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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수치를 가리우시다”

<창세기 3:7~10> 

 

 

어제 뉴스에 보니깐 올해 3월에 드러난 유명 연예인들의 성폭력범죄에 관한 1심 판결에 관한 소식이 올라왔습니다. 둘 다 잘 생겼고 음악적 재능도 탁월하고 아직 30세 밖에 안 된, 어쩌면 연예인으로서 한참 주가를 올리고 전성기를 누려야 할 시기에 이런 추악한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결국 이들은 각각 징역 6년과 5년 그리고 80시간의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이수, 5년 간 아동과 청소년 관련 시설 등의 취업 제한 명령 등의 실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이들이 형을 다 살고 나온다고 해도 다시 연예계로 복귀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거 같습니다.

이 기사를 다룬 언론에서 [정OO. 최OO, 중형 선고 고개 숙이고 ‘오열’]이라고 헤드라인을 붙였습니다. 이들은 법정에서 실형을 선고받자 고개를 떨구고 오열했다는 겁니다. 이들이 법정에서 왜 오열을 했을까요? 아마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죄와 잘못에 대한 후회의 눈물일 수도 있을 거고, 8개월 동안 가슴 졸이며 판결을 기다렸는데 생각보다 중벌이 내렸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고, 젊디젊은 자신들의 인생이 성폭행범이라는 씻을 수 없는 주홍글씨를 달고 평생을 살아야 할 것을 생각하며 수치스러움에 쏟은 눈물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버드 대학(Harvard University)은 미국에 정착한 청교도인 ‘존 하버드’목사님에 의해 ‘기독교인이 지식이 부족하면 안 된다’는 신념으로 1636년 신학교로 먼저 시작된 교육기관입니다. 현재 자타공인 세계 최고의 대학입니다.

그런데 1999년에 미국의 하버드 대학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교내의 컴퓨터를 관리하는 담당 기사가 하버드 신학대학의 학장 관사의 컴퓨터를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학장의 하드디스크에서 수백 장의 음란 사진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사진을 발견한 기사는 그 사실을 총장에게 보고했고, 결국 이 일로 인해 하버드 신학대학의 ‘로널드 티먼 교수’는 학장 자리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티먼 교수는 명예도 잃고, 수치스럽게 직업도 잃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분들은 ‘어떻게 신학 대학의 학장님이 그럴 수 있지? 이건 말도 안 된다…’라고 하실 분도 계실 겁니다.

 

 

제가 존경하는 ‘故 하용조 목사님(1946~2011)’님은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말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지은 죄 중에서 모르고 지은 죄는 거의 없습니다. 단지 우리의 죄에는 들켜 버린 죄가 있고, 들키지 않은 죄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유명인들의 범죄들을 보고 심지어 성직자들의 범죄들을 보고 충격을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죄는 들켜버린 것이고, 우리는 다행인지 뭔지 아직 들키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죄가 드러나면 수치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죄는 반드시 우리에게 수치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성탄절까지를 교회력으로는 ‘대강절’ 즉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를 4주간 보내게 됩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수밖에 없으셨느냐? 그것은 이 세상의 누구라도 예외 없이 우리의 모든 수치를 가리우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1. 죄의 수치를 가리우시다.

창세기를 영어로는 ‘제네시스(Genesis)’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기원, 시작’이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에는 우주의 시작, 인류의 시작, 가정의 시작뿐만 아니라 죄의 시작도 소개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창세기 3장에서는 인간 가운데 시작된 ‘죄의 기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그들에게 에덴의 낙원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선물 속에는 동산 안에 있는 모든 과일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깐 아담과 하와는 모든 먹을 것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지금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뭘 먹고 살까?’를 염려하며 살고 있다면, 아담과 하와는 적어도 뭘 먹고 살지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이 먹고 살 모든 것을 에덴의 낙원에 이미 다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과일 중에 하나는 생명나무였는데, 창세기 3장 22절에 의하면 그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사람이 영원히 살 수 있는 신비로운 나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에덴의 모든 먹고 살 것들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영생할 수 있는 길도 마련해 주셨던 것입니다.

