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이드1

“믿는다면 순종하라”

<열왕기상 18:1~15> 

– 열왕기상(33) –

 

 

 

 

미국과 캐나다 국경에 있는 나이아가라 폭포는 세계 3대 폭포 중에 하나인데, 오늘 말씀제목을 정하면서 이 나이아가라 폭포만큼 유명한 예화 하나가 생각났습니다. 수년 전에도 한 번 말씀 드린 바 있습니다.

1859년 프랑스 출신의 곡예사 ‘샤를 블롱댕(Charles Blondin, 1924~1897)’이 미국의 『뉴욕타임지』에 작은 광고를 하나 냈습니다. 폭335m 거리의 나이아가라 폭포 위에 밧줄을 하나 설치하고, 자신이 미국에서 캐나다로 그리고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외줄타기를 하며 건너겠다는 겁니다. 당시까지 그런 무모한 시도를 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만약 실수라도 해서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죽을 수도 있는 아주 위험한 시도였습니다. 광고를 보고 수천 명의 관중들이 몰려왔습니다.

블롱댕은 18kg의 장대로 균형을 잡고서 한 발 한 발 설치한 외줄을 타고 폭포를 건너기 시작해 건너편에 도착했습니다. 가슴을 졸이며 지켜보던 수천 명의 관중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께 환호했습니다. 블롱댕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폭포 위 외줄 위로 다시 올라가 누워있기도 하고, 물구나무를 서기도 하고, 안대를 하고 건너기도 하고, 줄 위에서 테이블을 놓고 와인을 마시기도 하고, 심지어는 외발 자전거를 타고 건너는 갖가지 묘기들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그의 외줄타기 난이도가 높아갈수록 관중들의 박수와 환호성은 더 커져갔습니다.

그렇게 블롱댕의 묘기가 절정을 향해 갈 때, 그가 관중들을 향해 “여러분, 제가 사람을 업고 이 폭포를 건널 수 있다고 믿습니까?”라고 묻자, 관중들은 일제히 “네, 믿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블롱댕이 “그러면 내 등에 업혀서 나와 같이 이 폭포를 건너갈 사람 한 분만 앞으로 나와 주시길 바랍니다”라고 하자, 관중들은 웅성거리며 아무도 앞으로 나서지 못하는 겁니다.

그 때 블롱댕은 관중 가운데 서 있었던 ‘해리 콜코드’라는 사람을 지목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업고 한 발 한 발 외줄을 타고 폭포 위를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수천 명의 관중들도 숨을 죽여 가며 그 광경을 지켜봤고, 블롱댕과 콜코드는 무사히 폭포를 건너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손에 땀을 쥐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수천의 관중들은 크게 환호했습니다.

그에게 업혀 폭포를 건넜던 콜코드는 블롱댕을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블롱댕의 매니저였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블롱댕을 믿었기 때문에 그는 블롱댕과 함께 외줄을 타고 나이아가라 폭포를 건넌 최초의 사람으로 역사에 기록되게 된 것입니다.

믿는 것과 아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관중들은 블롱댕이 사람을 업고 건널 것을 알았던 것이지 믿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는 것은 지식적으로 동의를 하는 것이지만, 믿는 것은 지적인 동의뿐 만 아니라 감정적이며 의지적인 모든 것을 전폭적으로 맡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면에서 관중들과 매니저인 콜코드의 차이는 아는 것과 믿는 것의 차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19절을 보시면,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믿는 건 귀신들(마귀들)도 믿고 떤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선 믿는다고 번역을 해 놓았지만, 이 믿음은 전적인 의뢰가 담긴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아는 것을 말합니다.

 

야고보서 2장 20절에서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즉 진정한 믿음은 아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그 믿음이 행함으로 옮겨진다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 전적인 의뢰가 없는 믿음, 순종이 없는 믿음은 아는 것에서 그치는 거지 진짜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짜 믿는다면 순종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시면,

“많은 날이 지나고 제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열왕기상 17장 1절에 보면, 북이스라엘에 기근이 들 것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 때 엘리야는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했는데, 정말 3년 6개월 동안 비도 이슬도 없어 온 이스라엘은 심각한 기근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그 예언 뒤에 시돈의 사르밧 과부의 집에 머물며 그곳에서 그 기근을 면했습니다. 그 사이에 그 과부의 아들이 갑자기 죽게 되었고, 엘리야를 통해 기적적으로 그 아들이 다시 살아나기도 했었습니다.

