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9:1~20>
– Acts(53) –
며칠 전(9월10일)에 세계최대 인터넷 상거래 업체인 ‘알리바바(Alibaba Group)’의 창업자이며, 중국 최고의 갑부인 ‘마윈(Jack Ma, 1964~)’회장이 아직 이른 55세의 나이에 은퇴했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그는 교육과 봉사활동을 위해서 일찍 은퇴했다고 합니다.
그는 키 162cm, 몸무게 45kg, 별명은 ET라 불리는 것처럼 외적인 모습은 부족해 보일 수 있지만, 세계에서 가장 빨리, 가장 크게 성공한 대표적인 인물이기도 하고, 전 세계 사람들에게 큰 감동과 영감을 주는 자수성가형 부자이기도 합니다.
그가 창업한 알리바바는 20년 만에 시가 총액 548조원(참고로 우리나라 2019년 국가 총예산이 470조원입니다)이고, 직원 수는 10만 명, 개인재산은 약 47조원(삼성 이건희 회장의 재산은 약 20조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가 이렇게 세계적인 비즈니스맨으로 성공하게 된 것에 그는 영어가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하는데, 우리교회에는 영어를 배우기 위해서 필리핀에 온 학생들이 많기 때문에 지금 보여드리는 짧은 영상이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마윈이 모스크바 대학에서 영어공부에 관해 했던 강연을 잠시 보시고 말씀 이어가겠습니다.
그는 언어는 매우 중요하다고 말하고, 영어가 자신의 비즈니스에 있어서 엄청나게 많은 도움을 줬다고도 말합니다. 그런데 외국어가 단지 언어가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외국어를 배울 때 외국 문화를 이해하고 존경(respect)하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당신이 외국 문화를 인정하고 존경한다면, 당신이 그들에 의해 인정받고 존경받게 될 것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과 함께 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언어적인 어떤 테크닉을 배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언어를 통해 그들의 문화를 배워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외국 문화를 존경하고 인정한다면, 쉽게 그들과 동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덧붙여 “하지만 당신이 외국 문화를 싫어한다면, 절대로 그들과 동료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동료가 없다면 어떻게 사업을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우리나라의 연세대에서 작년에 강연하는 중에 마윈은 “저는 성경을 많이 읽어서 서구문화를 다른 중국인보다 잘 이해합니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마윈은 영어권의 문화를 존경했던 것이 자신의 성공에 가장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4:11절 말씀에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셨습니다. 키도 작고, 바싹 마르고,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대학까지 단 한 번도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재수, 삼수를 하면서 성장기와 청년기 수많은 실패를 경험했던 마윈이란 사람이 대단한 실력이 있어서 성공한 게 아닙니다. 그가 크리스천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가 읽고 배운 성경을 통해 배운 서구 문화의 원리는 그를 높이 세웠던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갖고 있느냐? 얼마나 큰 재능과 능력을 갖고 있느냐? 얼마나 경험이 많으냐?… 이런 것들은 성공의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요즘 국회의원이나 장관의 자녀들 문제가 사회적으로 도덕적 문제가 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실력과 능력보다 마음이 먼저입니다. 어떤 마음과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이 그의 미래를 바꾸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함께 살펴볼 본문에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갖고 있는 몇 가지 마음의 태도가 나타나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마음이 있습니다.
