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
3 동서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4 그들이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5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
6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7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셨도다
8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9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150편에 이르는 시편은 총 다섯 권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오늘부터 살펴볼 [시편 107편]은 제5권이 시작하는 첫 번째 시편입니다. 일반적으로 이 시의 저술 배경을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게 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시’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흥왕과 쇠퇴와 몰락 그리고 그들의 귀환 등은 우리 인간 생활 속에서도 모양만 다르지 동일하게 나타나는 일들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개입과 은혜가 있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개입하시고 은혜를 베풀고 계시는 것입니다.
시편 1권, 2권의 경우는 대부분이 다윗의 시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시의 내용은 주로 ‘탄식시(애통시)’가 많습니다. 제5권의 44편 중에도 다윗의 시는 약 16개 정도 해당됩니다. 하지만, 제5권은 ‘찬양과 감사’에 초점이 많이 맞춰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시편 107편 1절을 보시면,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감사하며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2절과 3절을 보시면,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 동서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이스라엘은 B.C.586년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했고, 백성들은 바벨론 제국 전역에 뿔뿔이 흩어져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포로들이 한곳에 모여 있으면 ‘독립운동’ 같은 것을 하기 때문에 고대 식민정책은 그들이 뭉치지 못하도록 뿔뿔이 흩어놓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유케 하시고, 바벨론 제국의 동서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셔서 사모하던 예루살렘과 유대 땅으로의 귀환을 준비시키셨던 것입니다.
4절과 5절을 보시면, “그들이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 별다른 교통수단이 없던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 1,500km의 거리나 되던 바벨론에서 예루살렘까지 이동하려면 하루 이틀에 끝나는 여정이 아니었습니다. 길은 험난한 광야 길이었고, 어린아이들 이나 여성들, 노인들도 있었고, 중간 중간 들짐승들과 도적떼의 습격을 견뎌내며 약 4개월에 걸쳐 이동해야 했습니다. 이 4절과 5절은 그 험난한 여정을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이후 겪었던 광야 생활과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던 유대인들의 험난한 광야는 마치 우리 인생과 맞닿아 있습니다. 광야에는 더위와 추위와 목마름과 배고픔 그리고 들짐승의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평생 이런 어려움들을 지나가야 합니다. 그런 데 귀환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시련과 위기를 어떻 게 극복해 나갔는지를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6절을 보시면,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그들의 광야 여정에 종종 찾아온 시련과 고난 중에 그들은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건지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시련과 고통이 찾아왔을 때 근심과 절망 속에 앉아 있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시고 있 습니다.
똑같은 시련과 고난을 겪더라도 ‘기도로 시련을 맞서는 사람’과 ‘맨몸으로 그 시련과 고난을 당하는 사람’은 고난 기간의 마음의 상태가 다르고, 고난 이후의 결과물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큰 시련과 고난을 맞아 인생의 광야에 들어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맨 몸으로 그시련을 맞는 분들은 견딜 수 없는 큰 고통을 경험하게 될겁니다. 하지만, 근심과 걱정이 내 마음을 누를 때, 그 모든 문제를 갖고 주님 앞에 나아가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아 주십니다. 그리고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을 보여주시고, 나를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시편 107편 28~30절을 보시면, “이에 그들이 그 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는도다. 그들이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인생의 큰 광풍을 만나 내 인생의 배가 뒤집혀 지려고 하는데, 그때 그들이 그 고통 때문에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때, 그 고통에서 인도해 내 주시고, 풍랑을 잔잔케 해 주시고, 그들이 바라는 소원의 항구로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9절을 보시면,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하셨습니다. 인생의 광야와 같은 시련과 고난 중에 하나님의 도움과 은혜를 경험하는 것은 6절에서처럼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간절한 기도’ 그리고 9절의 말씀과 같이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가난한 심령’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 중에도 늘 사모하며 부르짖었던 것이 ‘이스라엘의 회복’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부르짖음과 사모함을 응답해 주셨던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하나님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거칠고 황량한 광야와 같은 인생, 미친 듯 몰아치는 바다의 풍랑과 같은 인생에는 답도없고 소망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도저히 소망이 없어 보이는 그 상황에서도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이들,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며 소망하는 이들을 하나님은 반드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기억해야 할 한 문장 도저히 소망이 없어 보이는 그 상황에서도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이들,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며 소망하는 이들을 하나님은 반드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43 여호와께서 여러 번 그들을 건지시나 그들은 교묘하게 거역하며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낮아짐을 당하였도다
44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실 때에 그들의 고통을 돌보시며
45 그들을 위하여 그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크신 인자하심을 따라 뜻을 돌이키사
46 그들을 사로잡은 모든 자에게서 긍휼히 여김을 받게 하셨도다
47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사 여러 나라로부터 모으시고 우리가 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
48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할지어다 모든 백성들아 아멘 할지어다 할렐루야
비트코인(BTC)으로 대표되는 ‘암호화폐(가상화폐)’ 중에 2022년, 우리나라 개발자에 의해 만들어진 ‘테라 & 루나(Terra & LUNA) 사태’가 터져서 여기에 투자한 28만 명의 사람들이 약 50조 원의 피해를 봤습니다. 그리고 이 개발자는 금융사기범으로 지금 미국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데, 형량이 무려 130년 정도 된다고 합니다.
이 사건의 주인공은 1991년 분당에서 출생한 ‘권도형’ 이란 사람입니다. 한국에서 외고를 졸업하고, 미국의 스탠퍼드 경제학과를 졸업한 수재입니다. 그리고 스물일곱 살에 <테라폼랩스>라는 회사를 창업해, 이 가상화폐를 개발/발행했던 겁니다. 2019년 미국의 경제 전문지인 ‘포브스’에서 선정한 ‘30세 이하 아시아 리더 30인’에 꼽히기도 했고, 우리나라 언론에서도 ‘한국 블록체인을 선도한다’고 치켜세웠던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2022년 5월 이 사태가 터지기 전까지는 청년재벌로 승승장구하는 듯했었던 겁니다.
저는 암호화폐(가상화폐)라는 게 어떤 시스템으로, 어떻게 거래되고, 그것이 어떻게 물질적 가치가 될 수 있는지도 모르는데… 도대체 이걸 개발하고,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여기에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투자하게 만드는지… 정말 ‘천재’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천재가 그 좋은 머리를 ‘범죄’에 이용했으니, 나쁜 쪽으로 천재였던 겁니다.
오늘 본문 시편 106편 43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여러 번 그들을 건지시나 그들은 교묘하게 거역하며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낮아짐을 당하였도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여러 번 용서하시고, 그들의 고난 가운데서 구원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잠시 하나님께 감사하고 믿음으로 사는 듯 했지만, 다시 ‘교묘하게 거역하며’ 살아갔던 겁니다.
인간은 모든 피조물들 중에 가장 뛰어나게 지음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천재적인 머리를 나쁜 쪽에 사용하면 그 파괴력은 얼마나 더 크겠습니까?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전쟁 후에 사사시대의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보면, ‘범죄 – 회개와 부르짖음 – 구원…’ 이 사이클이 계속 반복되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43절 말씀도 그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면, 그들은 잠깐 믿음으로 살다가 다시 하나님 앞에서 교묘하게 범죄하고, 그 죄로 말미암아 다시 고난과 환난으로 ‘낮아짐’을 당했던 겁니다.
그런데 로마서 16장 19절에서 “…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고 말했었습니다. 범죄하는데 여러분의 천재적인 머리를 쓰지 마십시오. 악한 데는 미련해야 합니다. 악한 데는 무지하고 무식해야 합니다. 하지만 선한 데는 지혜로와야 합니다. 여러분의 천재적인 머리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일에 사용하십시오.
시편 106편 44절을 보시면,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실 때에 그들의 고통을 돌보시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범죄했고, 그로 인해 고통을 받았고, 자신들의 죄를 후회하고 회개하며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그들의 고통을돌아보시는 일을 계속 반복하셨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역사였고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제가 젊을 때는 누군가 나를 속이고, 나를 이용하는 거 같으면 불의를 용납하지 못하는 정의의 사도처럼 분노했던 거 같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점점 먹어가면서는 불의를 용납한다기보다는 그 상대방의 속이 보이기도 하고, 기분도 썩 좋지는 않지만… 그 사람의 연약함을 이해하고, 나도 이미 다 알고 있지만 그에게 조금 더 시간을 줘 보기로 하고, 그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줘 보기도 하는 거 같습니다.
제가 자녀들과 여전히 함께 살고 있고, 그 자녀가 성장기를 지나 어엿한 성인이 되니깐… 내가 자녀들의 잘못을 일일이 다 지적하고, 그의 실수를 다 들어내려고 하기 보다는 사실 내가 어느 정도 눈치도 채고 있고, 다 알고 있는것도 있기도 하지만… 모른 척 해 주기도 하고, 조금 더 기다려 주기도 하는 거 같습니다. 아이들도 성인인데 그럴 필요까지도 없는 겁니다. 이제 실수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면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 성숙한 인격체인 겁니다.