그 후 3년이 지났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기근이 시작된 지 3년 6개월 만에 이제 아합 왕에게 가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제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합은 변화된 게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바알 우상 숭배에 심취해 있었고, 그는 여전히 악한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해서 다시 비를 내리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합 왕이나 이세벨이 잘 하고 있었다거나, 우상숭배를 버렸다든가, 회개하고 선한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 일을 통해 자연을 주관하는 진정한 신은 바알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엘리야를 통해 보여주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합 왕에게나, 왕비 이세벨에게 어떤 호의를 베풀 필요가 없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입장에서 그들은 악한 자들이었고, 그런 심판은 마땅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하나님의 호의가 있을 때 그들은 회개해야 했던 것입니다.

일이 다시 잘 된다고, 걱정하고 근심하던 문제가 사라졌다고 계속해서 죄 속에서 돌아오지 않는다면 더 큰 재앙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라고 여겨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주님께로 돌아가야 할 기회인 것입니다.

3년이 넘도록 비가 오지 않았으니 북이스라엘과 수도인 사마리아의 기근이 얼마나 심각했겠습니까? 엘리야는 아합을 만나기 위해서 사마리아로 들어가게 됩니다.

 

3절을 보시면,

“아합이 왕궁 맡은 자 오바댜를 불렀으니 이 오바댜는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라”

 

아합의 왕궁 대신 중에 ‘오바댜’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북이스라엘의 가장 악한 왕 아합의 대신이었던 오바댜는 하나님을 지극히 경외하는 사람이었다는 소개가 나옵니다. 그리고 4절을 참고해 보면, 그는 왕비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하려고 할 때, 그 사실을 알고 급히 선지생도들 100명을 빼돌려 굴에 숨겨놓고 떡과 물을 공급해 주면서 그들을 구원했습니다. 만약 그 사실을 왕과 왕비가 알게 되었을 때는 오바댜는 직업도 잃고 목숨도 잃을 게 뻔했지만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경외했던 그는 목숨을 걸고 그 일을 했던 것입니다.

아합 왕은 죽어가는 가축들을 그대로 둘 수 없어서 오바댜를 불러서 약간의 물이라도 얻기 위해 물을 찾으러 나갑니다. 아합과 오바댜는 각각 두루 다니며 물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7절을 보시면,

“오바댜가 길에 있을 때에 엘리야가 그를 만난지라 그가 알아보고 엎드려 말하되 내 주 엘리야여 당신이시니이까”

 

길을 가다가 오바댜가 선지자 엘리야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워낙 하나님을 잘 섬기던 오바다였기 때문에 엘리야 앞에 엎드려 ‘내 주 엘리야여 당신이시니이까’라고 묻고 있는 장면입니다.

또 지난 3년 6개월 동안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엘리야는 1급 지명수배령이 떨어진 인물이었습니다. 아합은 그 주변의 모든 부족국가까지 다 뒤지며 엘리야를 찾았지만 번번이 실패했었습니다. 그래서 오바댜가 깜짝 놀라며 엘리야 앞에 엎드려 예를 표하는 모습입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오바댜에게 자신을 봤다고 아합 왕에게 알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본문 내용입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본문의 왕비 이세벨과 아합 왕의 모습을 보면서 특이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4절에 보면, 왕비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생도들에 대한 독기가 서려 그들을 멸하려 했던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오바댜 같이 하나님을 경외했던 사람이 100명이나 되던 선지생도들을 빼돌려 그들을 구원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10절에 보면, 아합 왕은 엘리야 선지자에게 1급 지명수배를 내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와 북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부족국가들까지 샅샅이 다 뒤지며 그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왜 이세벨과 아합은 엘리야 선지자에게 이렇게 독기가 서리게 되었을까요? 단지 아합 왕과 엘리야가 섬기는 신이 다르기 때문에, 종교적인 문제 때문이었겠습니까? 엘리야와 선지생도들에게 단지 종교적인 박해를 위해 그랬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질문을 하나 해 본다면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가 엘리야 선지자가 열왕기상 17장 1절에서 했던 기근에 관한 예언의 말씀을 믿었을까요? 안 믿었을까요? 그들은 엘리야의 저주와 그 기근에 관한 말씀을 믿었습니다.

