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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실력을 키워라”

<고린도후서 :7~10>

 

 

[Audio 말씀]

 

 

중학교에 올라가자마자 생물시간에 배우는 것 중에 하나가 진화론에 관한 내용일 겁니다. 신앙을 갖은 이후부터는 창조론을 믿고 있지만, 예수님을 아직 몰랐을 때는 그게 정말인 줄 알았습니다.

어쨌든 진화론에서 주장하기는 원숭이나 유인원에서부터 인간이 진화하게 되어 현생인류의 최종적인 진화를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고 하는데, 라틴어로 ‘지혜로운 인간’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최근엔 ‘포노 사피엔스(Phono Sapiens)’라는 인류가 새롭게 생겼다고 합니다. 2015년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에 게제 된 표현입니다. 라틴어로 포노(Phono)는 전화기라는 뜻이고, 요즘 스마트폰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IT기기이고, 전화기 이름 자체가 ‘스마트(똑똑하다) 폰’입니다. 그래서 포노 사피엔스는 ‘똑똑한 전화, 지혜가 있는 폰을 쓰는 인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포노 사피엔스 문명의 특징은 ‘비대면 : 언컨텍트(Un-contact)’사회라는 것입니다. 코로나19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언컨텍트가 일상화되었지만, 사실 코로나 이전부터 언컨텍트는 이미 지구를 지배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2019년 1월, 영국 [브랜드 파이낸스]가 [2019 글로벌 기업 브랜드 가치 순위]를 발표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삼성전자가 5위에 올라있기도 하는데, 1위부터 10위까지 보면 1위(아마존), 2위(애플), 3위(구글), 4위(마이크로 소프트), 5위(삼성), 6위(AT&T), 7위(페이스북), 8위(중국공상은행), 9위(버라이즌), 10위(중국건설은행)이 랭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의 두 개 은행만 제외하면 나머지 8개는 공통점이 있는데, 모두 IT기업이라는 것입니다. 일찌감치 언컨텍트(비대면)에 집중했던 회사들이 세계 기업 브랜드 Top-Ten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세계를 이끌어 가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미 코로나 이전에 언컨텍트 사회 변화에 대한 징조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목회데이터연구소] 지용근 대표가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이 있었는데, 제목이 ‘통계로 보는 코로나19 전후 한국사회와 교회의 변화’라는 제목이었습니다. 이번 코로나에 있어 어쩌면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곳은 교회일 것입니다. 몇몇 잘못된 교회들의 비상식적 행태들로 인해서 한국교회는 지탄의 대상이 되었고, 우리 개신교의 이미지는 매우 나쁘게 되었습니다. 또한 복음의 문은 많이 좁아지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교회들은 비대면예배(온라인예배)를 통해서 예배를 이어갔지만, 코로나 사태이후 각 교회들은 성도들의 예배출석의 급격한 감소, 헌금감소, 공동체적 소속감 약화 그리고 코로나가 종식되더라도 지금의 이 상황이 그 전과 같이 회복될 것이 쉽지 않을 거 같다는 부정적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대분분의 교민들이 철수한 우리 필리핀의 한인교회들의 상황은 지금 말할 것도 없는 상황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강연의 마지막을 이런 말로 마쳤습니다.

 

 

“위기가 지나가면 실력이 드러난다”

 

분명 한국교회는 큰 위기를 맞고 있고, 교회뿐만 아니라 많은 성도님들의 가정과 생업 그리고 인생에도 큰 위기가 왔습니다. 그런데 뜨거운 불과 같은 시련이 왔을 때, 짚으로 지은 집은 금세 타버려 없어지겠지만, 단단한 벽돌로 지은 집은 비록 그을음의 흔적은 있어도 뜨거운 불을 견뎌낸 기둥과 벽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입니다.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는 지금은 누구에게나 위기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위기가 지나가면 진짜 실력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실력이 없으면 위기를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위기 앞에서도 영적 실력이 있는 이들은 그 위기를 견뎌낼 뿐만 아니라, 그 위기를 통해 더 크게 성장해 나가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누구에게나 있을 위기를 위해 우리는 영적 실력을 키워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실력을 잘 키운 이들은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고, 사방으로 우리를 압박하는 상황 속에서도 세상이 감당치 못할 능력의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1. 내면의 강자가 되어라

