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7:1~2>
컴퓨터와 관계된 용어 중에 ‘트로이 목마’라는 바이러스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한 프로그램인데, 그걸 잘못 실행하면 악성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심하게는 시스템 드라이브를 완전히 파괴해서 컴퓨터를 한 순간에 고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 바이러스의 이름을 왜 ‘트로이 목마’로 했냐면,
지금부터 3,200년 전쯤인 기원전 12세기에 터어키의 ‘트로이’라는 도시국가가 있었습니다. 그 트로이의 왕자가 그리스의 스파르타에 외교사절로 갔었습니다. 그런데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를 보고 반했습니다. 그래서 그 왕비를 납치해서 트로이로 데리고 갔습니다. 이에 격분한 스파르타의 왕은 그리스 각 도시국가 왕들과 연합해서 지중해를 건너 트로이와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그러나 트로이를 쉽게 함락할 수 없었습니다. 무려 10년 동안 그 전쟁이 끝나지 않았는데, 먼저 지친 것은 그리스 군대였습니다. 집을 떠나 오랫동안 전쟁을 치르던 그리스 군대의 사기는 바닥에 떨어졌고, 군대를 철수해야만 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 때 그리스 측에서 묘안을 낸 것이 ‘트로이 목마’입니다. 그리스 군대는 그 거대한 목마를 두고 철수하는 것처럼 위장을 합니다. 그리고 트로이 군대는 그리스가 전쟁을 포기하고 돌아가면서 남겨둔 거대한 목마를 그 오랜 전쟁의 ‘승리의 전리품’으로 생각하고 성 안으로 끌고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 날 밤 승전 기념 파티를 열고 모두가 승리에 취해 잠들어 있을 때, 그 목마에 숨어 들어왔던 몇몇의 그리스 병사들이 성문을 열어 주고, 밖에서 매복하고 있었던 그리스 군대가 기습공격을 통해 트로이 왕을 죽이고, 성을 불태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두 가지 교훈을 주는데,
첫째는, ‘은밀하게 침투한 내부의 적이 가장 위험한 적이다’라는 겁니다.
둘째는, ‘승리에 젖어 방심하면 승리를 빼앗긴다’는 겁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재건’이라는 위대한 비전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어려움과 장애물과 방해들을 극복했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어렵게 얻은 승리를 잘 지키지 않으면, 그 승리를 한 순간에 다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오랜 시간에 걸쳐 어떤 비전과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했고 결국 그 승리를 맞보게 되었는데, 그것을 잘 지키지 않으면 트로이 목마의 예처럼 하루 밤의 짧은 승리를 맛보고, 그 승리를 빼앗길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주어진 승리를 잘 지켜나가기 위한 방법을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충성된 사람과 함께하라’는 겁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시면,
“성벽이 건축되매 문짝을 달고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을 세운 후에”
140여 년 동안 허물어져 있었던 예루살렘 성벽이 기적처럼 52일 만에 완공이 되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성문을 달고, 문지기를 세우고, 노래하는 자들(찬양하는 자들)을 세웠는데 그들은 대부분이 레위사람들이었습니다. 레위 사람들은 원래 성전의 일을 위해 구별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문에 찬양하는 자들을 세웠다고 했는데, 역대상 25장에 보면 다윗왕은 레위인들을 통해 찬양대를 조직하게 했고, 그 찬양대는 24개의 찬양대가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다윗 왕처럼 그렇게 레위인들을 찬양대와 문지기들로 세웠던 겁니다.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중에 구별되어서 그들의 평생을 하나님께 헌신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태생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쓰시기를 기뻐하시는 겁니다.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써 주소서’라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님은 기쁘게 사용하시는 겁니다.
교회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던 주간이 있었습니다. 그런 일들 때문에 당장 돌아오는 주일 점심식사 당번에 문제가 생긴 겁니다. 매 주일마다 예배 후에 함께 나누는 점심식사 때문에 ‘이번 주는 어떻게 해야 하나?’하고 걱정하고 있었는데, 제가 먼저 부탁한 것도 아닌데 몇몇 분들이 연락이 왔어요. 그 분들은 그 주 식사 담당자들도 아닌데, ‘이번 주일에는 저 하고, 누구하고 함께 점심 돕기로 했어요. 목사님 걱정 하지 마세요’ 그러시는 겁니다. 그게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저와 제 아내는 갑작스럽게 벌어진 교회의 여러 가지 아픔과 어려운 문제로 정신이 없던 한 주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 때 도우셨던 집사님께서 그런 말씀을 해 주시는 겁니다.
“그 때, 저희도 너무 혼란스럽고 마음도 아프고 그랬었는데 목사님 사모님은 얼마나 힘드실까? 내가 뭘 해야 할까? 생각을 했는데 주일 식사 봉사가 생각나더라구요. 그래서 그 때 그렇게 하게 되었어요. 앞으로도 그럴거예요. 목사님 걱정 마세요”
그러시는 겁니다. 너무 마음이 아프고 어려운 중에 교회를 사랑하시는 충성스러운 그 마음이 지금까지 얼마나 고맙고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그런 위로가 아니었다면, 저는 그 어려움 속에서 지쳐 쓰러졌을 지도 모릅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아마도 그 마음을 결코 잊지 못할 겁니다.