 

17절에 보면, 아합이 3년 6개월 만에 엘리야를 보자마자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

 

아합과 이세벨은 엘리야의 저주 때문에, 엘리야의 기근에 관한 예언 때문에 지난 3년 6개월 동안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확고히 믿고 있었습니다. 엘리야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화가 나서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하려고 했던 것이고, 엘리야를 지명 수배해서 체포하려고 했었던 것입니다. 엘리야의 말을 안 믿었다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엘리야의 말을 믿었다면 이렇게 반응해서는 안 되는 거였던 겁니다.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해야 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더 공격적으로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이려 하고, 엘리야를 죽이려 달려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깐 그들의 믿음은 진실한 믿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조되는 두 사람이 엘리야와 오바댜였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자신이 왕의 절대 권력을 쳐서 저주를 예언했기 때문에, 3년 6개월 동안 쫓길 신세가 될 것을 알았지만 말씀에 그대로 순종했던 것입니다.

오바댜 역시 아합 왕의 궁중 대신의 몸으로 여호와의 선지생도들을 빼돌려 그들을 살려줬습니다. 그것은 왕과 왕비의 뜻을 역행하는 일이라는 것을 몰랐겠습니까? 그러나 이 세상의 권력자 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던 오바댜는 목숨을 걸고 그 일을 했었던 것입니다.

엘리야와 오바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그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절대 순종했던 것입니다. 아합과 이세벨은 엘리야가 저주를 예언할 때만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안 믿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비가 내리지 않고 온 나라 안에 기근으로 심각한 지경에 이르게 되자 엘리야의 말이 사실이란 것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왜 그런 기근이 오게 되었습니까? 아합이 3년 6개월 만에 엘리야를 처음 만나자 마자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라고 말하자 엘리야가 어떻게 대답합니까?

 

18절 말씀을 보시면,

“그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라”

 

엘리야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아합과 그 집이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게 된 것인데, 왜냐하면 그들이 여호와의 명령을 버리고 바알들을 따랐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엘리야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합 왕과 왕비 이세벨의 우상숭배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돌아와야 했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아무리 많이 알면 뭐합니까? 교회 생활 아무리 오래 했으면 뭐 합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리 많이 알고 있으면 뭐 합니까? 머리로는 다 알고 있는데, 마음이 따르지 않고, 순종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아합과 이세벨이 엘리야의 말을 확고하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엘리야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엘리야를 죽이려 하고, 선지생도들을 죽이려 했었던 것입니다.

믿는다면 순종이 따라 와야 하는 것입니다.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아합 왕과 이세벨이 왜 순종하지 못했겠습니까? 그들의 욕심 때문에 순종하지 못한 겁니다. 엘리야의 말을 확고하게 믿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바알을 통해 주는 물질적인 풍요의 복이라는 욕심을 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왜 우리가 순종하지 못합니까? 우리의 욕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면서까지 누리고 싶고, 취하고 싶고, 갖고 싶은 바로 탐욕과 정욕과 욕심 때문에 순종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대문호이자,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 중에 한 사람인 ‘톨스토이(Leo Tolstoy, 1828~1919)’에게 있어 기독교 신앙은 삶과 문학에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후대의 사람들이 그를 평가할 때, ‘문학을 통해 청교도적 설교를 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릇된 믿음이 우리의 모든 불행을 자초 합니다”

 

사람은 여러 가지를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믿고 있는 그 믿음이 잘못된 것일 때에는 그를 헤어 나올 수 없는 불행으로 이끌어가게 될 것입니다. 아합과 이세벨은 물질적인 풍요가 그들을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고 믿었기에, 엘리야를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이 진짜인 줄 알면서도 바알에 관한 그릇된 믿음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 그릇된 믿음이 불행을 자초했던 것입니다. 진정으로 믿는다면, 내 모든 욕심들을 내려놓고 주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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