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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 속에서도”

<창세기 39:1~3> 

 

 

[Audio 말씀]

언젠가 EBS(교육방송)에서 ‘글로벌 아빠 찾아 삼만리’라는 이주 노동자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본적이 있었습니다. 이 부부가 나이 서른 살에 필리핀에 어린 3남매를 두고 한국에 가서 8년 동안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 사이 큰딸이 열여덟 살이 되었는데, 평일에는 식당에서 일하고, 주말에는 한국인 여행객들을 대상으로 한 가이드의 보조를 하며 꿋꿋하게 동생들을 돌보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큰딸은 어떻게든 동생들에게 부모님의 빈자리를 채워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두 살 어린 남동생은 한참 사춘기를 보내고 있었는데 계속 엇나가는 것 같은 겁니다. 제작진이 남동생의 인터뷰를 했는데, 이 아이가 ‘가끔은 부모님이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라고 말을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한참 손이 많이 가는 여덟 살부터 열여섯 살이 될 때까지 부모님이 돈 벌러 한국에 가셔서 벌서 8년이 흘렀던 것입니다. 부모님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니깐 이렇게 자신을 버려두고 떠났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하지만 정작 아빠는 암투병을 해 가면서까지도 자녀들의 미래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다가 어느 날 갑작스럽게 찾아온 시련이 감당하기 어려우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나? 나를 버리셨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이렇게 1년 가까이 코로나로 인해 우리 성도들이 뿔뿔히 흩어지고, 이 땅에 남아있는 소수의 성도들 조차 모이기가 어려운 상황이 지속되고 있으니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왜 하나님은 우릴 돕지 않으시는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편 27편 10절에서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이사야 49장 15절에서는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이 부모의 사랑일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매정한 부모의 경우 자식을 버리기도 하고, 젖 먹는 자식을 잊기도 할 수 있겠지만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우리를 결코 버리지도, 떠나지도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1. 시련 속에도 함께 하신다

갑작스럽게 큰 시련을 만나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기도 하고,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거나 떠나신 것 같은 그 순간에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은 나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은 형들의 시기를 받아 애굽에 노예로 팔려 갑니다. 이때 요셉의 나이가 열일곱 살이었습니다.

 

창세기 39장 2절 말씀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요셉은 아버지 야곱에게 가장 사랑받는 아들이었습니다. 형들의 시기를 살 만큼 아버지 야곱의 편애는 컸고, 요셉은 형들에게는 미움을 받았지만 아버지에게는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벌어졌습니다. 형들의 요셉을 향한 미움은 요셉을 죽이고 싶은 만큼 타올랐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살해당하는 것 만큼은 피했지만 노예 상인들에 의해 애굽의 왕궁 경호 대장의 집에 노예로 팔렸습니다.

당시 고대사회에서 노예는 돈 몇 푼에 사고 팔 수 있는 가축과 별다름이 없는 신분이었습니다. 주인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 죽일 수도 있는 가장 밑바닥 인생이었습니다. 가장 사랑받던 아들이었던 요셉은 가장 비참한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 타이밍이 요셉이 열일곱 살의 나이에 하나님께서 주신 놀라운 꿈과 비전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던 것입니다. 차라리 인생이 힘들고 어려워서 어디로 도방가고 싶거나,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할만큼 인생이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그 충격은 좀 덜했을 것입니다.

제가 열아홉 살에 예수님을 믿게 되고 몇 달간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매일 교회를 가고 싶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찬송을 부르고, 버스를 타던 전철을 타던 늘 성경을 읽고, 교회에서 밤을 새며 기도하다가 교회 바닥에서 쪽잠을 자다가 아침 일찍 학교 가는 생활이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습니다. 걸을 때에 든지, 차를 타고 이동 할 때에 든지 늘 입으로 찬송을 흥얼거리며 생활했었습니다.

그렇게 4~5개월 지나면서부터 몸에 이상이 생겼고, 돈이 없어 병원에 가서 진찰받을 엄두도 못 내며 병을 점점 키워 나중에는 숨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할 정도까지 되어버렸습니다. 정말 죽기 직전 병원에 가서 검사해 보니 한쪽 폐는 더 이상 기능을 하지 못했고, 어쩔 수 없이 당장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그 때 병실 침대에 누우며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거예요?”