겉으로 보여 지는 외적인 모습이 크고 강한 사람이 있으면 그런 분은 보기에도 왠지 든든하게 느껴지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육체는 마음의 의해 지배를 받게 되어 있고, 그 마음은 영혼에 의해 지배를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힘과 능력은 겉모습이 아니라 내면의 상태에 따라 달라지 게 되어 있습니다. 내면의 강자가 진짜 강자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7절 말씀을 보시면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흙을 빚어 만든 질그릇이라는 것은 쉽게 깨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씀하시는 이 질그릇은 값싼 싸구려 그릇을 말합니다. 남들이 보기에 보잘 것 없는 그런 그릇인 것입니다. 잘난 게 없어 보입니다. 가난할 수도 있고, 많이 못 배웠을 수도 있고, 키가 크거나 외모가 잘나지도 않았습니다. 여러 가지 탁월한 능력과 실력이 없을 수도 있고,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무엇이 없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의 진짜 가치는 겉으로 들어나는 모습보다는 그 사람의 내면이 어떠한가? 마음이 어떠한가? 마음 씀씀이가 어떠한가? 성품이 어떠한가? 무엇에 큰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가? 그 사람의 내면에는 무엇이 있는가? 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질그릇처럼 보잘 것 없어 보이나 우리 안에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면 얘기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싸구려 그릇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 보배가 담겨있다면 그 때부터 더 이상 싸구려 그릇이 아닌 것입니다. 아무리 실력도 없고, 힘도, 능력도 없다 할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면, 그 때부터 우리는 더 이상 약하지도 않고, 무능력하지도 않게 되는 것입니다.

차라리 우리가 연약하여 자주 넘어지고, 무능력해서 실패했고, 실력이 없어서 다시 재기할 힘이 없다면 오히려 잘 됐습니다. 왜냐하면 지금부터 내게 일어나는 놀라운 일들은 내 힘과 능력이 아닌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하셨습니다. 우리는 약해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내면의 강자가 되고, 믿음의 강자가 되고, 영적 강자가 되면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힘입기 때문에 또 다시 일어나고, 또 다시 도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1970년대 무하마드 알리, 조지 포먼 등과 함께 당대 최고의 복서로 이름을 날린 ‘조 프레이저(Joseph William “Joe” Frazier, 1944~2011)’라는 사람은 무하마드 알리를 이긴 최초의 선수였습니다. 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챔피언은 링에서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링에서 인정받을 뿐이다”

진정한 챔피언이 어느 날 갑자기 링 위에서 태어나는 게 아니라 평소에 챔피언이 될 만큼 꾸준히 훈련하고 연습했던 복서가 비로소 링 위에서 챔피언으로 인정받게 되는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과거 여기저기 유명한 교회들도 출석하고, 훌륭한 목사님들 밑에서 신앙생활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아는 게 많고, 많은 경험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믿음이 좋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 교회생활을 흉내만 내던 사람은 진짜 시험 앞에서 얼마나 무기력하게 무너져 내리는지 모릅니다. ‘저 분이 믿음이 있었나?’ 할 정도로 시험의 작은 산조차도 못 넘으시는 겁니다. 교회 다닌 연수가 오래되었는데 믿음생활을 꾸준하게 제대로 하지 않았다면, 어느 날 그에게 찾아온 시험 앞에서 깨지고 부서지고 형편없이 그 믿음과 인생이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과 순종 그리고 기도로 믿음의 실력과 영적 체력을 키워온 사람은 큰 시험의 파도가 와도 그걸 돌파해낼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문제들과 시험의 링이라는 곳에서 우리 믿음의 진짜 실력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믿음의 강자가 되십시오. 내면의 강자가 되십시오. 영적 실력을 키우십시오. 영적 체력을 기르십시오. 믿음의 근력과 체력이 길러지면 어떠한 시련이 와도 감당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2. 부활의 능력으로 살라