단 하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인 ‘선악과’만큼은 절대 먹지 말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들어서 사람들이 죄에 빠지게 했느냐?’라고 의문을 갖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자유의지를 갖고 있는 인격적인 존재로 지으셨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는 겁니다. 앞으로 4차 산업혁명인 AI(인공지능 로봇)의 시대가 도래하게 되어 일상생활 속에서 로봇은 우리 인간의 선생이 되기도 하고, 드라이버도 되고, 청도 하고, 심부름꾼도 되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로봇과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요? 가능하지 않다면 그 이유가 뭡니까? 엄청난 정보력을 갖고 있는 컴퓨터 인공지능을 갖고 있는 로봇이라 할지라도 살아있는 인격체가 아니기 때문에 인간이 로봇과 사랑에 빠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과 인격적인 관계를 원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을 인격적인 존재, 자유의지를 갖고 있는 특별한 존재로 지으신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언약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모든 관계는 ‘언약, 약속’이라는 것이 매개가 됩니다.

 

– 회사의 사장과 직원의 관계는 노동의 대가로 돈을 주겠다는 관계로 묶여 있습니다. 만약 이 약속이 깨지면 이 관계는 사장도 직원도 아닌 겁니다.

– 친구관계도 서로에 대한 어떤 신뢰관계가 있는데, 혹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그 신뢰관계가 깨질만한 일이 생기면 그 관계는 즉시 끊어져 버리는 겁니다.

–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만나 부부가 되는 부부관계 역시 결혼할 때 ‘건강하거나 병들거나, 부하거나 가난하거나 어떤 상황 속에서도 서로에 대한 정절과 사랑’을 서약하고 부부로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부간에 다른 건 다 용서해도 정절의 문제가 생기게 될 때, 아무리 사랑하던 사이였다 할지라도 그 부부의 관계를 지속하기가 어려워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겁니다. 물론 용서하고 사는 부부도 있습니다.

 

즉,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어떤 인격적인 관계는 ‘언약, 약속’에 의해 맺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에덴이라는 낙원과 축복을 주셨습니다. 대신에 다 허용되지만 단 하나 선악과만큼은 따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한 가지만 지키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약속하신 축복과 영생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깨뜨리게 되면 창세기 2장 17절에 의하면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다시피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주신 에덴의 축복에 만족하지 못하고 뱀 곧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뱀 곧 마귀는 여러분을 여러 가지로 유혹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 여러분은 손대지 말아야 할 것에 손을 대기도 했을 것입니다.

마귀의 유혹은 달콤하지만 그 죄에 손을 댈 경우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축복들은 산산이 깨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렇게 친밀했던 부부의 관계도, 단란했던 가정도, 친구들과의 관계도, 잘 나가던 사업체도 그리고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트러블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죄의 바이러스와 악성세포는 점점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에 퍼져가며 행복했던 우리의 인생을 병들게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7절을 보시면,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자마자 첫 번째로 나타났던 증상이 부끄러움 곧 ‘수치’를 느끼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창세기 2장 25절에 의하면 그들이 범죄 하기 전에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마치 두 세 살의 어린 유아들이 아직 죄에 덜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부끄러움과 수치를 잘 모르는 것과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기 전에는 하나님 앞에서 수치라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하지만 범죄 하자마자 수치와 부끄러움을 느끼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은 것입니다. 죄는 우리에게 수치와 부끄러움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죄를 짓게 되면 자꾸 숨는 겁니다. 떳떳하면 숨을 일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인은 자꾸 어둑한 곳을 찾아 어디론가 숨어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10절을 보시면,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죄는 아담에게 수치와 부끄러움을 주었고, 두려움을 주었습니다. 죄는 수치와 부끄러움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두려움 속에 살게 만들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직 놓지 못하는 그 죄의 달콤함은 결국 우리에게 수치와 부끄러움을 줄 겁니다. 또 그 죄는 우리가 불안과 염려와 두려움 속에 살게 만들 것입니다. 그 죄를 버리십시오. 그건 가짜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속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죄의 바이러스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 자리를 피하셔야 합니다.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죄는 처음에는 여자처럼 약하나, 방치해 두면 남자처럼 강해지게 된다”

 

죄를 방치해 두면 여러분 안에서 점점 세력을 확장하고, 더 힘이 세지 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곳에 이런 말도 있습니다.

