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잊지 말라(Ⅲ)” – 느헤미야처럼 기도하라(27) –

<느헤미야 9:16~17> 

반려동물 중에 개(강아지)는 그 어떤 동물보다 인간하고 친밀한 거 같습니다. 우리와 말은 통하지 않고, 사람만큼 지능이 높지도 않지만 어떤 반려동물 보다 인간과 깊이 교감하는 거 같습니다.

아르헨티나의 한 공원묘지에서 지내는 개가 한 마리 있습니다. 셰퍼트 잡종인 이 개의 주인은 ‘미겔 구스만’이란 사람이 주인이었는데, 이 개가 무덤에서 지내는 이유가 있습니다. 2006년 미국의 ABC 방송국의 보도를 통해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 개의 주인인 ‘구스만’씨가 나이가 들어 죽기 전인 2005년 구스만 씨의 아들 집에 이 개를 맡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개가 도망을 간 겁니다. 그 후에 구스만씨도 죽게 되었는데, 어느 날 유족들이 무덤에 갔더니 그 무덤 곁을 캡틴이 지키고 서 있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도 6년 이상을 주인의 무덤을 떠나지 않고 계속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겁니다. 가끔 캡틴은 구스만의 가족들이 사는 집에 놀러가기도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밤이 되면 어김없이 공원묘지 구스만의 무덤 곁에서 잠을 잔다고 합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변함없이 수년간을 그렇게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개의 이야기와 비슷한 여러 충견(忠犬)에 대한 이야기들은 종종 화재거리로 등장합니다. 주인의 무덤 앞에서 마치 사람이 우는 것처럼 우는 개도 있고, 주인이 자살하려고 철로에 뛰어 들려했더니 그걸 막아서는 개도 있고… 가끔은 반려견이 어떤 사람들보다 더 낫다고 생각들 때가 있습니다.

이사야서 1:2~3절 말씀에 보시면,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짐승과 가축보다도 사람이 못났을 때가 있다는 겁니다. 짐승도 배반하지 않고 끝까지 신의를 지키는데, 사람은 작은 이익 하나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등을 돌리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를 잊고 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는 과거에도 있어왔고, 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현재 속에도 여전히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한없는 그 ‘은혜를 잊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1. 선택해 주신 은혜

유다왕국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했을 때부터 140여 년 동안 허물어져 있었던 예루살렘 성벽이 기적적으로 쌓여졌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전이 있었던 예루살렘성에 모여서 오랫동안 드려지지 않았던 <나팔절>, <초막절>과 같은 절기들을 지키게 됩니다.

7월15일부터 22일까지 8일간 드려졌던 초막절을 큰 은혜 중에 마쳤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통해 이스라엘에는 영적인 큰 부흥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초막절이 끝난 뒤 하루를 쉬고, 그 다음날부터 또 다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1절과 2절(쉬운성경) 말씀을 보시면

“그 달 24일에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모였습니다. 그들은 금식했으며 거친 베옷을 입고 머리에 재를 뒤집어썼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른 모든 민족과의 관계를 끊었습니다. 그들은 서서 자기와 자기 조상의 죄를 털어 놓았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자신들과 그들의 조상들이 하나님 앞에 잘못 살아왔던 것을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회개의 의미로 그들은 금식을 했고, 베옷을 입고, 머리에 재를 뒤집어썼습니다. 그리고 민족의 영적 순수함을 잃게 했던 이방인들과의 관계를 끊으며, 자신들과 그들의 조상들의 죄를 자백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루의 낮을 보통 해가 뜨는 오전6시부터 해가 지는 오후6시까지 12시간으로 계산을 합니다. 새벽같이 모인 그들은 3시간 동안은 제자리에 서서 율법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레위인들이 율법책을 낭독할 때 그 말씀을 일어선 상태로 3시간 동안 들었습니다(3절). 그 말씀을 통해 그들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 많은 죄 가운데 살고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3시간 동안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고, 여호와께 경배하며 엎드리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3절). 그 때 레위 사람들 중에 제사장들로 보여 지는데, 그들은 말씀의 단상에 올라가서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일을 합니다(4절). 또 다른 레위 사람들은 나머지 시간에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을 담당했습니다(5절).

