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이드1

“결핍과 풍요”

<요한계시록 3:14~22>

– 이 시대의 교회들에게(7) –

 

 

[Audio 말씀]

 

예루살렘에 있는 히브리대학 역사학 교수인 ‘유발 노아 하라리(Yuval Noah Harari, 1976~)’가 『사피엔스(김영사)』라는 책에서 인류가 어떻게 발전해 왔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신석기 시대 전까지 인류는 수렵과 채집을 위주로 생활해 왔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배고프면 들과 산으로 나가서 과일을 따오기도 하고, 사냥을 통해 먹을 것을 구해왔습니다. 그러다 쉬고 싶고 놀고 싶으면 언제든 그렇게 했고, 어디에 얽매이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신석기 시대에 들어서면서 도구를 만들어 농사라는 것을 짓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유발 우라리 교수는 ‘농업혁명’이라고 했는데, 그는 농업혁명을 ‘역사상 최악의 사기’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그 때 그 때 먹을 것을 구해오는 수렵과 채집 생활보다 좀 더 안정적이고, 풍요로운 먹거리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는데, 씨를 뿌리면 100배 이상씩 거둬들이니 먹거리의 엄청난 혁명이 일어난 겁니다.

그런데 우라리 교수는 ‘원시사회의 수렵 채집인들은 다양하고 자유로우며 활기차게 시간을 보냈는데, 농업혁명 이후로 농부들은 거의 밀(곡식)의 노예가 되어 살아왔다’는 겁니다. 농사를 지으려니 사람과 가축이 많이 필요했고, 그래서 인구가 증가했고, 가축들이 인간들과 함께 살다보니 소, 닭, 돼지와 같은 것들로부터 전염병이 시작되기도 하고, 많은 가족을 먹여 살리려니 농업혁명은 일어났어도 식량은 늘 부족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들은 하루도 쉴 수 없이 더 많은 노동을 해야 했고, 질병과 전염병, 영양실조와 힘겨운 싸움을 하며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라리 교수는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가 밀을 길들인 것이 아니다. 밀이 우리를 길들였다.”

 

세계 역사를 돌아볼 때 우리는 역사상 그 어떤 때보다 물질적인 풍요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오래 전부터 부자는 ‘잘 산다’라고 말하고, 가난하면 ‘못 산다’라고 말하는 것이 공식화 되어 있습니다. 부자여도 행복하지도 않고 못 살 수도 있는데, 사람들은 부자는 잘 살고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깐 물질적으로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이 행복의 기준이 되어 버렸습니다. 밀(곡식)이 우리를 길들이고, 돈과 같은 물질적 풍요가 우리를 그렇게 길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물질적으로 풍요로우면 편리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부자는 늘 마음이 평안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편리한 게 평안한 것은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교회들이 늘 마음에 새기고 있어야 할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늘 『이 시대의 교회들에게』 일곱 번째 시간입니다.

 

1. 풍요는 눈을 멀게 한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에 오늘 마지막 일곱 번째 ‘라오디게아 교회’는 매우 풍요로운 라오디게아 지역에 있었던 부유한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과거 하나님께 많은 물질적인 축복을 받았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많은 것들을 갖고 있었습니다. 많은 재능들, 큰 능력들도 있고, 학력이 좋은 사람들도 있고, 교인 중에 좋은 직업을 갖고 있으며, 상당한 부자들도 있었고, 그 지역의 유지들도 꽤 많았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그들의 교회 건물은 크고 화려했고, 웅장했습니다. 그 지역에서 자랑할 만한 건축물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외적으로 부족한 게 없었습니다.

 

17절 상반절을 보시면,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그들 스스로도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풍요로운 것, 부자가 되는 것은 결코 나쁜 게 아닙니다. 성경에도 믿음의 사람들이 형통하게 되고, 100배의 축복을 받고, 그 수가 많아지는 것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 중에 하나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재물 얻을 능력도 주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돈이 나쁜 게 아니고 돈을 잘못 쓰면 그 돈이 나쁘게 보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재물과 풍요로움을 주셨다면 그 이후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면서 오늘날의 한국교회가 계속 떠올랐습니다. 1885년 언더우드 선교사님과 아펜셀러 선교사님이 조선 최초의 선교사로 들어왔을 때, 우리는 정말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그 뒤 일제시대를 거쳐 한국전쟁을 치러 전쟁의 잿더미 위였던 70년 뒤에도 우리는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필리핀보다도 가난하고, 북한보다도 가난한 정말 불쌍한 나라였습니다.