이제 예수 믿은지 몇 개월밖에 안 된 햇병아리 신자였던 저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 믿기로 하고, 그것도 제 마음과 중심을 다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저에게 그런 시련이 왜 왔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초신자였던 저는 하나님 믿으면 좋은 일만 생겨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저는 영적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2절에서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믿음의 형제들에게도 여러 가지 시험들이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6절에서는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성도들이 근심과 걱정에 빠질만한 여러 가지 시험들이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역시 크게 기뻐할 수 있게 된다는 말씀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45절 말씀에
“…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하나님께서 해와 비를 의인과 악인에게 동일하게 내려주시는 것과 같이 믿음의 사람들인 우리의 인생 속에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임마누엘로서 성육신하신 것은 우리의 질고를 대신 지시고자 함이었습니다. 우리가 죄와 질병과 인생의 여러 가지 문제들로 고통 받고 있는 모습을 구경만 하지 않으시고, 친히 이 땅에 오셔서 그 수고하고 무거운 짐들을 함께 짊어지신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노예라고 하는 비참한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졌지만, 오늘 본문 2절에서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2절 뿐만 아니라 이 창세기 39장에서는 여러 차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39장은 요셉이 노예로 팔려 와서 고생하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 그의 20대 시절 내내 큰 고통과 시련 속에 있었을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시련 속에서도 함께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멀리 떠나거나,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저 역시도 예수 믿자마자 얼마 되지 않아 찾아온 질병이라는 큰 시련은 제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만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몸은 비록 병들었고, 앞이 막막했었지만 제 안에는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과 감사가 넘쳐흘렀던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2장 11절에선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시련이든, 연단이든, 고난이든 그리고 그것이 징계라 할 지라도 당시에는 너무 힘들고 슬픈 것이지만 그것으로 연단 받은 자들에게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의사이자 저술가인 ‘사무엘 스마일스(Samuel Smiles, 1812~1904)’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을 한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이 유명한 말은 그의 책 『자조론(Self-Help)』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던 수백 명의 사람들을 연구한 끝에 이렇게 말합니다.
‘과학과 예술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긴 사람은 반드시 대학에 다니거나, 박물관 등의 편의를 본 사람이 아니며, 위대한 발명가가 반드시 기계학을 전문적으로 가르쳐 주는 학교에서 배운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곤 이렇게 말합니다.
“발명의 모체는 편의보다 곤궁이었으며, 인재를 가장 많이 배출한 곳은 ‘고난’이라는 학교였다.”

지금 우리 민족은 한국전쟁 이후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합니다. 코로나 팬데믹은 우리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전염병 감염에 대한 불안 속에서 살아야 하고, 직장을 잃고, 사업장 문을 닫고, 재정적인 압박을 받아야 하고, 미래에 대한 불안정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을 ‘재앙’이라고 말씀하는데, 우리는 지금 기근과 전염병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으니 큰 재앙의 한 가운데 있는 것과 같습니다.

나만 힘든 건 아니고, 모두가 힘들고 어렵다고는 하지만 우리 각 개인이 져야 할 짐은 더 무겁고 힘들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확신합니다. 이 고난의 학교를 잘 수료한 사람들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축복의 간증자가 될 것입니다. 이 시련 속에서 가장 많은 믿음의 인재들이 등장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셉의 시련 속에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그를 위대하게 쓰셨던 것처럼, 그 주님께서 우리의 시련 속에서도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2. 시련 속에 형통케 하신다

사무엘 스마일스의 말과 같이 하나님 나라의 인재는 고난의 학교에서 만들어집니다. 성경 인물 중에 위대하게 쓰임 받은 인물의 역사를 살펴보면 고난과 시련을 겪지 않은 인물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때문에 ‘고난은 감춰진 축복이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고난과 시련 속에 있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나의 시련 속에 여전히 함께하고 계시다면, 이 시련 속에서도 형통케 하시는 것입니다.