45절을 보시면, “그들을 위하여 그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크신 인자하심을 따라 뜻을 돌이키사”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실수가 많은 이스라엘에게 다시 기회를 주셨던 것입니다. 저같이 부족한 아버지도 자녀들에게 이런 마음을 갖고 있는데, 자비와 인자가 크신 하나님은 기다려 주시고, 이해해 주시고, 용서해 주시고, 받아 주시고, 용납하시고, 우리에게 또 속는 줄 아시면서도 여전히 또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기억해야 할 한 문장 저같이 부족한 아버지도 자녀들에게 이런 마음을 갖고 있는데, 자비와 인자가 크신 하나님은 기다려 주시고, 이해해 주시고, 용서해 주시고, 받아 주시고, 용납하시고, 우리에게 또 속는 줄 아시면서도 여전히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3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아버지 다윗의 법도를 행하였으나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더라
4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제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5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오늘은 우리 [세부광명교회 설립 12주년] 기념일로 하나 님 앞에 감사 예배로 올려드리게 되었습니다. 2012년 6월, 제가 한국에서 부목사로 정신없을 정도로 바쁘게 사역하고 있을 때 ‘교회 개척에 대한 콜링(calling)’이 어느날 갑자기 저에게 임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달인 7월, 저는 한국의 어떤 도시에 교회를 개척해야 하는지 기도하고, 고민하고 있던 차에 제가 한 번 도 방문해 본 적도 없었던 필리핀 세부에 ‘한인교회 개척에 대한 사명’으로 구체화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다음 해인 2013년 10년간 정들었던 교회와 성도들의 기도로 파송을 받아 2월 19일, 고등학교 1학년, 2학년 두 자녀 그리고 아내와 함께 세부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부에 온 지 두 주째 되던 주일에 세부의 가모테 스 섬에서 사역하고 계신 선교사님 부부와 두 자녀 그리고 우리 가정 네 사람하고 이렇게 여덟 사람이 작은 창문도 하 나 없었던 우리 집 거실에서 의자를 10개 놓고, 세부광명교 회 ‘첫 예배’를 드리게 된 겁니다.
그런데 선교사님네도, 저에게도 ‘기도 처소’가 필요했습니 다. 그래서 집 거실에서 두 주간 주일예배를 드렸고 , 교회 공 간을 랜트할 곳을 찾아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이 건물에 ‘상가를 임대 한다’는 큰 현수막을 보 고 임대계약을 한 곳이 지금 우리 건물 1층의 한 유닛이었 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4년간 예배하며 교회의 기초를 세워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는 점점 더 성장해서 넓은 예배 공간이 필요해서 더 4년 뒤인 2017년 4월에 이 건 물의 3층 전체를 임대하여 교회를 이전해서 지금까지 예배 하고 있는 겁니다.
마태복음 16장 18절을 보시면,
“…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여기에서 교회를 시작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주셨 던 첫 번째 말씀이 이 성경 구절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세우시는 교회는 ‘주님의 교회’이고, ‘믿음의 교회’이고, ‘복음의 교회’고,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참된 교회 인 것입니다.
앞에서 제가 우리 교회의 개척부터 지금까지의 변천사를 말씀드렸는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집 거실에서 거기가 교회가 되는 거고, 상가 한쪽 귀퉁이에서 모이면 모이면 그 곳이 또 교회가 되는 것이고, 더 넓고 쾌적한 공간에 다고 하더라도 어디든 또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이즈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이는 장소가 어디냐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걸어 다니는 주님의 몸 된 성전 인 성도들이 모이는 곳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또 더 나아가서 그 모임과 그 교회가 ‘주님이 원하시는 성도와 교회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12주년을 맞는 우리 세부광명교 회 가 주님이 원하시는 성도와 교회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옵소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다윗왕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 가장 위대한 성군(聖君)이었습니다. 40년간의 통치를 마치고 그 왕위는 다윗 왕의 아들 중에 가장 지혜로운 왕자였던 솔로몬에게 계승되었습니다.
그런데 장기 자랑도 앞선 사람이 너무 탁월하게 잘 하면 바로 뒤이어서 하는 사람 은 너무 비교가 되니깐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의 왕위를 이어받 았지만,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고 마냥 좋을 수만은 없었습 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다 살펴봐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솔로몬의 부담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성경에서 솔로몬의 지혜는 전무후무한 지혜라고 했는데, 그렇게 똑똑하고 지혜로운 사람이었지만 막상 그 자리에 올라 보니… 한 나라의 왕이라는 자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란 사실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 역시도 부목사 시절 교회를 섬기고 있을 때, ‘담임 목 사가 되면 누구보다 잘할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을 했던 적 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담임목사로 지난 10여 년 동안 섬겨 보니 ‘부목사 시절이 마음만큼은 참 편했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교회가 부흥하지 않는 것 도 목사 탓인 거 같고, 성 도들에게 힘든 문제가 벌어져도 목사 탓인 거 같고, 잘 변 화되지 않는 성도의 모습을 봐도 다 내 탓인 거 같은 겁니 다. 그 책임과 부담은 365일 단 하루도 없는 날이 없는 거 같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맡겨진 일을 제대로 못 하는 거 같고, 능력의 한계를 느끼기도 하고, 부족함과 연약함 역시 느끼기 때문에 도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목사가 기 때문에 혹시 여러분에게 이와 같은 종류의 부담감이 있다 는 것은 꼭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내가 능력이 탁월해서 맡겨진 일을 해내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고 , 또 잘 해낼 수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고, 기도의 자리에 나가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게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니고, 내가 모든 것을 다 해낼 수 있는 것도 아닌 게 우리가 살아 가는 현실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솔로몬이 왕이 된 이후 초기에 있었 던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지혜의 왕이었던 솔로몬은 자신 의 지혜로 나름 국정을 잘 운영해 보려고 하는데 그게 뜻대로 되지 않기도 하고,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의 일들 도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열왕기상 3장 4절 말씀을 보시면,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 라 솔로몬이 그 제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솔로몬왕이 그 유명한 ‘일천 번제’를 드리는 장면입니다. 일천번 제를 ‘천일 동안 번제를 드린 것이냐? 천 마리의 희생 번제를 드린 것이냐?’라는 것이 궁금하실 텐데, ‘황소’ 일천 마리의 희생의 번제를 드렸다고 이해하시면 될 듯합니다.
그런데 그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황소 한 마 리를 죽여 희생의 번제를 바칠 때마다 여러 가지 예식들 이 있었고, 솔로몬왕은 그때마다 허리를 굽혀 엎드려 절하고 , 소원의 기도를 올리고 , 제사장은 제물의 피를 뿌리고 , 황소 의 각을 떠서 번제단 위에 올려 향기로운 제물로 하나님 앞 에 올려드렸을 것입니다. 황소 한 마리의 희생에도 얼마나 많은 번거로울 수 있는 의식과 예식과 기도와 절차들이 있었 겠습니까? 그런데 이걸 일천 번제를 드렸다는 겁니다.
어떤 주석가는 이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전적 헌신의 징표일 뿐 아니 라, 즉위 초 솔로몬의 강렬한 헌신과 순종에의 열의가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솔로몬은 그의 마음의 소원과 간절함을 일천 번제를 통해 하나님께 올려드리길 원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 은 ‘솔로몬 은 왕이었으니깐 황소 일천 번제를 드리는 것도, 그런 시간적, 환경적, 재정적 여유가 있으니까 그렇게 했겠지…’라고 생각하 기도 할 겁니다.
그런데 제가 목회를 해 보니깐, 세상에서 성공한 돈 많은 부자라고 해서 교회 앞에 헌신하고 헌금도 많이 하는 게 아 닙니다. 세상에서 어떤 사회적 지위가 있다고 해서 열심히 예 배하고, 기도 생활 열심히 하고, 주님 앞에 더 충성되고… 그러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헌신하고, 어떤 사람이 예배하고, 기도 합니까? 오늘 본문 3절에서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고…”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즉,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 이 예배 하고, 기도자가 되고,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교회 에서 헌신하는 사람은 재력이나 사회적 지위와 관계가 있는 게 아니라, 영적 온도와 관계가 있고,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 는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5절을 보시면,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일천 번제를 받으시고, 그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고 말씀하셨 습니다.
이에 솔로몬은 9절을 보시면,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 옵소서”
고대의 왕들은 ‘재판장’의 역할도 했습니다. 지금은 ‘입법 부, 사법부, 행정부’의 3권분립이 되어 있지만, 어쨌든 대통 령은 이 세 가지를 통해 국민들이 억울함이 없도록, 잘 살 수 있도록 통치해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는 겁니다.
