 맞게 된 것입니다.

 

17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다행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가정에 개입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가 범죄 할 것을 막으셨고, 아브라함의 가정을 지켜주셨습니다. 만약 사라가 바로 왕의 처가 되어버렸다면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 약속의 자손을 주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계획을 망치는 겁니다. 아브라함에게 복을 내려주시겠다고 하셨던 하나님의 플랜에 문제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이렇게 저렇게 내 편리한대로 이용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그대로 그냥 순종해야 할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이 하라하면 하고, 멈추라 하면 멈춰야 하는 것입니다. 내 편한 방식대로 내가 원하는 뜻을 이루기 위해 합리화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우리가 그릇된 길로 가는 길인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계획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그것은 곧 우리에게 재앙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을 망치는 길인 것입니다.

말씀은 ‘예하고 아니라함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말씀을 이러 저리 갖다 붙이면서 자기합리화의 죄에 빠지지 마시길 바랍니다. 사울 왕도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명령을 자기 합리화해서 좋은 가축들을 전리품으로 끌고 오는 불순종을 했다가 하나님께서 그를 멸하셨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 가장 아름다운 계획을 갖고 있는데, 우리의 불순종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을 망칠 수 있는 것입니다.

 

 

17세기 영국의 위대한 설교자요, 청교도였던 ‘토마스 왓슨(Thomas Watson, 1620~1686)’은 순종에 관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라기 보다는 우리의 특권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것만을 명령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를 향한 축복의 특권을 놓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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