교회의 일과 사역은 목사님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어떤 일을 부탁하려고 할 때, 제가 주저주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 분이 이 부탁을 들어줄까? 거절하면 어떻게 하지?’ 이런 생각이 솔직히 드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의 경우는 마치 레위인들 처럼 이미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삶을 드릴 준비가 되어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뭔가 부탁을 드리면, ‘목사님 걱정 마세요. 제가 알아서 잘 하겠습니다’ 그러시는 겁니다. 그게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모릅니다.
디모데후서 2:2절 말씀에 보시면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충성된 사람들’을 통해서 시작되고, 충성된 사람들에게 계승되고, 충성된 사람들을 통해 마쳐지는 것입니다.
잠언 25:13절 말씀에서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
하셨습니다. 충성된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 역시 고린도전서 16:17~18절을 보시면,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온 것을 기뻐하노니 그들이 너희의 부족한 것을 채웠음이라. 그들이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으니…”
‘스데바나, 브드나도, 아가이고’ 이 세 사람은 바울 사도와 그 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시원하셨겠습니까?
느헤미야가 찾은 사람은 실력 있고 능력 있는 사람을 찾은 것이 아니라, 충성된 사람을 찾았던 겁니다. 레위인들은 자신들의 삶을 하나님께 바친 사람들
이기 때문에, 느헤미야는 그들을 성문지기와 찬양하는 자들로 세웠던 겁니다.
그 예루살렘 성을 다스릴 사람을 세우는 기준 역시 ‘충성됨’이었습니다. 2절 말씀을 보시면,
“내 아우 하나니와 영문의 관원 하나냐가 함께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하나냐는 충성스러운 사람이요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리 중에서 뛰어난 자라”
느헤미야의 아우 ‘하나니’ 그리고 관원이었던 ‘하나냐’를 예루살렘을 다스릴 사람들로 세웠는데, 그 기준을 “충성스러운 사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충성스러운 사람이요’를 NIV 영어번역에서는 ‘A man of integrity(고결, 성실, 진실한 사람)’으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로 알고 있는 갈라디아서 5:22절 말씀을 보시면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faithfulness)과 온유와 절제니”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결국 우리가 사람들 사이에서 맺어져야 할 삶의 열매들을 가리키고 있는 겁니다. 그 중에 ‘충성’은 사람들 사이에서 faithfulness(신실함) 즉,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 사람을 믿을 수 없으면 아직 성령의 열매 중에 충성이라는 열매가 맺혀지지 않고 있는 겁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데,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는데, 교회 생활을 그렇게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교회에서 무슨 직분을 갖고 있다고 하는데… ‘그 사람을 믿을 수 없다?’ 그렇다면, 그는 아직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 ‘충성’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녀요. 성경을 많이 알아요. 기도를 그럴 듯하게 유창하게 해요. 그런데 그 전에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도, 교인들 간에도 ‘충성스러운’ 즉 ‘믿을 수 있는, 신실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사람들 사이에서도 ‘충성스러운, 믿을 수 있는, 신실한, 고결하고 성실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역시 그런 사람들과 함께 일할 때 성공할 수 있습니다.
2절에 등장하는 ‘하나냐’라는 사람은 세상에서는 또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충성스러운 사람’이었고,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교회 열심히 다닌다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까? 성경 많이 알고 기도 많이 한다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께 충성스런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고 계시는데, 하나님께서 다 듣고 계시는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말해야 하며, 어떻게 반응해야 하며,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며,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사도행전 6장 3절에 보시면, 사도들이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를 세워 구제와 봉사의 직무를 맡길 때 어떤 기준으로 그들을 세웠습니까?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는 누구를 가리키는 거겠습니까? ‘성령’은 ‘믿음’과 관계된 단어입니다. ‘지혜’는 ‘인격’과 관계된 단어입니다. 단순히 어떤 지식만 많은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라고 말씀하신 잠언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인격이 다듬어지고, 그 말씀에 의해서 살아가는 인격을 말합니다. ‘칭찬’은 ‘삶’과 관계된 겁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것이 비로소 삶으로 나타나고, 그것은 ‘칭찬’으로 열매를 맺어가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지도자를 사람 앞에서도 충성된(신실한, 믿을 수 있는) 사람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즉 하나님 앞에서도 충성된 사람이었던 하나니와 하나냐를 선택해서 세웠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벽재건이라는 위대한 비전을 이루기까지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헤쳐가야 했습니까? 그렇게 어렵게 거기까지 왔는데, 사람 한번 잘못 세우면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승리를 잘 지켜가기 위해서 ‘충성된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 그래서 중요한 겁니다. 나 역시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충성된 사람이 되어야 하고, 우리가 함께 일하는 사람들 역시 충성된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마음이 변하고, 왔다갔다하는 사람과 일하면 여러분만 더 힘이 들게 될 것입니다. 좀 실력이 없고 부족해도 늘 그 자리를 지켜주는 신실한 사람과 함께 일하십시오.
우리에게 주어진 그 승리를 잘 지켜가기 위한 첫 번째 방법은 충성된 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겁니다.
“승리를 지켜라(1) : 충성된 사람과 함께하라”
– 느헤미야처럼 기도하라(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