솔로몬왕은 그 막중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주님 앞에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듣는 마음’이란 말의 히브리어는 ‘복종하다’라는 뜻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Luther)’는 이것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듣는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복종할 때, 옳고 그름을 잘 판별할 수 있는 지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즉,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어 있을 때 , 우리는 선 악을 제대로 분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는 것은 어느 순간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내 귀에 안 들어온다 는 겁니다. 사람마다 자기가 관심이 있는 말은 아주 잘 들리지만, 그렇지 않은 경 우는 옆에서 크게 말해도 내 귀에 안 들어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들을 내용과 무시할 내용을 선별해서 차단하든지 수용하든지 한다 는 겁니다. 말씀이 내 귀에 안 들어온다 는 것은 그 말씀에 내가 관심이 없든지 , 듣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든지 … 하기 때문에 안 들리는 겁니다.
우리가 가끔 네다섯 명하고 어울려서 대화할 때가 있는데, 네다섯 명이라는 구성 은 어느 순간 둘, 셋으로 주제가 나뉘어 끼리끼리 대화할 여지가 다분히 있습니다. 내가 처음엔 네다섯 명에게 어떤 걸 말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그 옆 사 람에게 다른 걸 말하면서 자연스럽게 두 가지 주제가 게 둘씩, 셋씩 나뉘어 대화를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참 민망한 상황도 있는데, 여러분이 어떤 주제의 대화를 꺼냈는데 듣는 사람이 없는 겁니다. 그리고 자꾸 옆 사람에게 말하고, 딴소리하고… 막 그런다면… ‘나 지금 말 하고 있거든?’ 하면서 기분이 상할 수도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 ‘듣는 마음’이 없다면 우리의 귀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을 것 입니다. 하나 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는 것은 선악을 분별할 능력을 상실 해 간다 는 것을 말합니다. 나는 우리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사회에서도 잘 되고 형통하기를 바랍니다. 큰 부자도 나오 고, 유명한 사람도 나오길 바랍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가 장 원하시는 성도는 주님의 말씀을 잘 듣는 자 인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바른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2. 주님의 마음에 합한 자 되게 하소서
우리 교회는 별다른 행사가 많지는 않은데, 굳이 행사라 는 게 있다면 <특별 기도회>라는 게 연중에 종종 있습니다. 40일 특별 새벽기도회를 하든 아니면, 특별 저녁기도회를 하 든 이런 특별기도회 기간엔 교회적으로도 특별한 기도 제목 이 있고, 이 기도회에 참여하는 우리 성도들도 간절한 기도 제목 을 갖고 특별 기도회에 참여합니다.
솔로몬의 <일천 번제> 역시 그의 특별한 소원과 기도 제 목이 있었던 것 입니다. 그의 일천 번제를 받으신 하나님께 서 솔로몬에게 5절에서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고 물으셨습니다.
7절을 보시면,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이 당시 솔로몬의 나이를 학자들은 20대 초반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직은 어린 나이의 솔로몬은 자신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많은 백성들을 다스릴 지혜가 부족하다 고 말씀드렸 던 겁니다.
다시 9절을 보시면,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 옵소서”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주의 백성들을 잘 다스릴 수 있는 ‘듣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자기 마음과 뜻대로, 자기 지식과 경험과 지혜대로 통치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복종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나 님의 뜻대로 선악을 분별하여 백성을 잘 다스리기를 바라는 소원이었던 것입니다.
10절을 보시면,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여기서 ‘주의 마음에 든지라’는 말씀을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하자면 ‘주의 눈에 좋았다’라는 뜻입니다. ‘눈과 마음’이란 것은 하나와 같이 연결이 되어 있는 겁니다. 내 마음에 원하 는 게 있으면 그곳을 향해 자꾸 시선이 가게 되어 있고, 내 가 즐겨 보는 게 있다면 그것이 내 마음에 딱 들기 때문입니 다.
솔로몬의 마음과 태도와 그의 소원과 기도의 제목이 주님 의 눈에 딱 들어 왔습니다. 주님이 보시기에 너무 좋았습니다. 주님의 마음에 딱 맞았 습니다.
그래서 11절을 보시면,
“이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 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 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주님은 솔로몬의 태도와 마음에 감탄을 하셨습니다. 일천 번제 만으로도 주님의 마음을 움직였는데 , 그가 그 일천 번 제를 하면서 간절하게 바라고 소원하는 기도의 제목을 듣고 또 다시 한 번 감탄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12~13절을 통해서 그가 구한 고 총명한 마음뿐만 아니라 그가 구하지 않은 지혜롭 부귀와 영광까 지도 더하시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2024년 11월 18일부터 20일까지 3일간 필리핀 전역에서 한인교회 사역을 하시는 목사님들을 모시고 <필리핀 기도자 학교>라고 하는 영성 세미나를 개최했습니다. 마닐라도 아니고 세부의 작은 한인교회 가 이런 행사를 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목사님들이 전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세부까지 오셔야 했고, 한국에서 귀한 시간 을 내서 오시는 강사 목사님과 중보 기도팀 도 있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큰 부담감이 있었습니다. 신경 써야 할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었고, 우리 교회의 성도들로 구성된 봉사자 스텝들도 이런 큰 행사를 해 본적이 없어서 혹시라 도 진행상의 큰 실수와 혼선이 생기면 어쩌나 하는 염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기도로 준비해야겠다 는 마음에를 선포하고, 매일 아침 8시, 저녁 8시 두 번의 예배와 기도를 40일간 진행했습니다. 저 역 시도 엄청난 도전이었던 게, 제가 한 주간 동안 아침과 저녁으로 설교를 하고, 예배를 인도하는데 <굿모닝 채플>이라고 하는 온라인 사역을 위한 설교까지 해야 했는데, 나중에 정신차려보니깐 제가 한 주에 설교만 16번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제 마음에 부담이 크면 클수록 저는 더 간절하게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
그런데 그때 하나님 앞에 행사 가 성공적으로 잘 진행되길 위한 여러 가지를 놓고도 기도 할 수 있었는데, 제 마음속에 계속 올라오는 간절한 소원은 “우리 교회가 영적 용광로가 되고, 기도의 용광로가 되게 해 주 옵소서”라는 기도 제목이었습니다. 이 제목을 놓고 가장 집중적으로 기도했었습니다.
그런데 행사는 은혜 가운데 진행되고, 이런 큰 행사를 처음 섬겨봤던 우리 교회 봉사자들은 모든 목사님들이 칭찬 을 아끼지 않았던 최고의 스텝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영성 세미나에 참석하셨던 모든 목사님들이 ‘필리핀에서 이런 충만 한 세미나는 없었다’는 피드백을 계속 남겨주셨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마음에 맞는 간절한 소원을 아뢰었던 솔로몬에게 그 지혜 뿐만 아니라 부귀와 영광까지도 주셨던 것 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면, 주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역사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도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핵심적인 것, 더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본질이 아니라 그저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은 핵심을 놓치고 곁다리만 잡는 겁니다.
사도행전 13장 22절에서
“…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 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았던 다윗을 통해 주님은 그분이 갖고 계신 그 뜻을 다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주님의 마음에 맞는, 주님의 마음에 합한 한 사람 을 찾고 계십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성도와 교회를 찾고 계 십니다. 그리고 그 성도와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갖고 계 신 원대한 계획들을 이루어 갈 것입니다. 나는 교회설립 12 주년을 맞는 우리 성도들과 우리 교회가 주님이 찾으시는 바 로 그 교회가 되길 소망합니다.
38 무죄한 피 곧 그들의 자녀의 피를 흘려 가나안의 우상들에게 제사하므로 그 땅이 피로 더러워졌도다
39 그들은 그들의 행위로 더러워지니 그들이 행동이 음탕하도다
40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맹렬히 노하시며 자기의 유업을 미워하사
41 그들을 이방 나라의 손에 넘기시매 그들을 미워하는 자들이 그들을 다스렸도다
42 그들이 원수들의 압박을 받고 그들의 수하에 복종하게 되었도다
우리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고 깨끗한 나라 중에 하나입니다. 유럽과 미국, 아프리카와 동남아 등등에서는 마약류라 할 수 있는 대마초 같은 것들은이미 합법화된 곳이 있을 정도로 마약 중독이 심각한 상태입니다. 더 강한 마약들을 하도 많이 하니깐 정부에서 ‘대마초’ 정도는 그냥 허용을 해 주는 겁니다.
왜 마약에 중독이 되고, 그 중독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냐면, 마약류는 자제력을 발휘할 수 있는 우리 뇌의 일부를 변화시켜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만약 마약류를 중단하면우울증, 불안, 불면증을 비롯해 신체적이고 정서적인 금단 현상으로 고통스러워 죽을 거 같은 겁니다. 그러니 한 번 마약에 손을 댄 사람이 그 중독에서 빠져나온다는 게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18장 8절에 보시면,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끔찍한 말씀입니까? 그런데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요?범죄하는 손과 발을 찍어 버리기 시작하면 우리 중에 온전한 지체를 갖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까지 심각하고 끔찍하고 강하게 말씀을 하셨을까요? ‘죄’라는 것은그 손이 잘려 버려지지 않으면, 그 눈이 뽑혀 사라지지 않으면… 끊어버리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마치 마약 중독과 같이 얼마나 끈질기게 우리를 괴롭히는지 모릅니다. 더 이상 나와 관계가 없을 거 같은 그 죄가 어느날 보면 또 스윽 다가와 있고, 나도 모르게 그 죄의 달콤함에 빠져있는 겁니다.