 

3절 말씀을 보시면,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노예로 팔려 온 건 ‘인생이 형통하다’라고 말할 수 없을 겁니다. 사랑받는 아들의 신분에서 낯선 땅의 이방인 밑에서 종이 되었으니, 가장 불행한 인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2절에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계셨습니다. 다윗도 시편 23편 4절에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지금 가장 깊은 고난의 골짜기를 걷는다 할 지라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믿음이 있다면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면, 시련 속에서도 형통케 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주인이었던 보디발도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시면 잘 될 것입니다. 형통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증거가 우리에게 나타날 것입니다. 반드시 이 시련 속에서도 승리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2절과 3절에 나와 있는 ‘형통(亨通)’이란 말의 히브리어 단어의 뜻은

‘번성하다(prosper)’ 또는 ‘성공(success)’이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형통이란 말의 사전적인 뜻은
“온갖 일이 뜻대로 됨”

입니다. 그런데 ‘온갖 일들이 원하는 대로, 생각대로, 뜻대로 된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일까요?

전 세계적으로 수백만 부가 팔린 『최고 경영자 예수(CEO JESUS)』라는 책의 저자로 유명한 ‘로리 베스 존스(Laurie Beth Jones)’라는 분이 『주식회사 예수(JESUS, INC.)』라는 책도 썼는데,

이 책에서 로리 베스 존스는
“예수님의 성공에 대한 정의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는 것’이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성공(번영, 형통)이란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는 것’이 진정한 성공이며 형통이었던 것입니다. 형통이란 말의 사전적인 뜻은 ‘온갖 일이 뜻대로 된다’는 것이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뜻대로 되고 있는 것이 진정으로 형통한 자의 삶인 것입니다.

요셉이 노예로 팔려 가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혀 내일을 알 수 없는 젊은 날을 보내고 있었지만, 그 모든 과정 속에 그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진행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당장의 고난과 시련만 생각하면 해답을 찾을 수가 없고, 불평과 원망과 미움과 분노로 인생을 낭비하며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고난과 시련 속에 하나님의 뜻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온갖 일이 하나님의 뜻대로 되고 있는 것입니다. 내 인생에 하나님께서 개입하고 계신 것입니다. 요셉을 국무총리로 세워 세상을 구원하셨듯이 나를 통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한국에서 늦게 도착한 달력을 여기 남아 계신 교민들 중에 가게를 하시는 분들의 사업장을 돌며 나눠드렸습니다. 돌며 보니 많은 한국업체들이 문을 닫은 상태였습니다. 가게에 한국 분들이 계신 경우에는 잠시 얘기도 나눴는데, 힘들지 않은 분이 없는 거 같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특히나 마음이 아픈 경우는 있는 돈, 없는 돈 다 모아서 여기에 새롭게 사업장을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코로나가 터져서 어쩔 수 없이 쫓겨가듯이 한국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는 성도들을 생각하면 마음 한쪽 구석이 답답하고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노예 신분으로 전락하고, 감옥에 갇혀서 내일을 알 수 없는 상태였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숨 쉬고 있다면, 우리가 호흡하고 있다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앞부분에서 말씀드린 사무엘 스마일스의 ‘자조론’은 일본에 일찍이 소개되어 100만부 이상이 팔려, 일본이 경제 대국으로 가는 초석이 되는데 가장 큰 도움이 된 책으로 유명합니다. 그 책은 1871년 당시 영국에 유학 중이었던 ‘나카무라(中村正直)’라는 사람이 번역해 일본에 출판했던 것입니다.

 

그가 그 책에 이런 글을 써 놨습니다


“군대가 강하다고 해서 그 군대의 힘으로 나라가 평화롭게 되는가. 서양 여러 나라의 힘은 군대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힘은 하나님을 믿는 데서 온다”

 

우리의 힘은 돈과 환경과 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번 코로나를 통해 우리 인간의 힘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우리는 철저하게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힘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조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고,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기도 하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지만, 히브리서 11장 38절에서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 35절, 37절에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의 사랑에서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끊을 수 없고, 굴복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동행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시련 속에서도 여전히 함께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시련을 반드시 이겨낼 것입니다. 주님은 이 시련 속에서도 형통케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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