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 성취의 과정” – 느헤미야처럼 기도하라(17) –

<느헤미야 5:14~19> 

100여년 전만해도 미국이라는 나라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들이 현재의 미국에서는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흑인 출신인 사람들이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들 중에 하나가 되어 있는 겁니다.

‘버락 오바마(Barak Obama)’는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오프라 윈프리(Oprah Winfrey)’는 방송인으로서 미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여성 중에 한 명이며, 미국여성 중에 가장 크게 성공한 여성입니다. ‘코피 아난(Kofi Annan)’ 유엔 前 사무총장은 아프리카 가나 사람으로서, 미국의 적극적 지지에 힘입어 세계의 대통령이라 할 수 있는 UN의 사모총장을 역임했습니다. 영화배우 ‘윌 스미스(Will Smith)’는 성공한 흑인 영화배우이고,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은 고인이 되었지만, 팝의 황제로 불리었습니다.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는 현존하는 팝의 여왕으로 불리는 가수입니다. ‘타이거 우즈(Tiger Woods)’는 역사상 최고의 골프선수로 인정받고 있는 스포츠 스타입니다.

미국의 흑인들 입장에서는 가장 고마운 사람이 믿음과 기도의 사람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 : 1809~1865)’일 겁니다. 링컨은 1858년 ‘노예제도는 악의 제도’라고 비판하면서 정치적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1860년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지만, 남부11개 주의 경우는 노예제 찬성쪽이었기 때문에 거센 반발에 부딪치고, 결국 남북전쟁이 터지게 됩니다. 하지만 링컨은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1863년 1월 1일 ‘노예해방선언’을 하고, ‘노예제 폐지’법안을 통과시키게 됩니다. 그리고 1865년 4월 11일 ‘흑인투표권’에 대한 연설을 하고 며칠 지나지 않은 4월14일 남부의 반대파에 의해 암살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날이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신 <고난주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의 노예 상태에 있던 우리를 자유케 하시기 위해 십자가 희생을 치르신 날과 미국의 노예들을 해방하기 위해 삶을 바쳤던 링컨이 암살당한 날이 같은 주간이었던 겁니다.

우리에게 어느 날부터 어떤 비전이 임할 수 있습니다. 그 비전이 분명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큰 꿈과 계획일 수 있습니다. 그 비전이 좋고 훌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비전이 좋고 훌륭하다고 해도 비전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비전, 아브라함 링컨의 비전 그리고 예루살렘 성벽 재건의 비전을 갖고 있었던 느헤미야의 비전 역시 그 비전성취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1. 권리를 포기하라

140여 년 동안 무너져 있었던 ‘예루살렘 성벽 재건 비전’은 140여 년 전 바벨론에 의해 나라를 잃은 유대인들에게는 꿈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 때 바벨론 느브갓네살 왕에 의해 왕궁과 성전 그리고 성벽 전체는 모두 파괴되어졌었습니다. 그리고 느헤미야 시대 당시의 통치자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 왕은 예루살렘 성벽재건을 왕명으로 금지시켜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느헤미야를 통해 그 일을 이루시고자 기적적으로 페르시아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이 움직여졌고, 느헤미야는 그 위대한 비전을 이루고자 예루살렘으로 온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라는 위대한 비전을 갖고 있었지만, 그 비전 성취의 과정은 그리 순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해 보니, 예루살렘을 둘러싼 여러 족속들이 그 성벽재건의 대적으로 등장했습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협박과 적극적 방해 계략을 세웠습니다. 또 때마침 큰 기근으로 인해 백성들은 식량난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더 고통을 받게 된 것은 귀족들과 민장들과 같은 상류층들이 가난한 백성들을 대상으로 그런 어려운 시기에 고리대금으로 횡포를 부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의 마음은 계층 간의 심각한 분열상태가 되어 버려있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성벽재건>이란 비전을 이루어 간다는 것은 느헤미야에게는 너무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비전이란 것이 쉽게 되는 것이라면, ‘비전’이란 거창한 말을 쓰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큰 비전을 이루는데 어려움들이 있지만, 그 장애물들을 넘어 비전을 성취하기 위한 느헤미야의 첫 번째 결단은 ‘개인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 이었습니다.

14절 말씀을 보시면,

“또한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곧 아닥사스다 왕 제20년부터 제32년까지 12년 동안은 나와 내 형제들이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느헤미야가 유다 땅에서 12년 동안 총독으로 있으면서 총독으로서 당연히 받아도 되는 권리를 포기했다는 말입니다.