그리고 느헤미야9:5절~38절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올려드린 찬송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의 믿음의 결단까지를 담고 있습니다. 제사장들이 선포한 말씀에는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여 포로에서 귀환하여 살아온 그 당시까지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펼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 역사 곳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7절을 보시면,

“주는 하나님 여호와시라 옛적에 아브람을 택하시고 갈대아 우르에게 인도하여 내시고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시고”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이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인데, 그는 원래 지금의 이스라엘 땅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세계 최초의 문명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인 ‘우르(Ur)’라는 지역에 살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본래 하나님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는 그곳에서 다른 우상을 섬겼었습니다(수24:2). 아브라함도 당연히 그 가문의 신을 섬겼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혀 알지도 못하고 우상을 섬기며 살아가던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6절 말씀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라고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교회 나온 거 같고, 내가 예수를 믿어 구원 받은 거 같지만, 그 이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에베소서 1:4절 말씀에서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선택받을 만큼 선하거나 의로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신명기 7:6절과 8절 말씀을 보시면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밀미암아…”

우리를 택하신 이유가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선택하셨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의 도시에서 우상을 섬기고 살던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신 것도 은혜고, 우리 역시 아브라함과 동일한 은혜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선하거나, 의롭거나, 어떤 공로가 있거나, 강한 의지를 갖고 있거나, 자랑할 만한 그 무엇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선택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부족해도, 연약해도, 자주 넘어져도, 자주 실수해도, 자주 죄에 빠져도, 실력이 없어도, 자랑할 것이 없어도, 가진 것이 없어도, 어떤 배경이 없어도… 그래도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를 선택하여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신 것입니다. 그 은혜를 잊으면 안 됩니다.

2.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은혜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 그리고 그의 아들 야곱 때까지는 가나안 땅에 살았었습니다. 그런데 기근이 왔고 그들은 애굽(이집트)으로 식량을 찾아 갔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아들 요셉이 그곳에서 애굽의 국무총리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쩌다 보니 애굽 땅에 정착했는데, 그렇게 한번 정착을 했더니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살게 되었는데, 요셉 사후에 애굽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핍박하기 시작했고, 노예로 삼았습니다. 고통 받던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했습니다.

9절 말씀입니다.

“주께서 우리 조상들이 애굽에서 고난 받는 것을 감찰하시며 홍해에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통 중에 부르짖을 때 들으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도우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때마다 하나님은 그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사기 말씀을 보시면 계속 반복되는 표현이 나오는데, ‘부르짖다’는 표현이 무려 열세 번에 걸쳐서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변의 민족들로부터 억압을 받고, 고통을 받게 되면,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너희는 과거가 부끄럽지도 않냐? 너희들이 저지른 죄들은 결코 가벼운 죄들이 아니다. 나는 너희들 도와 줄 마음 없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여러 차례 반복적인 실수를 하는 사람을 우리는 얼마나 참아줄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람을 또 다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부르짖으면 그들을 모든 고통 속에서 구원하시는 겁니다. 그들에게 ‘사사’라는 구원자를 보내셔서 그들을 고통 속에서 건져주시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외적의 침입이 없는 ‘평화시대’를 살게 됩니다. 아무 걱정도 없이 평화롭게만 살면 좋겠는데, 사람은 그렇게 여유가 생기면 그 물질과 그 시간과 환경을 좋은 쪽으로 활용하기 보다는 죄 짓는 쪽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하나님 앞에 범죄 하는 겁니다. 그러면 주변에 있었던 외적들이 침략해서 또 이스라엘 백성들을 억압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고통 속에서 또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겁니다.

