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이드1

“신앙의 타협, 괜찮은가?”

<요한계시록 2:12~17> 
– 이 시대의 교회들에게(3) –

 

[Audio 말씀]

 

타협(妥協)이란 단어는 부정적으로 쓰이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좋게 쓰면 참 좋은 말입니다.

사전적인 뜻을 보자면, “두 편이 서로 좋도록 조정하여 협의함.”이란 의미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자기 마음대로, 자기 뜻대로만 살수는 없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 사이 혹은 일과 일 사이에는 적당한 타협이 필요할 것입니다.

부부간에도 서로 조금씩 양보하면 싸울 일도 없을 겁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상대방을 이해하고 내가 조금 양보하면 다툴 일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서로 조금씩 양보하면 되는데, 조금도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 때문에 자꾸 트러블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 양보하지 않는 사람 주변에는 다툼이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6월 들어서면서 북한은 김정은의 동생 김여정을 통해 대북전단살포에 관한 제재법안을 마련하라고 협박하기 시작하더니, 그렇지 않을 경우 개성공단에 우리 정부가 100억 원을 들여 건축한 ‘남북 연락사무소’를 폭파할 것이라고 압박했습니다.

결국 북한은 3일 뒤인 16일 남북연락사무소를 폭발해 버렸습니다. 우리는 그 동안 수백억, 수천억을 들여서 북한을 어르고 달래며 어떻게든 남북평화의 타협안을 찾고 있는데, 북한은 타협할 마음이 없고 양보할 마음도 없으니깐 늘 싸움을 걸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코로나는 전 세계 214개국에서 발생했고, 거의 1천만 명이 확진판정을 받았습니다. 특히 최대 발생국인 미국은 2백 50만 명이 확진 받았습니다. 하지만 코로나 확진 증가율이 주춤하는 사이에 오랜 봉쇄기간의 피로도와 경제 때문에 지난 달 봉쇄를 풀고 경제 재가동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나면서부터 미국 내 코로나 확진자는 또 다시 급속도로 증가하기 시작하면서 엊그제는 하루에 4만 명이 확진판정을 받았습니다.

미국 정부 쪽에서도 코로나도 잡아야 하겠고, 경제도 살려야 하겠는데 당장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일찍 경제활동을 재가동한 것입니다. 어쩌면 타협안이었죠. 하지만 이런 경우는 사람들의 생명을 담보로 한 매우 위험하고 잘못된 타협안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타협이 필요한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타협하는 것이 오히려 더 큰 화를 불러 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타협이 필요한 부분에서 유연하게 타협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는 절대 물러서지 말아야 할 부분도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1. 타협이 필요할 때가 있다

신앙생활만큼은 절대 물러서지 말아야 할 것 같은 그래서 타협이 없을 거 같은데 교회생활, 신앙생활 중에 타협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첫째, 덕이 되게 하라

첫 번째 타협의 원리는 ‘모든 것을 덕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6절에 보시면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고린도전서 12장부터 14장까지는 여러 가지 성령의 은사에 관한 말씀들이 나옵니다. 특별히 고린도 교회에는 여러 가지 성령의 은사들이 나타났던 뜨거운 교회였습니다.

고린도교회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은사 중에 하나가 ‘방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는 방언이라는 것은 뜨겁게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주로 나타났습니다. 오늘날에도 뜨겁고 열정적으로 기도하는 분들에게 방언의 은사가 주어지는 것을 많이 봤습니다.

초대 예루살렘교회와 고린도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예언적인 의미의 방언의 은사가 많이 나타났습니다. 때문에 그런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얼마나 감사하며 영광스럽겠습니까? 성경이 완성되지 않았던 시대에 방언을 말하는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분명 성령의 은사고,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니 방언을 말하는 것 자체가 전혀 문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원칙이 있었는데 26절 하반절에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5절에서도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우리가 무슨 말이든 할 자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무 말이나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모든 말을 덕을 세우고, 듣는 자들에게는 은혜를 끼치는 말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사랑으로 하라
두 번째 타협의 원리는 ‘사랑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베이스에 사랑의 마음이 깔려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에 관한 이야기를 말씀해주시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심하게 구타당하고 모든 것을 다 뺏겨 쓰러져 거의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옆을 지나던 한 제사장도, 레위인도 죽어가던 그를 보고 멀리 피하여 돌아 자기 갈 길을 갔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지나가다 그를 보고 불쌍히 여기 그를 데려다 치료해 주고 돌보아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묻습니다. ‘시체를 만지지 말라는 율법 조항 때문에 제사장도, 레위인도 그를 만지지 않았다 만은 진짜 이웃은 누구 겠느냐? 너희 유대인들이 이방인과 개처럼 여기는 사마리아 사람 아니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하는 게 맞지만, 그보다 더 앞서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로마서 13장 8절에서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또 로마서 13장 10절에서는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을 율법의 완성이니라”