시편 106편 34절, 35절을 보시면 “그들은 여호와께서 멸하라고 말씀하신 그 이방 민족들을 멸하지 아니하고, 그 이방 나라들과 섞여서 그들의 행위를 배우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시고, 모세를 통해 ‘모세오경’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부터특별히 경고하고 명령하신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가나안의 이방 족속들을 모두 멸하라. 그들과 혼인도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의 백성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민족의 풍속을 따르고, 그들의 문화를 따르고, 그들의 우상을 섬길 것이분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36절을 보시면, “그들의 우상들을 섬기므로 그것들이 그들에게 올무가 되었도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의 우상숭배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구절 하반절에서”… 그것들이 그들에게 올무가 되었도다”라고 하셨는데, 토끼든, 멧돼지든 심지어 곰과 같은 맹수라 할지라도 사냥꾼이 펼쳐놓은 올무(올가미)에 걸리기만 하면, 절대 빠져나올 수가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죽은 목숨과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37절부터의 내용을 보면, 우상의 제의 중에 우상에게 자기 자녀를 희생제물로 바치기도 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우상의 피로 더럽혔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크게 진노하셨고, 41절과 42절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망해 이방 여러 나라의 손에 넘겨져 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죄’라는 것이 이런 특징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죄에 빠지기 시작하면,그 죄는 여러분을 종으로다. 그래서 그 죄가 시키는 대로삼는 겁니하는 겁니다. 처음엔 그 죄의 달콤함에 빠져 내가 그것을 이용하는 것처럼 느끼지만, 어느 순간 그 죄가 여러분을 종으로 부리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그 죄로 인해 망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 죄로 인해 몰락의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손이 죄를 범하면 잘라버리라. 눈이 죄를 범하면 뽑아버리라…’는 식으로 말씀하셨고, 오늘 본문 34절에서도 ‘그 이방 민족을 멸하라’ 하셨는데, ‘그렇게까지 심하게 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겁니다. 하지만 ‘죄’라는 것을 용납하기 시작하면그 죄는 반드시 나의 주인 노릇을 하려고 들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나를 그 죄의 종으로 만들어 버릴 것입니다. 그만큼 강력합니다.
우리는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 너그럽고 온유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죄와의 관계에 있어 우리는 매우 ‘단호’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얼마든지 용서하고, 용납하고, 이해해야 하지만, 죄에 대해서 만큼은용납하고 틈을 줘서는 안 되는 것조금도 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장 27절에서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라고 할 정도로 우리는 죄에 대해서 만큼은 단호하고 단호해야합니다. 그래야 죄를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살고,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살고, 세상이 변할 수 있는 길인 것입니다.
기억해야 할 한 문장: ‘그렇게까지 심하게 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겁니다. 하지만 ‘죄’라는 것을 용납하기 시작하면 그 죄는 반드시 나의 주인 노릇을 하려고 들 것입니다.
32 그들이 또 므리바 물에서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으므로 그들 때문에 재난이 모세에게 이르렀나니
33 이는 그들이 그의 뜻을 거역함으로 말미암아 모세가 그의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음이로다
오늘 본문에는 안타까운 사건 하나가 나옵니다. 왜냐하면 모세는 광야에서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며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는데, 이번 ‘므리바 물 사건’을 통해 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박탈당했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의 가나안 입성 자격을 박탈했는지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민수기 20장을 중심으로 살펴보시겠습니다.
민수기 20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 40년째 되던 해’의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민수기 20장 1절을 모세의 누이였던 미리암이 죽어 장사 되는 내용으로 시작하고 있는데, 2절 이하부터는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 앞에 와서 ‘물이 없으므로’ 불평하고 원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민수기 20장 5절을 보시면,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나쁜 곳으로 인도하였으냐 이 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 40년 전, 오늘 본문의 배경인 ‘가데스 바네아(가나안 땅과 시내 반도의 경계)’는 12명의 정탐꾼들이 40일간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돌아와서 정탐 보고를 했었던 곳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열 명의 정탐꾼들은 부정적인 보고와 불평과 원망을 했고, 그들의 불신앙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광야 40년의 방랑 생활로 징계했습니다. 당연히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20세 이상의 모든 남자들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갈 자격을 박탈당하게 됩니다. 그렇게 광야를 돌고 돌아 40년 만에 다시그 멀리 가나안 땅이 보이는 ‘가데스 바네아’에 왔는데, 그들은 그곳에서 또 불평하고 원망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민수기 20장 8절에서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팡이를 가지고 가서 반석에게 명령하여(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민수기 20장 10절, 11절을 보시면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모세와 아론이 백성들을 모아서 반석에서 물을 내는 장면인데, 8절에서 주님께서는 ‘반석에게 명령하여’라고 하셨는데, 10절, 11절에서 모세는 ‘화를 내면서 반석을 두 번 내리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행인 것은 모세가 화를 냈음에도 불구하고하나님께서는 그 반석에서 물을 내게 하셔서 회중과 가축들에게 물을 주셨다는 겁니다.
민수기 20장 12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언젠가 미국 대통령의 부임 전과 퇴임 후의 사진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 몇 년 사이에머리도 희어져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대통령들이 더 늙고,
모세가 40년 동안 이스라엘의 불평과 원망을 들으며 있었으니, 그 변하지 않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정신적으로 힘들고, 감정의 소비가컸겠습니까? 40년 전 그 가데스바네아에서 불평하고 원망하다 가나안 땅 입성 자격을 박탈당하고, 그로 인해 40년간 광야 방랑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40년이나 지났는데 그들은 여전히 변하지않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장소에서 또 불평하고 원망하니…모세의 감정이 폭발해 버렸던 거 같습니다. 충분히 이해됩니다.
오늘 본문인 시편 106편 33절을 보시면, “이는 그들이 그의 뜻을 거역함으로 말미암아 모세가 그의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음이로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함으로반석에서 물을 내야했는데, 마치 자신이 신비한 능력을 일으키는 것처럼지팡이로 반석을 내리치며 물을 내게 하는 기적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그 일로 인해 모세는 가나안 땅 입성 자격을 박탈당했습니다. 그 사람이 모세일지라도 누구도 예외 될 수 없다는 겁니다.
40년이 지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감정이 전혀 변화된 게없었습니다. 그들은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그로 인해 그들은 지난 40년 동안 광야를 방랑하며 살 수밖에없었던 것입니다. 저 멀리 가나안 땅이 보이는데도 그 땅에 들어갈 자격을 박탈당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모세 역시 그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 화를 내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던 것입니다. 안타깝지만 가나안 땅 입성 자격을 예외없이 박탈당했습니다.
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 모세의 모습을 보면서 ‘화라는 것은 얻을 것보다 잃을 게 많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부부 사이에도,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우리가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화를 참지 못해서 화를 내게 되면…얻을 것보다 잃을 게 훨씬 많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차라리 화를 누르고 참고 그 시간을 지나고 나면, ‘잘했다’라는 생각이 드실 겁니다.
잠언 16장 32절 말씀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기억해야 할 한 문장: 우리가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화를 참지 못해서 화를 내게 되면… 얻을 것보다 잃을 게 훨씬 많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차라리 화를 누르고 참고 그 시간을 지나고 나면, ‘잘했다’라는 생각이 드실 겁니다.
2019년, 튀르키예(터키) 동부의 한 작은 마을에는 스물여섯 농가가 평균적으로 20마리 내외의 양들을기르고 있었습니다. 양들은 대부분 그곳의 넓은 들판에 풀어놓고 함께 키우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양치기들이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잠시 양 떼들을 떠나 있던 사이, 풀을 뜯던 양들 가운데 한 마리가 갑자기 미친 듯이 내달려 절벽 아래로뛰어 내렸습니다. 그런데 주변에 있던 양 떼들도깜짝 놀라면서 그 양을 따라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기 시작했고, 결국 약 450여 마리의 양들이 몰사했습니다.
