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이드1

“누가 주인인가?”

<열왕기상 17:8~16> 

– 열왕기상(31) –

 

 

 

집에서 애완동물 키워본 적이 있죠? 요즘 고양이 키우는 사람을 ‘고양이 집사’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고양이 키워본 분은 아시겠지만, 강아지는 얼마나 재롱을 많이 피우고 친근하게 하는지 몰라요. 하지만 고양이는 웬만하면 그러는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때 되면 밥도 챙겨줘야 하고, 배설물도 치워줘야 하고, 잠자리도 봐줘야 하고… 그래서 내가 고양이를 키우는 건지, 고양이가 나를 키우는 건지, 내가 고양이 주인인지, 고양이가 내 주인인지? 가 헛갈리는 겁니다.

야생에서 사는 동물들은 서열을 빨리 정리하는데, 믿기 힘드시겠지만 집에서 키우는 애완동물들도 집에서 넘버원부터 막내까지 서열을 정리하고 자기가 잘 보여야 할 사람과 막 대해도 되는 사람까지 정리하는 겁니다.

그런데 돈이라는 것도 서열을 압니다. 누가 돈의 주인인지? 누가 돈의 종인지? 그걸 안다는 겁니다.

1980년대 홍콩 느와르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배우 주윤발(Zhou Runfa, 1955)씨가 작년에 “전 재산 56억 홍콩달러(약 8,100억원)을 전부 기부하겠다”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정작 본인은 한달 800홍콩달러(약 12만원)를 용돈으로 사용하고 있고,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근검절약을 실천하며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주 저렴한 옷과 신발을 신고 다니면서 ‘옷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려고 입는 게 아니다. 내가 편하면 그만이다.’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돈을 기부한 것에 대한 인터뷰에서

 

“그 돈은 내 것이 아니다. 그저 잠시 내가 보관하고 있는 것일 뿐”

 

이라 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죽으면 그 돈은 어차피 자기 것이 아니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알리바바의 창업자이며 중국 최대의 부자인 마윈(Ma Yun, 1964~)이 2015년 우리나라 KBS 방송의 대담프로에서 했던 말 중에 돈에 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절대로 돈을 쫓지 마십시오. 돈은 사람을 따르게 되어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돈을 쫓고, 마윈과 같은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데, 정작 마윈은 자신과 같은 부자가 되려면 돈을 쫓지 말라는 겁니다. 여러분이 돈을 따르지 말고, 돈이 여러분을 따르도록 해야 하는 겁니다. 서열이 바뀌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돈을 따르면 돈의 종이 되는 것이지, 돈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윤발이나, 마윈이나 정작 돈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비슷한 말을 많이 합니다. 가장 오랫동안 세계 최고의 부자에 이름을 오르내리고 있는 마이크로소프트의 빌게이츠(Bill Gates, 1955~) 회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돈을 벌기 위해 일하지 않는다. 돈은 오히려 나를 피곤하게 만들 뿐이다.”

 

알리바바의 마윈과 같은 비슷한 말을 하고 있죠?

그리고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나는 이 재산을 잠시 맡이 둔 것뿐입니다. 최대한 빨리 가장 적당한 용도를 찾아 사용해야 합니다.”

 

이 말은 주윤발과 같은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이런 분들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돈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돈의 종이 아닙니다. 돈이 그 사람을 너무 잘 압니다. 저 사람을 자기 종으로 삼아야 할지, 아니면 자기가 저 사람의 종으로 살아야 할지를 그 서열을 빨리 그렇게 정리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서열이 정리되면 돈은 그렇게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바알(Baal)’신에 대한 내용을 살펴봤는데, 가나안 지방에 널리 퍼져 숭배되어지던 우상이었습니다.

그 뜻은 ‘주인(主), 소유자(Owner)’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바알이 ‘자연(비, 바람)을 주관하는 풍요의 신’이라고 믿었습니다. 이게 결국 뭐냐면 먹고 사는 문제를 주관하는 신, 주인이란 뜻인 겁니다. 여기 필리핀 사람들 문화 속에 있는 것 중에 하나는 자기한테 돈을 주는 사람 말만 듣는다는 겁니다. 그 사람이 나의 먹고 사는 문제를 주관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다는 겁니다.

먹을 게 부족했고, 굶어죽는 경우도 종종 있었던 고대 사회 속에서 꼭 필요했던 신이 바알이었던 겁니다. 농경 사회 속에서 비라도 내리지 않으면 그 해의 농사를 망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굶어 죽을 수도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알이 비와 바람을 주관한다고 믿으며 바알 숭배에 매우 집착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기에 북이스라엘의 왕은 아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합이 페니키아의 시돈 왕 엣바알(‘바알이 그와 함께 있다’는 뜻)의 딸 ‘이세벨’과 결혼하게 된 겁니다. 시돈 왕의 이름이 ‘엣바알’이라 할 정도로 그 나라 사람들은 왕으로부터 백성들에게까지 바알 우상에 집착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나라의 공주가 북이스라엘 왕의 왕비가 된 겁니다.