 

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먹지 말라는 육식 종류가 있습니다.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먹는 것에 자유함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 같은 경우는 유대인 형제들을 전도하기 위해 그 자유를 포기하고, 평생토록 채식을 하겠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자기 자신 만을 위한 이기주의적인 타협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도 않고, 은혜가 되는 것도, 덕이 되는 것도, 주님의 사랑으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타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보다 다른 이들을 위해, 나보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간다면 얼마든지 그 부분만큼은 유연하게 타협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이 한 분 계십니다. 설교도 잘 하시고, 인격도 훌륭하신 이 목사님은 경기도의 한 대형교회에서 오랫동안 부목사로 인정받으면서 사역하시다가 서울의 한 역사 깊은 큰 교회로 청빙 받아 담임목회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의 중직자 중 한 분이 서울대를 나오시고, 신학교도 졸업하신 똑똑한 분이 계셨는데 이 분은 담임목사님이 설교하고 내려오시면 항상 설교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지적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시작이었고 결국 중직자들 중에 여러 명이 무리를 짓게 되고, 목사님은 그들과 갈등을 겪게 된 것입니다.

보통 이런 경우에 ‘교회를 지키겠다.’고, ‘정의를 세우겠다.’고 두 파로 나뉘어 싸우는 안타까운 교회들의 모습들이 종종 있습니다. 어떤 교회들은 반대파가 교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바리케이트를 치기도 하고, 교회 안으로 못 들어간 파는 마당에서 예배드리기도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 문제가 있는 모든 교회의 상황을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다툼이 있는 교회의 모습은 덕도 되지 않고, 은혜롭지도 않고, 주님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사랑’도 그 가운데 없어 보입니다. 그런 다툼 중에 결국 믿음이 연약한 많은 성도들은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제가 존경하는 그 목사님에게도 그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참 지혜롭게 그 상황을 해결하셨습니다. 목사님께서 담임목사직을 사임하시고, 그 교회 측에 목사님을 지방의 한 지역으로 파송해 달라고 요청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교회에서 어떤 물질적인 의무를 갖고 파송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파송만 해 달라는 거였습니다. 그게 목사님의 타협안이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덕을 위해서였습니다. 중직자들과 담임목사님이 다투는 모습은 교회에도, 세상 사람들의 눈에도 좋지 않을 것입니다. 목사님은 그렇게 빈손으로 서울의 그 교회를 나와 지방으로 내려가 교회를 개척했는데, 지금 교회는 그 지역에서 가장 크게 부흥하고 목사님은 기독교방송에도 자주 출연하셔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참 복잡하고, 인간관계도 복잡합니다.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을 하는 중에도 우리에게 타협이 필요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원리와 원칙은 간단합니다. 그 결정과 그 문제가 덕이 되게 하고, 은혜가 되게 하고 무엇이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십시오.

 

2. 믿음에는 타협이 없다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개의 교회를 통해 주님께서는 ‘이 시대의 교회들에게’도 동일한 말씀을 주시고 있습니다. 그 중에 오늘은 세 번째로 버가모 교회에게 주셨던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버가모는 지난주에 살펴봤던 서머나에서 북쪽으로 80km 정도 떨어져있는 도시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보시면,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버가모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버가모에는 로마시대의 많은 신들을 위한 많은 신전들이 건축되어 있었습니다. 때문에 버가모는 우상숭배의 중심지였고, 로마 황제 아우구스도(Augustus)를 위하여 신전을 지은 최초의 도시였습니다. 때문에 헬라의 각종 우상을 숭배할 뿐만 아니라, 황제 숭배의 중심지였던 것입니다.

때문에 사탄의 권좌가 있는 척박한 그 도시에 심겨진 복음의 씨인 버가모 교회는 얼마나 많은 박해 속에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주님은 그 교회 성도들이 예수의 이름을 굳게 잡고 그 환난을 견뎌냈다고 칭찬하시고 있습니다. 특히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충성된 증인 ‘안디바’는 우상의 신전에서 순교 당할 때에도 끝까지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성도였습니다.