그 이유는 알 수가 없습니다. 첫 번째로 뛰어내린 양이 무엇인가에 깜짝 놀라도망간다는 게 절벽으로 뛰어내린 게 아닌가 생각이 들고, 주변에 있던 겁많은 양들도그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 그 뛰어내린 양을 따라가다 모두 절벽에 떨어져 죽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우리 사람을 ‘양’으로 많이 비유하는데, 사람도 양들처럼 이렇게 어리석음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나치의 히틀러라는 악마 한 사람의 선동에 모든 독일 사람들이 열광했고,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게 되는2차 세계대전이 벌어졌고, 무고한 유대인 600만 명이 살해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한 사람이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한 사람이 깨어 있으면한 가정이, 교회가, 사회와 세상이 살아날 수도 있고, 만약 깨어 있는 한 사람이 없으면가정도, 교회도, 세상도 모두가 함께 절벽으로 뛰어내리는 양 떼와 같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죽음의 절벽으로 뛰어내리지만,그곳이 죽음의 절벽인지도 인식하지 못한 채 앞사람 꽁무니만 보고쫓다 모두 죽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본문은 [민수기 25장]의 ‘바알 브올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의 광야 생활을마치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진군해 나갔습니다. 아직 요단강을 건너지도, 가나안 땅을 밟아보지도 않았는데 요단 동편에 있었던 나라들과 계획이 없던 전쟁이일어났고, 다행히 이스라엘은 그들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그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강 동편에 있던‘싯딤’이란 마을에 진을 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민수기 25장 1절과 2절을 보시면,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싯딤이란 지역은 모압과 암몬이란 왕국의 서편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모압 왕 발락이 발람이란 선지자를 매수해 어떻게든 이스라엘을 저주하고 싶었지만, 선지자 발람은 하나님의 강권하심으로 인해이스라엘을 축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물질에 넘어간 선지자 발람은자기 입으로는 이스라엘을 저주할 수 없지만, 모압 왕 발락에게 하나의 계략을알려줬습니다. 그것이 바로 ‘미인계(美人計)’였습니다.
모압 족속이 섬기던 다산과 풍요의 신인 ‘바알’에게 드리는 ‘제의(祭儀)’ 중에 하나가 난잡한 ‘혼음(混淫 : group sex) 의식’이란 게 있었던 겁니다. 그 제사에 참여하는 남자들이알의 여사제들과의 혼음이 있을 때,바바알 신이 다산과 풍요의 복을 내린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 제의에 싯딤에 머물고 있었던 이스라엘 족속의 리더들을 초대했고, 미인계에 넘어간 이들이 그곳에서 음행과 우상숭배를 했던 것입니다.
시편 106편 28절과 29절을 보시면, “그들이 또 브올의 바알과 연합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 그 행위로 주를 격노하게 함으로써 재앙이 그들 중에 크게 유행하였도다” 모든 우상의 목적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이 신을 믿으면 물질적인 복(기복)과 육체적 욕망을 해결해 주겠다’는 겁니다.
여기에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넘어갔던 겁니다. 그 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전염병이 시작되었고, 그로 인해 약 24,000명이 목숨을 잃었던 것입니다. 그런 재앙 중에도 정신을 못 차린백성의 어떤 지도자가 한 이방 여인을 데리고 장막에 들어가 음행할 때, 아론의 손자인 비느하스가 창을 들고 따라 들어가 그 남녀를 죽이게 됩니다. 그러자 그 전염병이 그쳤던 것입니다.
30절과 31절을 보시면, “그 때에 비느하스가 일어서서 중재하니 이에 재앙이 그쳤도다. 이 일이 그의 의로 인정되었으니 대대로 영원까지로다” 우리의 생각에 비느하스가 그 장막에 따라 들어가남녀를 한 자리에서 죽였으니 ‘그렇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나?’라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깨어 있었던 한 사람 비느하스가 전염병을 끝낸 겁니다. 24,000명 뿐 아니라, 3만, 4만, 5만, 10만… 그 이상으로 재앙으로 죽게 될 것을 막아섰던 것입니다.
저는 주일예배에 몇 명이 참석했는지 잘 모릅니다. 저에겐 주일예배에 몇 명이 참석하고 있는 것보다매일 진행되고 있는 ‘아침(새벽) 기도회에 몇 명이 참석하고 있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기도로 깨어 있는 한 사람이 가정과 교회와 세상을 살릴 것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늘 기도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각 가정에 기도의 제사장, 기도의 파수꾼 한 사람은 깨어 있게 하소서’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만 깨어 기도로, 영적으로 있어도 가정을 지키고, 교회를 지키고, 더 나아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억해야 할 한 문장: 제가 늘 기도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각 가정에 기도의 제사장, 기도의 파수꾼 한 사람은 깨어 있게 하소서’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만 깨어 기도로, 영적으로 있어도 가정을 지키고, 교회를 지키고, 더 나아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자꾸 그 사람에게 가까이 가게되고, 자주 만나게되고, 교제하고 싶은 마음이드는 겁니다. 그리고 뭔가를 좋아하는 게 생기면 그게 골프든, 게임이든, 드라마든… 그 좋아하는 걸 자주 즐기게되어 있는 겁니다. 하지만, 뭔가를 싫어하게 되면 본능적으로 그와 혹은 그것과 거리를 멀리하게 되어 있는 겁니다.
제가 필리핀이란 곳에서 한인교회 목회를 하면서 여기에 오시는 분들을 이렇게 관찰 해보니깐 세부를 좋아하는 분들은 여기에 정착도 잘 하고, 이곳 생활에 나름대로 만족을 누리며즐겁게 생활하시는 걸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과 너무 다른 낙후된 인프라와 문화 같은 것을 경험하면서 ‘나는 세부가 싫다. 필리핀이 싫다…’라고 말하는 분들은 여기서 얻을 게 별로 없습니다. 그렇게 불평만 하다가시간 낭비, 물질 낭비하다가 철수하시는 모습을 많이 봤습니다.
얼마 전, 어떤 가정을 심방 했는데 그 집사님의 자녀가 공부면 공부, 악기면 악기, 운동이면 운동… 뭐든 잘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집사님이 “그 아이는 어려서부터 뭐를 하든 즐겁게 하니깐, 뭐든 다 잘하더라”는 말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건 하나님께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 만들어 놓으신 하나의 질서와 원리입니다. 내가 뭔가를 좋아하면, 그걸 즐기게되어 있고, 또 그걸 자주 하게되어 있고,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다른 사람보다 그걸 더 잘하는겁니다. 그게 공부가 되기도 하고, 운동이나, 악기 연주가 되기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뭔가를 갖고 싶고, 얻고 싶고, 되고 싶은 게 있다면… 첫 번째로 해야 할 게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이 마음이 없는 상태로는뭔가를 잘할 수도없고, 그것을 얻어낼 수도, 가질 수도,그런 존재가 될 수도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시편 106편 24절 말씀을 보시면, “그들이 그 기쁨의 땅을 멸시하며 그 말씀을 믿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수백 년 동안 애굽 땅에서 비천한 노예로 비참하게살아가던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 시키셨고,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에 보니 그들은 ‘그 기쁨의 땅을 멸시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그 땅을 좋아했다면, 그 땅을 사모하고, 사랑했다면그리고 그 땅을 꿈꾸고 소망하는 마음이 컸다면 그들은 결코 그 땅을 멸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그 약속의 땅을 멸시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십자가 없는 면류관만 원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광야 생활이 힘들고어려웠습니다. 그들은 당장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 없는 면류관은 없습니다. 고난과 시련이 없는 영광은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고난이 있고, 시련이 있지만 이 기간을 통해 우리는 더 단단해지고, 더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후에 그 왕관의 무게를 견딜 힘과 자격을 갖게되는 것입니다.
둘째, 믿음이 없어 가치를 몰랐다. 24절에서 그들이 “그 말씀을 믿지 아니하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아무리 좋은 말을 하고, 진실을 말한다하더라도 믿지 않으면 그 말을 무시하고, 멸시하게 되어 있는 겁니다. 그것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무가치하게 느껴지는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때문에 그 약속의 땅에 대한 가치를 몰랐던 것입니다.
25절을 보시면, “그들이 장막에서 원망하며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아니하였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막에서 원망했습니다. 가정에서 가장 많은 대화가 이루어지는 곳중에 하나가 ‘식탁’일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식탁에서 어떤 대화를 하느냐에 따라서 그 가정의 분위기가달라지고, 자녀들에게는 특별한 가치관이 형성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주의해야 할 것 중에 하나가 가정에서, 식탁에서 절대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대화를 하면 안 되는 겁니다. 자녀들에게 부정적, 비관적 가치관이 형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26절과 27절을 보시면, “이러므로 그가 그의 손을 들어 그들에게 맹세하기를 그들이 광야에 엎드러지게 하고, 또 그들의 후손을 뭇 백성 중에 엎드러뜨리며 여러 나라로 흩어지게 하리라 하셨도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을 멸시하고 싫어하는 자들에게하나님의 복을 주실 수 없습니다. 출애굽 1세대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40년의 광야 생활 중에 가나안 땅에 입성하지 못하고모두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11. ‘하나님의 복’을 싫어하는 사람에게 어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습니까? 그러나
시편 107편 9절에서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복을 사모하고,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이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만족함으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복을 받기 원한다면, 그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사모하고, 좋아하고, 바라고, 소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놀라운 은혜와 복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기억해야 할 한 문장: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복을 받기 원한다면, 그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사모하고, 좋아하고, 바라고, 소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놀라운 은혜와 복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15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요구하는 것을 그들에게 주셨을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쇠약하게 하셨도다
16 그들이 진영에서 모세와 여호와의 거룩한 자 아론을 질투하매
17 땅이 갈라져 다단을 삼키며 아비람의 당을 덮었고
18 불이 그들의 당에 붙음이여 화염이 악인들을 살랐도다
19 그들이 호렙에서 송아지를 만들고 부어 만든 우상을 경배하여
20 자기 영광을 풀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꾸었도다
21 애굽에서 큰 일을 행하신 그의 구원자 하나님을 그들이 잊었나니
[시편 106편]은 ‘이스라엘 민족의 건국사’에 있어서 ‘출애굽과 광야 생활’에 대한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 내려진 10가지 재앙’을 통해 430년간의 억압의 생활에서 풀려나 출애굽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편 106편 12절에서는<홍해의 기적> 사건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넌 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과 능력을 찬양했습니다.