영적 실력을 키우는데 있어서 가져야 할 두 번째 마음은 ‘부활의 능력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8절을 보시면,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영어 성경에서 ‘우겨쌈’은 ‘hard press(엄청난 압박)’로 되어 있고, ‘싸이지 아니하며’라는 표현은 ‘crush(깨지다)’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다 이런 일을 겪을 수 있습니다. 사방으로 엄청난 압박이 있습니다. 재정적인 압박과 인간관계에서 오는 압박, 미래에 대한 불안과 염려들, 큰 병을 앓고 있는 분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밤잠을 설치기도 할 것입니다. 해결할 방법이 없고,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때가 있습니다. 정말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는 것 같은 엄청난 압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코로나19가 처음 시작될 때만해도 예전에 메르스나 사스처럼 한두 달 일어났다가 사그라질 줄 알았습니다. 그 때는 그런 전염병이 우리와 크게 관계가 없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코로나19는 쉽게 끝나지도 않았고,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퍼졌고, 개인과 나라와 세계를 마비시켜 버렸습니다.

직장을 잃은 사람도 많고, 개점 폐업 상태인 경우도 많고, 우리나라 소상공인 중 70%는 폐업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 해의 절반을 그냥 손을 놓고 상황이 좋아지기만을 바라보고 있는 무기력한 삶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쉽게 좋아질 거 같지는 않은 비관적인 마음이 불쑥불쑥 올라오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이 8절의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는 상황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할지라도 깨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앞이 보이지 않고, 미래가 암담하고, 억울하고 힘든 상황과 같은 답답한 일을 당할지라도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9절을 보시면,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심지어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않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 일행이 복음을 전하다가 어떤 고난을 받았었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고린도후서 1장에서 말한 바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8절과 9절을 보시면,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박해와 거꾸러뜨림뿐만 아니라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받았는데, 살 소망까지 끊어졌던 상황도 있어 그들은 ‘이젠 죽었구나…’하면서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 1장 10절에서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주님께서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매장까지 되었다는 것은 이제 다 끝났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주 예수님께서 그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능력을 믿는 부활의 신앙인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희망이 없다. 다 끝났다. 나는 실패자다.…’라고 하지만, 부활의 믿음은 그런 이들도 다시 살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0절 말씀을 보시면,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졌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을 성경학자들은 ‘예수를 따르는 성도로서 진정한 신앙적 삶을 지켜나가고자 할 때 예수의 죽음과 같은 고난의 과정이 계속해서 반복된다는 의미’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길을 가다보면 시련과 고난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시험과 고난이 있었습니다. 주 예수님께도 고난과 십자가가 있었는데, 우리라고 없겠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그런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만, 3일 만에 다시 부활하셨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의 죽음과 같은 것을 몸에 짊어졌지만, 예수의 생명 곧 부활의 능력이 우리의 육체와 인생 속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6장 9절을 보시면,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지난주에 ‘크리스천의 역설(逆說)’이란 제목을 갖고 하나님의 말씀을 나눴었는데, 여기에 또 그 역설적인 바울 사도의 고백이 나옵니다. 전도자들은 세상에서는 크게 유명해져서 높은 지위에 앉아 많은 부와 귀를 누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했다.’라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 10절도 보시면,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인 것입니다. 많은 근심 속에 살만한 상황인데 항상 기뻐해요. 많은 재산을 갖고 있는 게 아닌데 어쩌면 가난할 수도 있는데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겁니다.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 사람인데 실상은 모든 것을 갖고 있는 세상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은혜 영성의 파워』를 비롯한 많은 책을 저술한 ‘스티브 멕베이(Steve McVey)’라는 목사님이 그 책에서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쓰신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깨어짐의 쓰라린 과정을 겪었다. ‘깨어짐’이란 자신의 능력에 대한 모든 소망을 포기한 상태를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고난 받는 것을 원하시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깨어짐의 쓰라린 과정이 필요할 때는 잠시 도움의 손을 거두시기도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깨어짐을 통해 더 이상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진정한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을 고린도후서 1장 9절에서 사도바울은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우리는 지금 쓰라린 깨어짐의 과정을 겪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앞뒤가 다 막혔고, 반년이 넘도록 우리의 힘과 지식과 경험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지금이 아무리 최악의 상황이라 할지라도,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은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다시 일으키시고, 부활시키셔서 재기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의 실력을 키우고, 영적 실력을 키워 모든 시련과 시험을 넉넉히 이기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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