1. 사모하는 마음
바울은 시리아의 안디옥에서부터 출발하여 자신이 1차, 2차에 걸쳐 그 동안 전도하여 세운 교회들을 다시 방문하며 3차 전도여행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터키의 에베소 지역으로 가서 믿음을 갖고 있다고 하는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바울은 그들과 복음과 믿음에 관한 이야기들을 나눠 보니 그들은 성령이 누구신지도 모르고, 메시아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잘 모르고 있는 상태로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4절을 보시면,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바울은 세례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면서 백성들에게 소개했던 메시야가 곧 ‘나사렛 예수시다’라는 것을 그들에게 풀어 알려주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이 놀랍습니다. 5절과 6절입니다.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나사렛 예수를 믿고, 바울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안수를 했더니 방언과 예언과 같은 성령의 은사가 그들 가운데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들의 반응이 놀랍다고 말씀드린 것은, 대체로 사람들은 다른 얘기를 하는 사람에 대해서 경계하고, 거부하고, 적대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당을 만들고, 분파를 만들고 상대를 공격하기도 합니다. 요즘 여당이든, 야당이든 정치인들을 보면 ‘저 사람들은 옳고 그름과 진실과 거짓이 중요한 게 아니라 덮어놓고 상대계파를 무조건 공격하는 사람들 같다…’라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정말 나라를 걱정한다면 자신들이 주장하던 것이 ‘아닌 것 같다’고 느낄 때, 그걸 인정하고 상대의 의견을 인정해주는 것이 있어야 할 거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결코 그런 예를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에베소에 있었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았고, 세례 요한을 통해서 메시야에 대한 간접적인 복음을 접했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구체적인 복음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복음과 은혜를 사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날 바울이 와서 진짜 복음을 전하니 은혜를 사모하던 이들이 그 복음을 받고,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고, 안수도 받고, 성령도 받고, 방언과 예언과 같은 은사도 경험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11:13절 말씀을 보시면,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구하고 사모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데, 누가복음 11장에서는 그 좋은 것이 ‘성령’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에베소 지역에 있었던 이들은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시편 107편 9절을 보시면,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목마른 사람은 물을 간절히 찾고 구합니다. 그리고 찾아낸 그 물을 마실 때 그 물 맛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목말라하고, 사모하고, 구하고, 찾으면 그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교회 오실 때 주일이니깐 형식과 의무감에 젖어 오는 것하고, 오늘 하나님께서 내게 어떤 말씀을 주실까? 어떤 은혜를 주실까?를 기대하고 간절히 사모하며 오는 사람하고 어떤 차이가 있겠습니까?
예레미야 29:11절에서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릴 안 만나 주시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외면하시고 있는 게 아닙니다. 문제는 외부에 있지 않고, 어쩌면 나의 마음의 태도, 영적인 자세에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물이 70도, 80도에서는 끓지 않지만 90, 95, 98, 99도를 지나 100도까지 오르면 물을 끓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온도가 높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 때부터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디 한 번 놀러갈 때, 그 지역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찾고 인터넷으로 서치하십니까? 여러분이 인터넷 쇼핑을 통해 어떤 물건 하나 사려고 할 때, 여기저기 쇼핑몰들 간에 가격비교도 해 보고, 성능 비교도 해 보면서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최상의 것을 찾지 않습니까? 그깟 물건 하나 살 때도 그러는데 우리의 인생이 바뀔 수도 있고, 우리의 미래가 바뀔 수도 있는 우리 영혼에 관한 이 중요한 일에 우리의 믿음의 온도와 영적일 열정은 너무 식어져 있는 것은 아닙니까? 믿음의 온도를 높이십시오. 주님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함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2. 부드러운 마음
바울 사도는 에베소 지역의 회당에 들어가 3개월 동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9절을 보시면,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1절부터 7절까지 나타나 있었던 사람들과는 다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9절 상반절에 보시면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믿지 않고, 복음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바울과 그의 복음을 비방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마음이 굳다’라는 표현을 NIV 영어성경에서는 ‘obstinate’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데,
이 말은 ‘완고한, 완강한, 고치기 힘든, 몹시 고집불통인’이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런 마음은 정말 변화되기가 어려운 마음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가 항상 옳습니다. 자기 생각이 늘 옳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 고집을 결코 꺽지 않습니다. 대체로 이런 사람은 교만합니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교만하고 거만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보면 그는 참 복도 많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 주변에 좋은 사람을 많이 붙여주셨어요. 어쩌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많이 사랑하시나 봐요. 하지만 그는 고마운 걸 모릅니다.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자기 뜻대로만 삽니다. 심지어 그는 하나님의 말씀도 듣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만 사는 모습을 보면 목사인 저로서는 그 분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그런데 10절을 보시면,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에베소 회당에서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바울의 복음을 받지 않고 바울을 비방하니 그는 더 이상 회당에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의 두란노라는 철학자가 사용하는 강연장으로 갑니다.