그렇게 부르짖으면 ‘너희들 이게 도대체 몇 번째냐? 나는 더 이상 도와 줄 수 없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또 손을 내밀어 주시고, 또 일으켜 주시고, 또 구원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사사기의 역사 속에만 십 수차례에 걸쳐서 등장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사기의 역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 40년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 역사 속에 계속 반복되어 온 패턴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범죄하고, 하나님께 회개하며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번번히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할 자격조차 없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하나님 앞에 나아가 부르짖으면, 우리의 기도, 우리의 소원을 응답해 주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응답해 주셨고, 이후로도 하나님은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3. 한없는 용서의 은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 속에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한없는 용서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16절과 17절 말씀을 보시면,

“그들과 우리 조상들이 교만하여 목을 굳게 하여 주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거역하며 주께서 그들 가운데에서 행하신 기사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며 패역하여 스스로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 종 되었던 땅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나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므로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

이 구절들 속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비슷비슷한 의미의 단어들로 일곱 차례에 걸쳐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교만하며, 목을 굳게 하여,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거역하며,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기사와 기적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며, 패역(반역, 배반)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악한 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러나’ 이 단어 자체가 엄청난 은혜인 겁니다. 이 ‘그러나’ 안에는 ‘In spite of(그럼에도 불구하고)’란 뜻이 담겨져 있는 겁니다. 우리의 상태와 조건, 우리의 과거, 우리의 죄, 우리의 연약함, 우리의 악함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용서하시는 하나님, 은혜로우신 하나님,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더디 노하시는 하나님, 인자가 풍부하신 하나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민수기 14:22절에서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는데, 이때가 광야생활 초기에 말씀하신 겁니다. 광야생활 초기면 출애굽한지 일이년도 안 되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열 번이나 시험했다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반복적으로 하나님 앞에 범죄 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그 짧은 시간 안에도 그들이 그랬으면,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살펴봤을 때 그들의 죄가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눈이 먼 분 같아 보입니다. 이렇게 더러운데, 이렇게 악한데, 이렇게 약한데, 이렇게 부족한데, 이렇게 자주 실수하며 사는데, 이렇게 죄가 많은 대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한 한 없이 용서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하나님 앞에 얼마나 뻔뻔할 때가 많습니까? 완벽하지도, 온전하지도 않기에 주일날 이렇게 은혜 받고 결심하고 믿음으로 살려고 해도 또 넘어지고, 또 범죄하고, 또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주일 날 주님 앞에 와서 울며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한 없는 용서의 은혜를 잊지 마십시오.

4. 새로운 기회를 주신 은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죄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완전히 멸망시키지 않으셨다는 겁니다.

31절 말씀을 보시면,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그들이 바벨론에 전쟁 포로로 잡혀갔을 때, 나라는 망했고, 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다시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은 꿈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완전히 멸하시지 않고, 그들의 자손들을 남기셔서 다시 유다 땅으로 귀환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126편 1절 말씀에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아주 멸하지 않으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한번 기회를 주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부족한 거, 죄 많은 거, 자주 넘어지고, 실수하는 거, 의지도 부족한 거, 큰 능력이 없는 것도 잘 아십니다. 여러분의 과거에 많은 실패와 인생 속의 좌절들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손을 내미시고, 우리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면서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전의 경험한 어떤 과거와 상황들은 문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다시 기회를 주시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자 하셨을 때, 어차피 우리의 겉모습과 능력을 보고 사랑하시기로 하셨던 것이 아니셨습니다. 우리의 조건이 어떠하든지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를 사랑하기로 했다. 나는 너를 선택했다. 나는 너의 부르짖음을 들어 줄 것이다. 나는 너를 한없이 용서 하기로 했다. 나는 너에게 새로운 기회를 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잊지 마십시오.

“은혜를 잊지 말라(Ⅲ)”

– 느헤미야처럼 기도하라(27) –

1. 선택해 주신 은혜

2.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은혜

3. 한없는 용서의 은혜

4. 새로운 기회를 주신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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