시편 106편 13절을 보시면, “그러나 그들은 그가 행하신 일을 곧 잊어버리며 그의 가르침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이 시편의 14절 이하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이광야에서 어떤 범죄들을 저질렀는지를열거하고 있는데, 그들이 그렇게 범죄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1장 3절에서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축만도, 짐승만도 못하다는 것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가장 분노케 하는 것 중에 하나가 누군가가 내가 그에게 베푼 은혜를 잊고, 배신할 때 그리고 어디 가서 내 욕을 하고 있다고 생각될 때… 치가 떨리도록 화가 날 겁니다. 그래서 성경도 은혜를 잊은 사람을 동물보다 못하다고 하셨습니다. 안타깝지만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에게 받은 호의와 은혜도 잊지말아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잊으면 안 되는 겁니다. 왜 우리가 매일 성경을 읽고, 이렇게 매일 기도 생활을 해야 합니까? 은혜를 잊는 순간 우리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이 가득해 지고, 그것이 내 마음의 주인 노릇을 하기 시작하기때문입니다. 그것은 반드시 ‘죄’와 연결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14절을 보시면,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내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 이 구절은 민수기 11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에겐 먹을 게 만나밖에 없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라고 불평하던 사건을 말합니다. 이 사건을 가리켜 오늘 본문은그들이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내었다’라고 평가합니다.
그런데 민수기 11장 8절에 보면, “백성이 두루 다니며 그것을 거두어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으니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 맛 같았더라” 만나라는 특별한 식량은 밤에 이슬이 내릴 때, 하늘에서 눈처럼 내렸던양식이었는데,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 맛 같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쌀도 달고 맛있는 것이 있는 것처럼,이 양식은 달고 맛있었던 정말 괜찮은 식량이었던 겁니다.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광야에서 농사를 지어 얻은 것이 아니었고, 다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 아래에서아침마다 가서 거두어다가 가족들과 함께 요리를 해서 먹었던 것이 만나였기 때문에 이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그런데 사람이 감사를 잃는 이유는 ‘과한 욕심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들이 많은데, 우리는 ‘더 더 더’ 큰 것들을 기대하다 보니깐 감사를 잃고, 불평이 나는 것입니다.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에게 뭔가를 받고 싶은 기대가 커지는데그게 뜻대로 안 되면, 감사를 잃고 자꾸 실망만 커지고, 불평이 커지게 되어 있는 겁니다.
그리고 16절을 보시면, “그들이 진영에서 모세와 여호와의 거룩한 자 아론을 질투하매” 두 번째 사건은16장의 사건민수기 인데, 레위 지파이며 모세의 작은 아버지라 할 수 있는 ‘고라’가 ‘다단과 아비람’ 그리고 250명의 지휘관들과 함께 당을 지어 모세와 아론의 권위를 대적한 사건입니다.
민수기 16장 3절에 보시면, “그들이 모여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 하나님께서 모세의 형인 아론을 선택하여제사장을 삼으셨고, 오직 그 가문 만이 제사장직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작은 아버지 ‘고라’가 그 주동자였는데, 같은 레위 지파인데 ‘왜 나는 제사장이 안 되냐? 왜 너희만 되냐?’라는 식으로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대적한 사건입니다. 이것은 고라가 자신의 욕망이 지나쳐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행위였습니다. 결국 그 사건은 땅이 갈라져 그 반역자들을 심판하신 사건입니다. 인간의 탐욕이 커지면, 하나님도 눈에 안 보이는 겁니다.
19절과 20절을 보시면, “그들이 호렙에서 송아지를 만들고 부어 만든 우상을 경배하여, 자기 영광을 풀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꾸었도다”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의 율법을 받으러 40일간 시내산(호렙)에 올라갔을 때,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한 사건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존귀한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의 ‘값’을 매길 수 있을까요? 값을 매길 수 없어서 우리를 죄에서 사실 때,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대신 값을 지불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존귀한 형상을 풀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꾸었다는 것은 스스로를 싸구려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물질의 탐욕입니다.
야고보서 1장 15절에서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육체의 욕망과 탐욕은 끝이 없습니다.우리는 그 탐욕과 끝없이 싸워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욕심을 크게 낸 이스라엘 백성들이징계와 심판을 받았던 예를 말씀하시고 있듯, 욕심이 잉태되면 반드시 죄가 더해지고 결국은 ‘사망’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내 욕심과 욕망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과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결단하십시오.
기억해야 할 한 문장: 욕심이 잉태되면 반드시 죄가 더해지고 결국은 ‘사망’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내 욕심과 욕망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과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결단하십시오.
21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22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걸어가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
23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들이 다 그들의 뒤를 추격하여 바다 가운데로 들어오는지라
24 새벽에 여호와에서 불과 구름 기둥 가운데서 애굽 군대를 보시고 애굽 군대를 어지럽게 하시며
25 그들의 병거 바퀴를 벗겨서 달리기가 어렵게 하시니 애굽 사람들이 이르되 이스라엘 앞에서 우리가 도망하자 여호와가 그들을 위하여 싸워 애굽 사람들을 치는도다
2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물이 애굽 사람들과 그들의 병거들과 마병들 위에 다시 흐르게 하라 하시니
27 모세가 곧 손을 바다 위로 내밀매 새벽이 되어 바다의 힘이 회복된지라 애굽 사람들이 물을 거슬러 도망하나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
28 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따라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으니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29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행하였고 물이 좌우에 벽이 되었더라
30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에서 애굽 사람들이 죽어 있는 것을 보았더라
31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우리의 인생에는 언제나 내가 해 볼 만한 일들만 있지는 않습니다. 모세가 홍해 앞에 섰을 때처럼, 여호수아가 철의 이중성벽인 여리고성 앞에 섰을 때처럼, 소년 다윗이 거 인 장수 골리앗 앞에 섰을 때와 같이… 내 힘과 능력으로 절대 불가능한 문제와 상황 앞에도 서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학생들에겐 ‘공부’가 나에겐 도저히 넘기 힘든 홍해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겁니다. 어떤 청년들에겐 나의 미래와 진로를 바꾼다는 것이 골리앗 앞에 선 것처럼 불가능해 보일 수도 있을 겁니다. 어떤 여 집사님들에겐 남편이 변화된다는 게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 것보다 더 불가능해 보일 수도 있을 겁니다. 세부에서 직장을 다니거나, 사업하는 분들 중에는 재정의 문제가 홍해와 여리고와 골리앗처럼 해결할 방법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소망을 버리지 말아야 하는 것은 믿음의 사람들 앞에서 홍해도 갈라졌고, 여리고도 무너졌고, 골리앗도 쓰러뜨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 앞에서 누구나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는 그 불가능한 문제와 상황에 굴복하고 , 포 기하는 것 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내 눈에도 절대 불가능해 보이는 바로 그 문제 앞에 믿음으로 당당히 맞서는 것 입니 다. 그래서 홍해의 기적을 일으키고, 여리고를 무너뜨리고, 골 리앗을 쓰러뜨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누군가에겐 그 홍해와 여리고와 골리앗이 내 인생의 기적을 쓰는 새로운 기회 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1. 기회를 기적으로 만들라
우리 앞에 ‘홍해’와 같은 진퇴양란의 상황들이 올 수 있습 니다. 하지만, 그 상황을 실패와 절망으로 만드느냐? 아니면 기적의 역사를 만드는 새로운 기회로 만드느냐? 하는 것은 우 리의 믿음에 달려 있는 것 입니다. 때문에 내 인생 앞에 버티 고 있는 홍해는 나에게 기적을 맛볼 수 있는 새로운 ‘기회’ 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4장 16절을 보시면,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 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모세는 바짝 뒤쫓아온 애굽의 병거들로 로 패닉에 빠져 있었던 공포와 두려움으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정시키고, 하 나님 앞에 부르짖으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 서 이 구절의 말씀을 모세에게 주셨던 겁니다. 그리곤 이스 라엘 진 앞에 있었던 구름 기둥이 그 뒤로 옮겨서 이스라엘과 애굽 군대 사이를 가로막아 그들이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못 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급박했던 상황에서 모세와 이스라엘에게 홍해의 기적을 일으킬 시간이 필요했 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1절을 보시면,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 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백성들이 패닉에 빠져 모세를 원망할 때, 모세도 할 수 있 는 게 없었기 때문에 부르짖어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16절을 통해서 그 기도의 응답을 주셨는 데,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홍해를 갈라지게 하 고, 백성들이 그 홍해 바닥의 마른 땅을 건너가게 하라’는 거였 습니다.