이것은 회당 즉 교회에서 나가서 요 앞에 있는 학원 한 곳을 빌려서 거기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회당에 있었던 마음이 굳어진 사람들과는 달리 많은 사람들은 부드러운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많이 주님께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3장 13절을 보시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하셨습니다. 그러니깐 우리의 마음이 굳어지고 딱딱해지는 것은 죄와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가족을 향하여, 다른 사람을 향하여, 교회를 향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자꾸 굳어지고 있다면 그것은 내 안에 있는 죄와 관계가 있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할 수도 있고, 누군가를 미워할 수도 있고, 겸손하지 못하고 교만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거나, 그를 저주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또는 하나님께서는 내게 손을 내미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기회를 주시려 하는데… 그 하나님의 손을 뿌리치고, 그 은혜와 기회를 거부하면서 내 뜻과 내 생각을 꺽지 않고 살아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영국의 과학잡지 뉴 사이언티스트(New Scientist)는 밝은 햇살을 받으며 사는 사람들일 잿빛 하늘 아래 사는 사람들보다 훨씬 건강하다는 연구 보고서를 게재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보고서는 프랑스에서 조사된 건강 실태의 경우를 근거로 들고 있는데,
프랑스의 북부도시 칼레(Calais)의 겨울은 길고 매우 춥고, 일 년 내내 바람이 심하게 불고, 부분적으로 흐린 날이 많다고 합니다. 그러니깐 그런 날씨 때문에 도시 분위기가 우울하기까지 하다고 합니다. 반면에 프랑스의 남부지역인 피레네(Pyrenees) 같은 곳은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순례지가 있어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장소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놀랍고 충격적인 보고는 우중충한 북부 칼레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아름다운 남부 피레네에 사는 주민들보다 ‘소화기계통의 암이나 간경변에 걸릴 확률이 무료 3배’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또한 자살 건수 역시 햇살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굳어지고 딱딱한 마음을 갖고 사는 것은 곧 우리의 마음을 돌덩어리로 채워가는 끔찍한 일인 것입니다. 결국 마음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체에도 딱딱한 암 덩어리를 만들 수도 있고, 우리의 간을 딱딱하게 굳게 만드는 간경변에 걸릴 수도 있다는 얘깁니다.
때문에 우리는 늘 마음을 부드럽게 해야 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짜증을 내고, 신경질을 내고, 화를 내고,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마음의 문을 닫고, 교만하고, 거만하고, 내 고집을 꺽지 않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결국 내 영혼과 마음과 육체를 나 스스로 해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의 어떤 사람들과 같이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는 것을 결국 그들이 멸망의 길로 가는 태도일 뿐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마음을 여십시오. 더 친절하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살아가십시오.
3. 위선적인 마음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사모하는 마음과 부드러운 마음은 살아가면서 꼭 가져야 할 마음일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굳어진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버려야 할 마음과 영적인 태도인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우리를 망하게 할 또 다른 자세가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위선적인 마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셔서 병든 사람들을 고치고, 악귀도 떠나가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돌아다니면서 마술을 행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 삼아서 악귀 들린 자들을 향하여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라고 흉내를 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15절, 16절을 보시면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입니까? 귀신 앞에 그들은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겉모양은 바울의 모습, 예수의 이름으로 나가지만 그들은 가짜였던 겁니다.
‘위선(僞善)’이란 말은 한자로는 ‘거짓 위(僞)’자에 ‘착할 선(善)’자를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뜻이 ‘거짓된 선(善)’을 말합니다. 그러니깐 겉모양으로만 착한 착하고, 속에는 더러운 악이 숨어 있는 것을 위선이라고 말합니다.
디모데후서 3:5절 말씀에 보시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아직 하나님이 안 믿어지는 사람, 못 믿는 사람이 차라리 더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적인 위선의 병은 고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몸속에 큰 병이 있는데 겉으로 보여 지는 게 없는 겁니다. 그러면 치료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겉으로는 믿음이 있는 척 하지만 그 속에는 죄가 주인노릇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찬양을 하고, 기도를 하고, 천사처럼 웃지만 속에는 음란과 탐심과 거짓과 교만과 더러움이 가득합니다. 그 위선이라는 죄가 그 속에서 그 사람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여 우리가 이런 마음에 물들면 안 됩니다. 우리가 사람을 속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왜 위선에 유독 더 분노할까요?
예일대학교의 데이비드 랜드 교수가 뉴욕타임스의 칼럼에 기재한 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그가 옳은 일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본인을 포장했기 때문에 혐오한다!”
자신도 연약한 죄인이면서도 그 일을 혐오한다면, 어찌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에게 복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