“죄는 처음에는 손님이다. 그러나 그대로 두면 주인을 쫓아내고 주인이 된다”

 

죄가 처음에는 손님처럼 잠시 들렸다 가지만 그대로 내버려 두면 그 죄가 주인을 쫓아내고 자기가 그 인생의 주인이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안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있는 죄를 더 이상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창세기 3장 15절 말씀을 보시면,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이 구절은 신학적으로 ‘원시복음’이라고 합니다. ‘최초의 복음’이란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뱀인 마귀를 정죄하시면서 말씀하신 예언입니다. 여기 등장하는 ‘여자의 후손’은 처녀 마리아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않은 동정녀에게서 태어난 여자의 후손인 것입니다.

그런데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원수가 된다는 것이고, 뱀의 후손은 예수님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발에도 커다란 대못을 박은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뱀이 발뒤꿈치를 물었으니 뱀이 이긴 것처럼 보일 겁니다. 하지만 여자의 후손은 무덤에서 부활하여 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즉 모든 마귀를 멸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속옷조차도 없이 옷을 하나도 걸치지 않은 상태로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나무 위에 높이 달려 죽으셨습니다.

여러분이 양팔을 벌려 벌거벗겨 높은 곳에 매달려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게 얼마나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입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람들에게 수치를 당하셨던 이유는 우리의 모든 죄의 수치를 대신 가리어주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과거에 지었던 죄, 예수를 믿고서도 실수하고 넘어져 죄에 빠져 그 벌로 수치를 당해야 하는데, 주님이 대신 수치를 당하시고 우리의 수치를 가리어 주셨던 것입니다.

 

시편 103편 12절에서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 앞에서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해 마땅한 죄인들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대신 벌 받으시고 대신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2. 인생의 수치를 가리우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의 수치만 가리어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의 수치까지도 가리우시는 분이십니다.

아담과 하와는 지상의 낙원인 에덴동산에서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부족함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범죄한 이후부터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인생에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영적으로 그들은 범죄 이후부터 인생 속에서 수치와 부끄러움을 겪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가 깨지게 되었고, 영생의 삶 까지도 박탈당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들에게 인생의 여러 가지 문제들로 고통을 겪으며 사는 고통스런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16절을 보시면,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하와 즉 여자에게는 임신과 출산의 고통이 더해진다는 것입니다. 포유동물들이 출산하는 장면을 보면 그리 심한 고통 속에서 낳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물론 동물 입장으로 가면 그 동물도 출산의 고통이 있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만큼은 아닌 거 같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출산할 때, 죽을힘을 다해 악을 쓰고, 힘을 쓰고, 뼈가 떨어져 나가는 고통 뒤에 겨우 출산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와가 선악과에 손을 댄 범죄 이후에 주어진 형벌인 것입니다. 그러니깐 범죄 하기 이전에는 그 정도까지의 출산의 고통이라는 것은 없었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17절을 보시면,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아담 즉 남자에게는 노동의 고통이 시작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땅이 저주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일들이 내 뜻대로 안 되는 겁니다. 남자는 평생에 수고하고 애를 써야만 먹고 살 수 있고, 가족들을 부양할 수밖에 없는 힘든 노동을 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범죄 한 이후에 임신과 출산과 자녀 양육에 관한 여러 가지 어려움들 속에서 살아야 하고, 먹고 살기 위해서는 잠도 푹 잘 수 없고, 마음대로 놀러 다닐 수도 없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수도 없고… 정말 얼굴에 땀이 흐르는 힘든 노동의 과정을 통해 먹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 7절부터 20절까지 범죄로 인해서 인간들에게 주어진 형벌인 여러 가지 수치와 어려움들의 내용을 기록하다가 불쑥 특별한 이야기가 하나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1절을 보시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 먹은 이후에 수치스러워서 급히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부끄러움을 가리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뭇잎은 금세 햇볕에 말라버려서 또 아담과 하와는 나뭇잎을 모아 치마를 만들어 입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위해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는 내용입니다. 가죽옷이라고 하면 나뭇잎으로 만든 옷보다 더 영구적으로 입을 수 있는 옷이었습니다.