 

그러나 14절을 보시면,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어떤 성도들은 사탄의 권좌로부터 오는 엄청난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주님의 이름을 굳게 붙들고 견디며, 어떤 성도는 그 큰 환난 속에서 순교하기도 하는데 한 무리의 성도들은 전혀 다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을 보내고,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는데 아라비아 광야에서 모압 땅을 가로지르면 좀 더 빨리 가나안 땅을 마주 할 수 있는 요단 동편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압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로 지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이스라엘은 어쩔 수 없이 모압 동쪽을 쭉 둘러 멀리 돌아 요단 동편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지역에 살던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이 이스라엘을 공격했고, 이스라엘은 그들을 진멸하고 그 넓은 땅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위기를 느낀 모압 왕 발락이 발람 선지자를 불러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던 역사가 민수기 22장부터 25장까지 나옵니다. 발락 왕은 발람 선지자에게 많은 돈으로 매수했고,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시는 것을 알면서도 발람 선지자는 돈에 넘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민수기 25장에 보면 발람이 하나의 계략을 내는데, 모압 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 이스라엘 족속의 지도자들을 초청해 그들이 그 우상 앞에서 먹고, 마시고, 그 여자들과 음행을 저지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노했고, 이스라엘 가운데 전염병이 돌아 2만 4천 명이 죽게 됩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쓰라린 실패의 역사로 기록된 것입니다.

 

이것을 15절에서는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14절의 발람의 교훈을 15절에서는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발람의 교훈이라는 것은 ‘물질적인 탐욕과 육체적 욕망’을 따르는 것이라 이해하시면 되시겠습니다. 이것을 니골라 당의 교훈과 비교하고 있는 것은 발람의 교훈과 비슷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니골라는 이방인으로서 유대교로 개종했다가 다시 기독교로 개종한 자였고, 사도행전 6장에 보시면 초대교회 일곱집사 중에 한 사람으로 세워진 충만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스테반 집사님처럼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한 분도 계시지만, 니골라 집사는 니골라 당이라 하는 이단 종파를 창시하게 됩니다.

니골라 당은 오늘 날의 구원파와 상당히 비슷한 이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육신은 본래 악하기 때문에 구원에 있어서 육체는 중요하지 않고,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가 믿고 있는 믿음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니골라 당은 이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이후로 육체적 죄는 정죄의 대상에서 제외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죄의식조차도 느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의로운 상태에 들어갔으므로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말하는 거 같지만 사실은 자신들의 육체적 욕망을 채우려고 하는 발람의 교훈과 같은 것인 것입니다.

니골라가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 중에 한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믿음이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자기 욕망과 탐심은 하나님의 자리를 늘 노리고 있습니다. 자기 합리화의 덫에 빠져 욕망과 탐심에 자신의 마음의 자리를 내어주게 되면, 그 때부터 영적인 눈이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마음의 왕좌에는 하나님이 아닌 욕망과 탐심이 앉아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니골라 당의 교훈이라는 것은 바로 그런 잘못된 믿음을 가리킵니다.

우리 집에서 자녀들과 함께 보는 TV 프로 중에 『백종원의 골목식당』이란 것이 있습니다. 그 프로가 배울 점이 참 많습니다. 지난 주간에는 1년 전에 솔루션 했던 가게들은 다시 찾아다니며 긴급점검해 주는 내용이었습니다.

지난 1년 동안 솔루션 받은 대로 철저하게 가게를 운영한 사장님들은 가게도 성공적으로 잘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가게들은 방송으로 유명세를 타 잘 나가다가 도리어 그게 독이 되어서 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백대표가 점검을 해 보니 문제는 하나같이 동일했습니다. 배운 대로, 솔루션 받은 그대로 안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방송에 영향을 받아 가만있어도 손님들이 몰려오니 그렇게 애쓰고 힘들게 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식업에 있어서 가장 예민한 것이 ‘맛’인데, 사람의 입맛은 기가 막히게 그걸 잘 아는 겁니다. 음식 맛이 변한 것을 가장 빨리 느끼는 것은 손님들의 입맛이었습니다. 주인장이 뭔가 원칙을 어긴 겁니다. 재료를 나쁜 걸 쓴 겁니다. 힘드니깐 어떤 부분은 타협하기 시작한 겁니다. 결국 그런 가게들은 불과 1년 만에 위기를 맞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무엇을 가득 채웠는지, 무엇을 갖고 둘 사이에서 타협하고 있는지를 가장 빨리 아시는 분은 우리의 영혼을 지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믿음의 길을 가야 하는데, 돈 때문에 가지 못하고 있나요? 세상적인 욕심이 내 안에 더 커져버린 것은 아닙니까?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데 우리 안에 욕망이 나를 가로 막고 있습니까? 발람의 교훈, 니골라 당의 교훈에 치우쳐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버가모 교회에 자신을 소개하실 때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12절)”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16절에서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날선 검을 가지신 주께서 내 길을 막으실 것입니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그 날선 검은 나를 향한 심판의 칼이 될 것입니다. 믿음에 타협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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