우리야 이 성경의 내용을 이미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 에 그냥 ‘그러려니’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어쩌면 아무 감흥 이 없을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모세 입장으로 돌아가 본다면 이 얼마나 황당한 응답입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인 21절에 보니깐,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모세는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만약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손을 홍해 바다 앞으로 쭉 뻗었는데… 아무 일도 안 일어나면 어떻게 합니까? 모세도 그런 생각이 안 들 었겠습니까? 만약 그에게 그런 의심이 더 컸다면 모세도 그렇게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을 믿었고, 말씀하신 그대로 순종하 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의 순종으로 홍해가 갈라져 바다 한가운데로 길이 생기더니, 그 길이 마른 땅이 되었던 것입니다.
22절을 보시면,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걸어가고 물은 그 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
우리나라의 전라남도 진도에서 ‘한국판 모세의 기적’이라 고 불리는 <신비의 바닷길 축제>라는 게 있습니다. 이 현상 은 썰물 때 중간에 수심이 낮은 모래톱이 드러나서 육지와 섬이 연결되는 겁니다. 얼마든지 가능한 자연현상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기록된 <홍해의 기적>은 썰물 때 물 이 저 멀리 빠져 있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 물이 좌우에 커 다란 벽이 되고, 그 사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른 땅을 걸 어갔다 는 겁니다. 이 사건은 우연히 벌어진 어떤 자연현상 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기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기적’이 일어났습니까? ‘모세의 순 종’을 통해서 나타난 겁니다. ‘지팡이를 잡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 너희가 마른 땅으로 건너갈 수 있게 되리라.’ 이런 말씀을 어떻게 믿고, 그대로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믿기 어렵고, 순종하기 어려운 말씀 이었습니 다.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앞에 ‘홍해’와 같은 내 힘으로 도저히 해결 할 수 없는 문제와 상황들이 있다는 것 은 하나님께서 나에 게 특별한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 기회를 내 인생의 새로운 기적의 역사로 써 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사기 7장에 보면, 기드온의 300 용사 이야기가 나옵니 다. 사사로 부름받은 기드온도 처음엔 용기도 없고, 믿음도 없어서 계속 의심하고 자신 없어 했습니다. 하지만, 기드온 은 300 용사와 함께 미디안의 135,000명과 싸워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이런 기회가 주어졌지만, 기드온이 계 속 거부했다면 우린 성경에서 기드온의 300 용사 이야기를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 역시 사사 기드온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였던 겁 니다. 300명의 용사로 135,000명의 미디안 대군과 싸워야 하는데 이게 말이 되는 싸움입니까? 하지만, 기드온은 이 기회를 기적으로 만든 믿음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소년 다윗 앞에 거인 장수 골리앗이 있었던 것도 기회고, 다니엘의 세 친구들 앞에 풀무불이 있었던 것도 기회였고, 베 드로 앞에 풍랑이는 바다가 있었지만 그 또한 그가 인류 역사 상 최초로 물 위를 걸을 기회였던 것 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 상황 을 불평하고, 원망하고, 남 탓만 하다가 인생의 실패자로 남아 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기회를 기적으로 만들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있는 필리핀에도 초중고 학생들이 조기 유학 을 많이 옵니다. 필리핀으로 유학 오는 여러 가지 이유들과 목적들이 있을 겁니다. 한국과 거리가 가깝고, 동남아의 다른 어떤 나라보다 국민들이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나라고, 학비가 다른 영어권에 비해 저렴하기도 하고… 여러 좋은 조 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사시는 분들 중에 잘 모르는 사람들 은 ‘왜 미국이나 캐나다로 가지 않고 필리핀으로 가냐?’라고 말하 기도 합니다. 물론, 선진국들이 교육도 분명 선진화되어 있 을 겁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조건들과 상황들 그리고 이유들 때문에 필리핀에 조기유학을 온 친구들에게 이곳은 하나님 께서 또 다른 기회들을 주실 겁니다.
제가 지난주에 들었는데, 우리 교회 청소년부 친구들이 열댓 명 정도가 꾸준히 출석 하고 있는데 이번에 그중에 네 다섯 명이 1등을 했다는 겁니다. 학교도 다르고 반도 다른데, 어떤 친구는 반에서 1등 하고, 어떤 친구는 전교 1등 하고, 어떤 친구는 수학을 1등 하고… 제가 구체적인 건 잘 모르지만 어쨌든 이 아이들이 교회 행사 다 참석하고, 기도회도 열심히 나오고, 한글 교실 봉사를 비롯해 여러 가지 봉사를 하는 아이들인데 공부까지 다 잘 해주고 있는 겁니다. 물론, 공부가 전부는 아닙니다. 공부 쪽이 아니라 다른 쪽에 재능 있는 친구들도 많을 겁니다.
한국에서 어떤 분들은 ‘어차피 유학 갈 거 왜 선진국으로 가지 않고 필리핀으로 갔느냐?’라고 우려할지 모르지만, 저는 이 땅이 우리 학생들에게 특별한 기회의 땅이 될 것을 믿습니다. 여기서 1등도 하고, 2등도 하고… 한국의 대학 뿐만 아니라, 미국의 유수한 대학에 수천만원씩 장학금 받으며 입학하는 아이들도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환경 그것이 꼭 ‘홍해’와 같은 엄청 난 것은 아니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고있 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 기회를 여러분 인생의 새로 운 역사를 만드시고, 기적을 써 가시고, 믿음의 간증자가되시 길 축복합니다.
2. 시작했다면 의심치 말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다 가운데로 난 길을 따라 홍해를 걸어 건너갔고, 물은 그들 좌우에 커다란 벽이 되어 있었습 니다. 그런데 애굽 사람들과 바로 왕의 병거들과 말들과 군 사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뒤를 추격하여 바다 가운데로 따 라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른 땅을 건 너 별 무리 없이 홍해를 건넜었지만, 뒤를 추격하던 애굽 군대는 사정이 그렇지 못했습니다.
25절을 보시면, “그들의 병거 바퀴를 벗겨서 달리기가 어렵게 하시니 애굽 사람들이 이르되 이스라엘 앞에서 우리가 도망하자 여호와가 그 들을 위하여 싸워 애굽 사람들을 치는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널 때만 해도 바다 가운데 난 길은 마른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애굽의 추격대가 따라 들어갔을 땐 그 길이 질퍽해지더니 갯벌처럼 변하기도 했고, 거기에 병거의 바퀴가 빠지거나 벗겨지기도 했고 , 말들도 제대로 달릴 수가 없게 되면서 애굽 군대에는 큰 혼란과 혼돈이 시 작되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큰 두려움과 공포가 임했고, 다 시 애굽으로 되돌아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27절을 보시면,
“모세가 곧 손을 바다 위로 내밀매 새벽이 되어 바다의 힘 이 회복된지라 애굽 사람들이 물을 거슬러 도망하나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
백성들과 함께 홍해를 건넌 모세가 다시 손을 바다 위로 내밀자 양 쪽에 높은 벽으로 서 있었던 물이 점점 바닷길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물이 애굽 군인들의 발목에 차 오르는가 싶더니 무릎과 허리까지 차올랐고, 겁에 질린 애 굽의 추격대들이 왔던 길로 허우적거리며 도망하는데, 순식 간에 길은 사라지고 홍해는 원래대로 회복 되었습니다. 결국 모든 애굽 군대는 홍해에 수장된 것입니다.
그런데 27절에서
“모세가 곧 손을 바다 위로 내밀매 새벽이 되어 바다의 힘 이 회복된지라…”
그리고 21절에서는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 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어 홍해를 가를 때, 그게 쉽게 짧은 시간에 ‘짠’하고 갈라졌던 게 아니었습니다.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모세가 홍해를 다시 원래대로 되돌려 놓으려 할 때에도 ‘새벽이 되어’ 라는 표현을 보면, 짧은 시간에 된 게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홍해를 가를 때나 다시 회복시킬 때나 한참 동안이나 손을 바다를 향해 내밀고 있어 야 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만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얼마든지 ‘짠’하고 홍해를 가르실 수도 있고, 또 ‘짠’하고 홍해를 다시 원래대로 되돌 려 놓으실 능력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왜 밤새도록 바닷물이 물러가 길을 만드셨고, 다시 회복하실 때는 새벽이 되어서야 홍해가 원래대로 될 수 있었을까요? 그사이 모세는 팔이 아프도록 계속 손을 바다 위로 내 밀고 있어야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빨리 빨리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내 생각보다 그리고 내 계획보다 빨리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안해하고, 조급해하고, 힘들어 합니다.