여기에는 특별한 의미도 있습니다. 가죽옷을 만들려면 동물의 희생과 피흘림이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9장22절에서도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시고 있는데,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우리 인간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가리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일시적으로가 아닌 영구적으로 가리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영적인 의미 외에 문자 그대로의 의미도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수치를 가리우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수많은 문제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때로는 그런 일들로 인해 우리는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 앞에 부르짖고 간구하며 살아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질병의 문제도 있고, 재정의 문제도 있고, 여러 관계의 문제도 있고, 미래와 진로의 문제 등등 우리의 인생 속에는 수많은 문제들이 나타나고 우리는 그 문제들로 인해 고통을 겪기도 하고, 수치와 부끄러움을 겪기도 하는 겁니다. 아담과 하와의 나뭇잎 치마가 금세 말라버려 또 다시 부끄러움이 드러나듯이 우리의 인생에는 한 가지 문제가 해결되면 또 다른 문제가 나타나고 그 문제가 지나면 또 예기치 않은 문제가 나타나 우리를 괴롭히고 수치와 부끄러움을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 실수하고,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혀 그들의 부끄러움을 가리우시듯이 우리 인생의 문제들 속에서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우리를 그 속에서 건져주시고, 가리어 주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우리가 실수해서 생긴 문제이든, 다른 사람으로 인해서 겪고 있는 문제들이든 우리 인생의 문제들을 갖고 주님께로 나아가면 주님께서 우리를 그 문제 속에서 건져주시는 것입니다. 그 수고하고 무거운 짐에서 쉬게 하시는 것입니다.

전에 말씀 드렸던 적이 있는 ‘데니스 저니건(Dennis Jernigan)’이란 사람의 대한 이야기로 오늘 말씀을 맺겠습니다.

데니스 저니건 이란 소년은 피아노를 잘 쳤고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서 뛰놀며 교회가 놀이터요, 학교처럼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데니스가 다섯 살 때 화장실에서 동성애자에게 성추행을 당하게 되고, 그 이후부터 동성애의 늪에 빠지게 됩니다.

교회는 열심히 다녔지만 자신의 동성애를 감추고 끊임없는 내적 갈등으로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대학 캠퍼스에서 만난 기독교 지도자에게 마음을 열고 자신의 인생의 가장 어둡고 어려운 동성애 문제를 상담했습니다. 그러나 그 지도자는 데니스에게 동성애자로 접근하기 시작했고, 데니스는 자살을 시도하다 포기하고, 자포자기 하는 마음으로 동성애자로 살게 됩니다. 그렇게 그의 인생은 더 깊은 절망의 수렁에 빠져가게 됩니다.

 

 

그러다 우연히 어떤 찬양집회에 참석했다가 거기서 큰 은혜를 경험하게 되고, 동성애의 늪에서 빠져나오게 됩니다. 자신은 평생 여성과 사랑에 빠지거나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는 여성과 결혼해 9명의 자녀를 낳게 됩니다. 그가 동성애의 늪에서 빠져 나와 지은 곡이 바로 ‘약할 때 강함되시네’란 찬양인 것입니다.

이 노래에 “쓰러진 나를 세우고 나의 빈 잔을 채우네”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처참하게 실패했을 지라도 예수님은 내 모든 인생의 수치를 가리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다시 일으키시고 세우시고 새 은혜를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 앞에 나오면 불가능한 것은 없습니다. 내 인생의 모든 아픔들은 치유되고 회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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