15절 말씀도 보시면,

“나보다 먼저 있었던 총독들은 백성에게서,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그들에게서 빼앗았고 또한 그들의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

느헤미야가 총독으로 부임하기 전에 있었던 총독들이 유다 백성들로부터 은 사십 세겔을 빼앗았다는 것은 백성들로부터 과중한 세금을 거둬들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은 한 세겔이 노동자의 나흘치 품삯에 해당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40세겔이면 매년 노동자들이 네 다섯 달이 넘도록 일해서 벌 수 있는 엄청난 금액을 세금으로 냈고, 거기에 곡식과 포도주 역시 따로 거둬들였다는 겁니다. 그리고 총독과 관원들은 백성들을 압제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백성들의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일반 백성들과 상류층간의 빈부의 격차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컸고, 백성들은 총독과 관원과 상류층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백성을 압제하는 사람들일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유다 공동체의 사회와 경제 그리고 정치 등의 부분이 심각한 분열 상태였던 것입니다.

요즘 대한민국의 청년들을 가리키는 신조어가 생겼습니다.

청년들의 취업난이 심각해지면서, <3포 세대> 라는 말이 생겼는데, 비정규직으로서 받는 적은 급료 또는 취업을 못한 젊은이들의 경우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해야 한다는 겁니다. 여기에 <5포 세대>가 생겼는데, 재정적으로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는 게 어려우니깐, <내 집 마련>과 <인간관계>까지 포기해야 한다는 겁니다. 커피 한잔에 8천원 9천원을 내야하니깐 누구 만나면 돈이 드는 겁니다. 그러니깐 그런 것까지 포기한다는 겁니다. 작년 세월호 사건 이후에 젊은 세대들의 정치권과 기성세대들을 향한 실망감에 미래에 대한 <희망>과 <꿈> 마저 포기한다고 해서 <7포 세대>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N포 세대>라는 말이 생겼는데, 수학기호에서 쓰는 아직 정해지지 않은 부정수를 ‘N’이라고 하는데, 결국 N포 세대는 나머지도 다 포기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의 한국의 젊은이들이 얼마나 심각한 위기 가운데 있는 것입니까? 젊은이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정치권, 교육계, 종교계, 문화계, 경제계… 그 어떤 영역도 신뢰하지 않고, 국민들이 사분오열 정도가 아니라, 산산이 분열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런 상태에 있는 사회와 공동체를 치유할 수 있는 방법과 리더십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권리를 포기하라”는 겁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이 그것을 보여주었던 겁니다.

페르시아 왕에 의해 유대에 파견된 총독이라면, 당연히 유다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거둬들이고, 그 세금의 한 부분은 페르시아 왕에게 바쳐야 했고, 나머지는 유다 총독부를 운영하는데 사용해야 했을 것입니다. 총독부 운영에 유다 총독이었던 느헤미야 자신의 급료가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14절, 15절 말씀을 통해서 볼 때, 총독으로서 느헤미야는 백성들로부터 분명 세금은 거둬들였을 겁니다. 그 세금으로 페르시아 왕에게도 바치고, 총독부 운영에 필요한 최소의 경비는 사용했을 겁니다.

그런데 정작 유대의 총독이었던 자신을 위해서는 한 푼도 쓰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것도 12년간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백성들이 너무 어려우니깐 느헤미야는 자신에게 들어가는 돈은 백성들로부터 거둬들이지 않았던 겁니다. 그렇게 백성들에게 있었던 과세의 짐을 덜어주었던 겁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지금의 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힘과 권력과 지위를 갖고 있는 이들이 ‘권리를 포기하는 것’ 입니다.

왜 교회에 대해서 신뢰를 하지 않고, 개독교라는 말이 나왔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사랑하셔서 교회를 부흥케 하셨고, 많은 교회들이 대형교회를 넘어 몇 만 명씩 모이는 메가처치(Mega Church)가 되었습니다. 세계 교회 역사에서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예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교회를 비판하는 것은 목회자와 교회들의 ‘권리포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3포, 5포, 7포를 얘기하고 있는 때에 목회자들과 교회들의 너무나도 사치스럽게까지 보이는 화려한 모습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국민들이 정치권에 실망하는 이유도 동일합니다. 가정에서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여러분이 속한 어떤 직장과 그룹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우리에게 위기와 분열 속에서 그것을 뚫고 비전을 향해 전진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권리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당연히 가질 수 있는 권리고, 당연히 누릴 수 있는 특권일 수 있지만 때로는 그것을 포기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비전을 이루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고린도전서 9:4절, 5절을 통해서 자신의 권리를 기꺼이 포기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4절)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5절)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베드로)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그리고 6~11절까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그 수고에 대한 댓가를 받고 생활하는 것은 율법과 성경 말씀에도 맞는 당연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2절 말씀에서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바울도 마땅히 그 권리를 쓸 수 있지만, 복음을 위해서 그 권리를 포기하고, 결혼도 하지 않고, 자비량 선교를 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마땅히 누릴 수 있는 특권과 권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위해 기꺼이 그 권리를 포기할 수 있는 것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특권입니다.

우리 앞에 있는 어떤 큰 비전, 위대한 하나님의 비전을 성취하기 위한 첫 번째 과정은 ‘권리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비전을 향해 나아갈 때, 내 권리만 주장하고 있다가는 결코 비전을 이루어갈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정말 비전을 이루기를 원한다면, 때로 우리의 특권과 권리도 포기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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