 

 

1968년 일본의 노무라 모토유키(野村基之, 1931) 목사님이 한국에 처음 방문해서 보니 거리에 거지와 고아와 빈민이 너무 많은 겁니다. 청계천 주변에는 판자 집이 즐비했고(필리핀의 지금 빈민가를 보는 듯합니다), 수십 가구 당 한 개의 재래식 변소를 공동으로 사용했습니다. 한국의 빈민들이 너무 불쌍해서 노무라 목사님이 70년 중반까지 청계천을 중심으로 구호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그 때 찍은 사진 826장을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을 했는데 이 사진들은 당시의 실상을 엿볼 수 있는 귀한 자료로 남아 있습니다.

이 사진 중 하나는 노무라 목사님이 청계천 활빈교회에 갔었을 때, 어떤 엄마가 아기를 등에 업고 마루 바닥에 꿇어 앉으셔서 눈물로 통곡하며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카메라 셔터를 누른 것입니다. 그 옆에 엄마를 따라온 네 다섯 살 되어 보이는 어린 딸의 모습도 보입니다. 어떤 기록에 보니 등에 업힌 저 아기가 나중에 선교사가 되어 요르단 지역에서 사역하고 계시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이 기도하는 어머니 사진을 자신의 블로그에 포스팅 하면서 이렇게 쓰시기도 하셨습니다.

“어머닌 유난히 저를 데리고 다니신 거 같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어머니랑 함께 다녔습니다. 어릴 적에는 그게 그렇게 싫었는데… 이제 생각하면 그것이 그렇게 감사한 제목들입니다. 늘 저렇게 기도하는 어머니가 계셨기에 이 나라가 살고, 제가 살았습니다. 감사해요. 어머니…”

– (출처 : http://allahmaai.egloos.com/6910359)

 

찢어지게 가난하던 시절을 살던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간절한 눈물 기도가 오늘 날의 한국교회와 대한민국을 세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세계 열방에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할 만한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겐 저런 눈물이 메마른 거 같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아무리 힘들다 힘들다 해도 여기 필리핀 서민들보다 열배는 부유하고, 깨끗한 집에서, 좋은 환경에서 살고, 대한민국의 좋은 복지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실직을 하면 실업급여가 나오고, 코로나 전염병에 걸리면 국가에서 무료로 치료해 주고(심지어 외국인까지도…), 생계가 어려우면 나라에서 140만원이 넘는 생계비도 매달마다 지원해 주고(4인 가족 기준), 청년들이 일자리가 없으면 무료로 각종 기술도 교육해 해주는 세계 10대 경제대국 중의 하나입니다.

이젠 교회에서, 성도들의 기도 속에서 과거의 그런 간절함과 절박함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막말로 하나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시면, 우리나라 정부가 그래도 죽지는 않게 책임져 주니깐 그렇게 통곡하며 부르짖을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물질과 풍요가 절대 나쁜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물질로부터 얻게 되는 안정감이 있으니 더 이상 하나님을 찾지 않게 되고, 하나님을 바라보지도 않게 되는 것입니다.

 

17절 말씀을 다시 보시면,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부자라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주님께서는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그들의 실상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당시 가난한 사람들의 특징을 나열하고 있으신 것입니다. 특히 시력장애자들은 구걸 외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기에 가난한 이들을 상징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스스로 부자라 하고 있는 라오디게아 성도들이 눈이 멀었다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풍요는 영적인 눈을 멀게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사람들은 눈에 보여 지는 물질적 풍요가 있으면 거기서 안정감을 얻습니다. 그걸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이젠 이 정도 돈이 있으니 괜찮다는 겁니다. 그래서 육신의 눈에 보이는 물질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가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바라보지도, 기대하지도, 그 분께 기도하지도, 그 분을 찾지도, 구하지도 않게 되는 것입니다. 돈으로 하면 되는데 굳이 하나님을 찾을 필요가 없는 겁니다. 풍요가 눈을 멀게 하는 겁니다.

 

15절 말씀에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절에서도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라오디게아 성도들의 믿음은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상태입니다. 주님께서는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닌 형편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그들을 토할 것 같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우리의 믿음이 식어져 하나님을 안 믿는 것도 아니고, 믿는 것도 아닌 그런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무엇이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의 안정감은 어디에서 찾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믿음은 지금 어디에 위치해 있습니까?

지금 코로나19로 인하여 우리의 삶은 모든 게 멈춰버렸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죽음의 바이러스에 감염될지 몰라 두려운 마음도 있습니다. 세계 최강대국이라고 떵떵거렸던 나라라 할지라도 4백60만 명 이상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돈이 아닙니다. 권력이 아닙니다. 풍요 속에서 가려진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매일 매일 우리에게 호흡과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2. 결핍은 눈을 뜨게 한다

풍요는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주고, 누리게 하여 우리를 더 좋게 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우리의 영적인 눈이 감기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과 능력과 부요함을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이루어가는 데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돈도 나쁜 게 아니고, 성공과 풍요도 결코 나쁜 게 아닙니다.