그 이후부터 북이스라엘에는 바알 우상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세벨은 바알 우상들을 시돈으로부터 들여왔고, 수도인 사마리아 성의 여기저기에 바알의 신당과 우상들을 세웠고,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바알 우상을 숭배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야 복을 받는다고, 그래야 비가 와서 풍년을 맞는다고, 그래야 잘 살게 된다고… 그 때부터 온 나라는 바알 우상이 장악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열왕기상 17장 1절에서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하나님께서는 엘리야 선지자를 북이스라엘에 보내셔서 그 땅에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않게 될 것이라는 저주의 예언을 선포하게 하십니다. 아합과 이세벨 그리고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 신이 비와 이슬을 내리는 신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그 바알 신을 심판하며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심판하시는 장면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가나안 땅에는 비가 그치고 시내는 말라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점점 굶주리기 시작했고, 큰 기근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재앙 한 가운데 있게 되었습니다.

바알이 비와 바람을 주관하는 주인인줄 알았는데, 진짜 주인은 여호와이시라는 것입니다. 바알이 백성들을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먹이시고 입히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인생의 밑바닥을 한 번 경험해 보신 분은 이 사실을 철저하게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나름 잘 나가는 사람이었는데, 그래서 연봉도 높고, 돈도 잘 벌고, 돈에 대해 그리 걱정하지 않고 살면서 돈이면 뭐든 다 되는 줄 알았고, 하고 싶은 건 다 하며 살았는데, 그런 삶이 영원할 줄 알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믿고 의지하던 그 돈이 눈앞에서 사라질 때 그 풍요의 신인 바알이 아무것도 아니구나… 라는 것을 깨닫는 겁니다. 그리고 나와 나의 가정을 먹이시고 입히시는 것은 하나님이시구나 라는 것을 경험하시면서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8절과 9절 말씀을 보시면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오늘 본문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특별한 무대장치가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했는데 그를 어디로 보내요?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보내시고, 그곳에 머물게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그곳의 가난한 과부에게 대접 받으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돈이 어디예요? 바알 우상을 들여온 왕비 이세벨의 고향인 것입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 시돈의 왕 엣바알(‘바알이 그와 함께 있다’)입니다.

풍요의 신 바알이 함께 있는 엣바알 왕이 다스리는 시돈에 굶어 죽기 직전인 가난한 과부와 그 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 그 사람도 그 마지막 남은 밀가루로 아들하고 빵 하나 구어 먹고 죽을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 가 있는 겁니다.

 

10절 말씀을 보시면

“그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 곳에서 나뭇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가 마시게 하라”

 

엘리야가 사르밧의 과부에게 갔습니다. 때마침 과부는 아들과 마지막으로 먹고 죽을 빵을 만들기 위해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그녀를 부르더니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가 마시게 하라’라고 하는 겁니다. 비가 그치고, 모든 시내가 다 말라버리는 그 시점에 무슨 물이 있었겠습니까? 물이 있었어도 그 물이 얼마나 귀한 물이었겠습니까? 그런데 엘리야가 자기에게 그 물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 마지막 남은 밀가루로 자기에게 먼저 빵을 대접해 달라고 하는 겁니다. 그녀는 그 마지막 남은 빵을 먹고 아들과 함께 죽을 작정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랬더니 엘리야는 알았으니 먼저 나를 위해 만들어 오고, 다음에 당신도 그렇게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4절을 보시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여기서 엘리야는 가난한 과부 여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이 말씀의 숨은 메시지는 뭐겠습니까? ‘너희는 바알이 비를 내린다고 믿는데, 너희는 바알이 너희를 먹여 살리는 신이라고 믿는데, 아니다. 비는 여호와가 내리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앞으로 수년간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인데, 그 때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예언자의 말을 믿지 못한다면 ‘저 미친 사람을 봤나? 벼룩의 간을 빼 먹지, 어디서 개수작이야?’ 이렇게 험한 말을 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15절 보시면,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정말 엘리야의 말대로 엘리야와 그 가족이 여러 날 먹었으나 먹을 게 떨어지지 않고 계속 채워지고 채워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누가 주인인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바알이란 우상의 이름의 뜻이 ‘주인’이란 뜻이고, 그가 사람들을 먹여 살린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바알은 풍요의 신이고, 물질의 신을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이 나를 먹여 살린다고 믿는 겁니다. 그래서 바알의 종, 물질의 종이 되는 겁니다. 설교 서론에서 진정한 부자들은 돈의 종이 아니라, 돈을 움직이는 돈의 주인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잠시 말씀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돈이 얼마나 눈치가 빠른지 서열을 빨리 정리해 버립니다. 그래서 자기가 주인이 될지, 자기가 종이 될지를 그 사람을 보고 결정을 해 버리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탈무드에 이런 격언이 있습니다.

“돈은 무자비한 주인이기는 하나, 충실한 심부름꾼이 되기도 한다”

 

돈이 여러분의 주인행세를 하지 못하도록 하셔야 여러분이 돈을 움직이는 진정한 부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돈이 여러분의 충실한 심부름꾼이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바알(돈, 풍요의 신)은 결코 우리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바알의 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역설적인 내용이 많습니다. 바알의 고향 같은 곳 시돈에 갔는데, 그 시돈에서 굶어죽던 한 여인을 바알이 아닌 하나님의 선지자가 먹여 살리는 것입니다. 전국에 심각한 기근이 들었는데, 가난한 시돈의 사르밧 과부의 밀가루 통과 기름병은 비는 법이 없습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습니까? 그 여인이 바알이 아닌, 엘리야의 말대로, 엘리야를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순종했더니 그런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 순간 그 말씀을 믿었고, 그 순간 그 여인의 주인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물질을 넘어선 것입니다. 더 이상 그 물질의 종이 아니었고, 말씀과 믿음이 그 물질을 다스리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제 바알이 주인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진정한 주인임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기근 중에도 그들을 먹이시고 입히셨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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