제가 처음 교회를 개척했을 때는 빨리 교회가 부흥하고, 3~4년 만에 근사한 성전도 건축하고, 여기서 엄청난 사역들 도 많이 하고… 그런 교회가 되길 바랐었습니다. 하지만, 지 금 돌아보며 생각해 보면 그런 저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은 달랐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전능하시니깐 그렇게 빨리 부흥도 하고, 어떤 놀라운 역사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항 상 누구에게나 그런 프로세스가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사람마 다 다르고,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각 사람에게 다릅니다.
교회 개척 초창기 때에 저에게 부족한 부분들, 미성숙한 부분들, 영적으로 훈련되어야 할 부분들이 많았었던 겁니다. 그렇게 제가 부실한데 교인이 많아지고, 교회 재정이 커지고, 건물이 커진다면… 그것만큼 위험한 게 없는 겁니다. 제가 교만해 질 수도 있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도 있고, 목사여도 쉽게 타락할 수도 있는 겁니다. 개척 초기의 여러가지 고난과 시련은 저의 영혼을 단련하시고, 영적 근육들을 만들어 가시는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도 그 시간과 세월을 함께 보내고, 함께 어려움을 헤쳐 나가면서 하나가 되고, 교회를 더 사랑하게 되고, 더 겸손하게 봉사하며 섬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일들이 빨리 빨리 진행이 되지 않는다고 너무 낙심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너무 조급해 하지도, 불안해 하지도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나의 시간과 하나님의 시간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계획과 시간보다 하나님의 계획과 시간이 가장 완전하고 완벽한 것입니다.
모세가 바다를 향하여 손을 내밀고 바다가 갈라지기를 기도 했습니다. 30분이 지나고, 1시간이 지나고, 3시간, 다섯 시 간이 지나가는데 아직 큰 변화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 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믿는 게 ‘진짜 믿음’인 것입니 다. 모세는 물이 갈라질 때까지, 다시 물이 합해질 때까지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그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일을 시작했는데, 빨리 어떤 성과와 결과물 이 없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기도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빨리 응답해 주시는 게 없는 거 같다고 기도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바다의 밀물과 썰물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보면 물이 점점 차오르기도 하고, 어느 순간 보면 물이 저 멀리 빠져나가 있기도 한 겁니다. 세부에 서 공부를 하거나, 사업을 하거나,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꿈 과 비전을 갖고 나가는데… 시간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 인내 의 시간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작했다면 의심하지 마십시오. 곧 여러분의 때가 올 것입니다.
『최고의 삶(조엘 오스틴)』이란 책에 보니깐, 어느 경영자의 사무실에 걸려 있는 커다란 액자에 관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 액자에는 해변에 좌초된 큰 배의 그림이 있고, 그 배는 모래 톱에 푹 박힌 듯 움직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배는 마치 죽은 듯 하고, 그의 시대는 끝난 것 같고, 더 이상 어떤 소망 도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에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바닷물이 다시 들어오면 좌초되었던 배가 다시 그 목적을 찾게 되리라. 배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 가리라”
지금 여러분의 인생에 운이 없게도 썰물을 만나 내 인생의 배가 해변 모래톱에 처박혀 있을 수도 있을 겁니다. 내 인생의 전성기는 끝난 거 같고, 더 이상 내게 소망도 없어 보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아직 여러분의 전성기는 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시간이 필요할 뿐입니다. 믿음의 인내가 필요할 뿐입니다. 이제 밀물이 들어오면 내 인생의 배는 다시 떠오를 것입니다. 다시 나의 새로운 전성기가 시작될 것입니다. 썰물은 다시 밀물이 되어 들어올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새로운 기회가 시작될 것입니다.
7 우리의 조상들이 애굽에 있을 때 주의 기이한 일들을 깨닫지 못하며 주의 크신 인자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바다 곧 홍해에서 거역하였나이다
8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구원하셨으니 그의 큰 권능을 만인이 알게 하려 하심이로다
9 이에 홍해를 꾸짖으시니 곧 마르니 그들을 인도하여 바다 건너가기를 마치 광야를 지나감 같게 하사
10 그들을 그 미워하는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며 그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셨고
11 그들의 대적들은 물로 덮으시매 그들 중에서 하나도 살아 남지 못하였도다
12 이에 그들이 그의 말씀을 믿고 그를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도다
오늘 본문인 시편 106편 6~12절까지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뒤 홍해 해변에 진을 치고 있었을 때의 일입니다. 애굽의 바로 왕과 백성들은 열 번의 재앙을 통해 두 손 들고, 노예로 부리던 60만 명(200만 명 이상)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풀어줬습니다. 하지만, 노예들이 없이 며칠을 지내보니불편한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었던 겁니다. 그래서 험하고 고된 일을 해 주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풀어준 걸 후회하고, 애굽의 모든 병거와 군사를 동원해 그들을 뒤쫓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애굽 군대가 이스라엘 진영에 바짝 뒤쫓아 오자공포에 질린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향해 원망했습니다.
<불평과 원망을 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 사람들은 영광 받을 일에는 자기가 앞에나서지만, 어떤 문제 앞에서는 나 대신에 누군가가 그 책임을 지길바랍니다. 그 문제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싶은 본능일 것입니다.
이 사건을 소개하고 있는 출애굽기 14장 11절에 보면, “…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출14:11)” 이 구절에서 ‘이끌어 내어’라는 표현이 두 번에 걸쳐 나오는데, 이스라엘 백성들도 모세의 말에 동의했기 때문에 출애굽을 한 겁니다. 그런데 그들은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라는 말을 하며, 그 모든 책임이 모세에게 있다는 겁니다.
불평과 원망의 사람의 특징두 번째는 ‘두려움과 불안감 크다.’ 는 것입니다. 지금 벌어진 이 문제 때문에모든 게 망쳐지고, 모든 게 끝날 거 같은 불안감이 큰 겁니다. 그러면 그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그 대안을 찾고,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게먼저일 텐데, 두려움과 불안감이 크다 보니깐 ‘불평과 원망’부터 하는 겁니다.
출애굽기 14장 10절에 보시면,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여기서 ‘여호와께 부르짖고’라고 되어 있지만, 이어지는 11절에서 그들이 모세를 향해 강하게 원망하고불평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들의 부르짖음과 기도는 온전한 기도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전에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라는 말씀이 있는데, 그들 가운데 불안감과 두려움과 공포가 매우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불평과 원망의 사람의 특징세 번째는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벌어진 상황 때문에뭔가 잘못될 거 같고, 실패할 거 같고, 다 망칠 거 같은 불안감 때문에 불평하고 원망하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강한 믿음을 갖고 있다면,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나는 망하지 않는다. 나는 하나님이 붙들어 주신다. 나는 반드시 다시 일어난다. 나는 승리할 것이다’ 이런 믿음이 있는 사람은 결코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시편 106편 7절을 보시면, “우리의 조상들이 애굽에 있을 때 주의 기이한 일들을 깨닫지 못하며 주의 크신 인자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바다 곧 홍해에서 거역하였나이다” 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하기 전에 애굽에 있을 때,모세를 통해 일어난 열 가지 재앙을 목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크신 분이신지, 하나님께서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신지, 그분의 능력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이미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믿지 않고 있었던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애굽의 바로 왕은얼마나 강력한 권력을 갖고 있었겠습니까? 수백 년 동안 바로의 말 한 마디가 얼마나 강한 힘이 있는지를 봤을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그 바로 왕을 압도했고, 그 모든 애굽의 신들과 주술사들과 군대까지 압도해 버렸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능력 앞에 벌벌 떨었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편에 계셨던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믿는다면 두려움과 불안과 걱정과 염려가 있었겠습니까? 아니, 어떤 상황이 벌어지면 두려울 수도 있고, 불안할 수도있을 겁니다. 하지만, 내 믿음의 크기가 내 앞에 있는 문제보다 더 커지면 그 문제와 상황은 전혀 나를 두렵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풍랑이 일던 바다 위를 걸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모든 문제와 상황이 아닌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며 나아갔기 때문에 역사상 최초로 물 위를 걸은 사람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하지만, 바람과 파도를 볼 때는 물속에 빠져 버렸던 것입니다.
불평과 원망에 빠지는 세 가지 이유를 기억하십시오. ▪ 첫째,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 ▪ 둘째, 두려움과 불안감이 크다. ▪ 셋째, 믿음이 없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모든 문제보다 크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과거 어떤 일들을 행하셨고, 앞으로 어떤 놀라운 일들을 행하실 지를 기대하십시오. 모든 불평과 원망이 감사와 찬양으로 바뀌게 될 줄 믿습니다.
기억해야 할 한 문장: 어떤 상황이 벌어지면 두려울 수도 있고, 불안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내 믿음의 크기가 내 앞에 있는 문제보다 더 커지면 그 문제와 상황은 전혀 나를 두렵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