다만 오늘 설교 서론에서 유발 하라리 교수의 말과 같이 우리가 밀(곡식)을 길들여야지 밀에 의해 길들여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물질을 길들여야지 우리가 물질에 의해 길들여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초인적 능력을 갖고 있었던 사사 삼손이 정욕 때문에 함정에 빠져 능력의 근원인 머리카락이 다 잘려 힘을 잃어버리고, 두 눈이 뽑힌 채로 소처럼 연자 맷돌을 돌리고 있는 비참한 지경으로 떨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날 우리 사회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라가 있는 정치인들, 경제인들, 교육과 문화 예술인들 심지어 성직자들에 이르기까지 삼손이 두 눈이 뽑힌 것처럼 한 순간에 수치와 조롱 속에 몰락하는 모습을 우리는 종종 지켜보고 있습니다. ‘아니, 저런 신분의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 있지?…’하고 의아해 하지만, 그것은 풍요 속에 어느 순간 눈이 가리어져 버린 것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제대로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판단력도 흐려지는 것입니다. 그리곤 어느 날 갑자기 패망하는 겁니다.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바울 사도가 철학의 도시인 아덴(아테네)에 갔을 때 그곳에서 에피쿠로스 학파의 철학자들과 토론과 논쟁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들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Epicurus, BC.341~BC.271)의 가르침을 따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에피쿠로스가 일반적인 진리 중에 하나라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말을 하나 했습니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욕망으로 가지고 있는 것을 망치지 마라. 지금 가진 것이 한 때는 간절히 바라던 것이었음을 기억하라.”

 

간절히 바라던 것을 가져서 그렇게 좋아라 했던 적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 다른데 눈을 돌리고 있는 겁니다. 결국 그 욕망 때문에 인생을 망치는 경우가 많은 겁니다. 욕망에 눈이 멀어 버린 것입니다. 물질에 길들여지고 있는 겁니다.

풍요의 종이 되지 마십시오. 풍요를 길들일 줄 아셔야 합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제대로 사용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와 같이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참조. 빌4:11,12). 물질에 의해 끌려 다니는 인생이 아니라, 물질을 종처럼 부리고 움직일 수 있는 인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18절 말씀을 보시면,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이 세상의 물질과 풍요는 우리의 눈을 멀게 하지만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성결하고 깨끗한 진정한 부요함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부끄러운 수치를 가려주실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영적인 눈을 뜨라는 것입니다.

내가 부자라 부족한 것이 없다 라고 하고 있으면 영적인 눈은 계속 감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나는 주님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연약합니다. 나를 붙잡아 주소서. 나를 구원하여 주소서…’ 이런 가난한 심령은 주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5장 3절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마태복음 5장 8절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가난한 심령, 깨끗한 심령이 주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영적 결핍이 영적인 눈을 뜨게 하는 것입니다.

지난 7월 13일부터 우리가 온라인 기도회를 계속 진행하고 있습니다. 매일 아침 9시부터 30분간 진행되는데, 이 시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 모릅니다. 처음에는 온라인으로 진행하니 어색하고, 막상 시작하려니 마음 저 구석 어디에서는 ‘성도들이 얼마나 참여할까? 괜히 어색하고 이상하지는 않을까? 성도들에게 은혜는 될까? 혹여 참여율이 떨어져 안 하니만 못할까?…’ 이런 부정적인 마음에 살짝 마음이 흔들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비관적인 마음들은 제 믿음이 작아서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기도회 시작 시간인 아침 9시가 되기를 기다렸다가 한국과 필리핀에서 동참하는 성도님들이 적잖게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노트북 앞에서, 스마트 폰을 들고 혼자 찬양을 하는데 눈물이 그렇게 나는 겁니다. 성도들이 올리는 기도문 하나하나에 감동이 되고 은혜가 임하고, 그 기도에 ‘아멘’이 절로 나오는 겁니다.

며칠 전 기도 중에 아마도 저와 같이 깊은 은혜를 경험하고 계시는 집사님 한 분이 계셨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사님이 짧은 기도문을 하나 올리셨는데, 그것이 제게 큰 은혜로 다가왔습니다. 이렇게 기도하셨어요.

 

“사실 그 동안 감사를 찾지 못했던 날이 길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내 하나님 이신 것에 감사합니다.”

 

집사님이 기도회를 하면서 영적인 눈이 뜨게 되신 것입니다. 코로나가 아니면 지금 여기저기를 다니며 일하고 사람들 만나고, 돈 버느라 얼마나 바쁘겠습니까? 그러나 코로나로 앞뒤가 꽉 막힌 상황이지만, 지난 3주간 기도회를 하며 마음이 청결해 지기 시작하니깐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신 것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동안 감사치 않고 살았던 지난날들이 회개되어지는 것입니다. 결핍은 우리의 눈을 뜨게 합니다.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서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에게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이제 마음의 문을 열라는 것입니다. 그 문을 열기만 하면 주님과 동거 동락하는 놀랍고 풍요로운 영적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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