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이드1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창세기 16:7~16>

– 40일 특새 : 갑절의 은혜를 구하라(24) –

 

 

 

아기들은 태어난 지 1년, 2년은 되어야 비로소 언어다운 언어를 구사합니다. 그래서 언어를 구사하지 못할 때는 우는 것을 통해 배가 고프다든지, 아프다든지, 졸립다든지, 응아를 했다든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기 울음소리가 다 똑같은 거 같지만 그 울음소리에는 아기 나름대로의 언어가 담겨있다는 겁니다.

또 몇 년 전에 독일의 뷔르츠부르크 대학의 카틀렌 베름케 박사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발표했는데, ‘아기는 모국어로 운다’라는 겁니다. 박사는 독일과 프랑스에서 3~5일 된 신생아들을 대상으로 울음소리를 비교 분석했는데, 언어가 다른 나라의 아기들은 울음소리도 각각 다르다는 것을 발견한 겁니다. 프랑스 아기들은 낮은 소리에서 높은 소리로 울고, 독일 아기들은 높은 소리로 울다가 낮아지는 울음소리 패턴을 보였다고 합니다. 이런 패턴이 프랑스어와 독일어가 갖고 있는 억양과 일치하는 부분이라는 겁니다.

예전에 어떤 가정에 심방을 갔었을 때, 여러 성도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엄마들은 깔깔거리며 즐겁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아이들은 다른 공간에서 자기들끼리 시끌벅적하게 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엄마 중에 한 성도님이 갑자기 ‘목사님 잠시 만요’하면서 벌떡 일어나서 아이들이 있는 방으로 성급히 달려갔습니다. 저와 함께 있던 성도들은 이유를 몰랐습니다. 잠시 후 엄마의 품에는 어린 딸이 울면서 안겨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못 들었는데, 그 아이의 엄마는 자기 딸의 울음소리를 알아듣고 달려갔었던 것입니다.

아기의 울음소리에 언어가 없는 거 같아도 그 울음소리에 담겨있는 아이의 언어가 있고, 다른 사람들은 전혀 듣지 못해도 엄마만큼은 자기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사정과 아픔과 고통을 모른다 하여도,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사정을 알고 계시고, 고통 속에서 부르짖은 우리의 기도와 신음 소리를 듣고 계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시도했던 여종인 하갈의 임신으로 인해서 가정의 분란이 일어났습니다. 임신한 여종 하갈은 여주인인 사라를 멸시했고, 사라는 아브라함을 원망했고, 아브라함은 사라에게 전권을 주고 알아서 하도록 했습니다. 그랬더니 사라는 다시 여종인 하갈을 학대했고, 하갈은 그 학대를 견디다 못해 사라를 피해 도망 나왔습니다.

도망 나와 광야의 한 오아시스 샘 곁에서 울고 있는 하갈에게 여호와의 사자(천사)가 찾아왔습니다.

 

9절을 보시면,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하나님께서는 하갈이 다시 여주인인 사라에게로 돌아가 그 수하에 복종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0절에 보면 하갈에게 언약의 말씀도 주시는데, 하갈의 자식을 크게 번성하게 해서 그 수가 셀 수 없이 많게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1절을 보시면,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하갈이 낳은 아들의 이름까지 미리 지어주시게 되는데, 태어나기도 전에 미리 이름을 지어주는 첫 번째 사례이기도 합니다.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마엘이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들으심’이란 의미를 갖고 있는 이름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인의 학대를 피해 도망 나온 하갈의 고통 소리를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미리 붙여주신 것입니다. 아마도 하갈은 비천한 종이었지만 살아가면서 이 때의 이 사건을 잊지 못했을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억울함과 고통을 보시고 듣고 계심을 떠올리며 위로와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13절을 보시면,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하갈은 그곳에서 만난 하나님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고 불렀고, 그곳에 있었던 샘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살아계신이의 우물’이란 의미의 ‘브엘라헤로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갈에게 다시 사라에게 돌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 전에 여주인의 그 학대를 견디다 못해 도망 나왔는데 그리로 다시 돌아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창세기 21장을 보면 사라가 이삭을 낳게 된 이후에 하갈과 사라 사이에, 그리고 이삭과 이스마엘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게 되고, 그로 인해 가정에 또 다시 분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내도록 말씀하십니다. 어차피 하갈과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을 떠나야 할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차피 떠나야 할 운명이었는데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다시 사라에게, 아브라함에게 돌아가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15절 말씀을 보시면,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어떻게 아브라함이 그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지을 수 있었을까요? 하갈이 광야에서 다시 아브라함 집으로 돌아갔을 때, 광야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그 주인들인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이야기 했을 것입니다. 비천한 여종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비천한 여종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고통 소리를 듣고 계시고, 보살피고 계신다 라는 것을 하갈을 통해 듣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마엘이 성장해 가면서 그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하나님께서 들으신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듣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내 고통 소리를 듣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나의 아픔과 고통을 보시고 듣고 계신다…’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마음을 울렸을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동일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는 것 같고, 하나님께서 나를 외면하고 계신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나의 고통과 눈물을 모르시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주만 바라볼찌라』는 찬양의 후렴에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서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찌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의 작은 신음소리도 듣고 계시고, 그 고통과 눈물을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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