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13:1~14>
네덜란드의 한 지역에 가면 ‘네덜란드의 북극광’이란 것을 볼 수 있는데,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네덜란드의 ‘로세가르더(Daan Roosegaarde)’라는 한 디자이너가 조명을 통해서 ‘가상의 강’을 빛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작품은 사람들이 땅 위를 걷고 있는데, 그 사람들 위로 마치 강이 넘실대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 디자이너가 이 작품을 만들 게 된 동기가 ‘만약 네덜란드에 제방이 없다면…?’ 이란 생각에서 그런 작품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네덜란드는 해수면보다 육지가 낮은 부분이 많습니다. 그래서 나라 이름도 ‘Nether(low : 낮은) + lands(땅)’이라고 한 겁니다. 국토의 25%는 해수면 보다 낮고, 65%는 저지대이고, 최고로 높은 육지가 해발 322미터 정도 됩니다. 그렇다 보니 바닷물이 범람하거나 홍수 등으로 강물이 범람할 경우 큰 재난이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총연장 17,000km에 달하는 제방과 댐을 건설해서 바다와 강을 막아 생활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제방의 작은 틈에서 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그것을 손가락으로 막다가 죽은 소년의 이야기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소년이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다 우연히 보게 된 제방의 작은 틈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처음에는 손가락으로 막았고, 센 물살에 틈이 커지자 손바닥과 주먹으로, 그 다음에 팔뚝과 온 몸으로 막다가 소년은 죽었습니다. 하지만, 소년의 그 희생으로 제방이 무너지는 것을 막았고, 마을은 수몰되지 않았습니다.
재앙이라는 것이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임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경우는 아주 사소하다고 생각하거나, 작은 일이라고 여겨지는 작은 틈이 점점 커져서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커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쩌면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틈은 우리가 쉽게 무시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우리가 예상치 못하는 사이에 우리를 점점 잠식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에베소서 4:27절 말씀에 보시면,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Do not give the devil a foothold)”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NIV 영어성경에서는 여기에 ‘foothold(발판)’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조금 높은 곳을 올라가려고 할 때 작은 발판 하나만 대주면 조금 더 쉽게 올라갈 수 있는 겁니다. 마귀가 우리를 노골적으로 공격해 오면 우리도 믿음의 사람이라 그걸 경계할 것입니다. 그러면 마귀가 우리를 쉽게 공략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간혹 마귀에게 발판을 제공하는 경우가 있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마귀는 그걸 밟고 내 머리 꼭대기에 올라타서 나를 괴롭히기 시작하는 겁니다. 마귀에게 그런 발판을 제공해 주지 말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 에베소서 5:26절 말씀에 보시면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누구나 어떤 상황 속에서 화가 날 수도 있고, 화를 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 분노가 하루 종일 나를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되는 겁니다. 마귀가 그걸 원하는 겁니다. ‘야, 넌 자존심도 없냐? 너 바보냐? 왜 너는 말을 못해? 너도 한 마디 쏴 붙여야 하는 거 아냐? 널 무시했잖아?’ 마귀는 이런 식으로 옆에서 계속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또 에베소서 5:29절 말씀에 보시면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불신자들이 음담패설을 많이 하는데 그럴수록 점점 육체적 정욕에 사로잡히게 될 겁니다. 남을 헐뜯는 것, 누군가에 대해서 수군수군 하는 거… 그런 게 달콤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자기가 더 높아진다고 생각 하니깐… 하지만, 그 순간 그는 마귀에게 발판을 제공해 주는 겁니다. 마귀가 ‘옳다구나~’하면서 그 사람에게 딱 달라붙는 겁니다.
이게 무서운 겁니다. 그래서 마귀에게 절대 틈을 주어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 작은 틈 하나가 나와 나의 신앙과 우리의 가정과 교회생활까지 완전히 망가뜨릴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느헤미야가 12년간의 유다 총독생활을 마치고 아닥사스다 왕의 호출을 받고 다시 페르시아의 왕궁으로 돌아가 왕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신학자들은 그 기간을 약 1년에서 3년 정도로 보고 있는데, 느헤미야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예루살렘에는 몇 가지 문제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의 사람 느헤미야는 기도하다가 다시 예루살렘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왕에게 다시 요청을 해서 예루살렘에 돌아오게 됩니다.
7절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에 이르러서야 엘리아십이 도비야를 위하여 하나님의 전 뜰에 방을 만든 악한 일을 안지라”
자, 이게 왜 문제가 되었고, 느헤미야가 이것을 왜 ‘악한 일’이라고 말했냐면,
엘리아십은 유대의 대제사장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이라고 하면 종교적 사회였던 유대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어른이요, 영적 지도자였던 겁니다. 그런데 도비야라는 사람이 그 사회의 대표격인 사람에게 접근한 겁니다.
도비야는 성벽재건을 지속적으로 방해했던 ‘사마리아 총독 산발랏의 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원수와 같은 나라였던 ‘암몬 사람(2:10)’이었습니다. 그는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들의 성벽 재건을 ‘조롱하고 모욕(2:19)’했던 사람이었고, 성벽재건이 잘 진행되자 ‘재건 현장을 기습 공격하고자 하는 계략(4:8)’을 세우기도 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느헤미야를 암살하려고 시도(6장)’하기도 했었고, ‘제사장(선지자)을 뇌물로 매수(6:10,12)’해서 느헤미야에게 거짓 예언을 하도록 했습니다. 또 ‘유대의 귀족들과 정략결혼(6:18, 사위가 되기도 하고, 며느리를 삼기도 했다)’을 통해 자신의 신분 상승을 꾀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유대의 많은 귀족들을 매수하고 그들과 결탁’하여 느헤미야의 성벽재건을 교묘하게 방해하기도 했습니다(6:17). 그런데 여기에 하나를 더해 ‘대제사장 엘리아십을 뇌물로 매수하여 유대 사회 속에서 종교적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던 겁니다.
도비야가 얼마나 교활하고 나쁜 사람입니까? 그런데 대제사장이라는 사람 엘리아십이 어떤 일을 했어요?
4절, 5절(上)에 보시면
“이전에 우리 하나님의 전의 방을 맡은 제사장 엘리아십이 도비야와 연락이 있었으므로, 도비야를 위하여 한 큰 방을 만들었으니…”
도비야에게 성전에 있는 방 중에 하나를 내 준 겁니다. 도비야가 그 방 하나 차지하고 성전을 자기 집 드나들 듯이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유대 사람들이 ‘도비야라는 사람 대단한 사람인가 보다? 대제사장님이 인정하는 사람이니깐 좋은 사람인가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겁니다.
간혹 교회 안에서도 자기가 ‘어디 어디 교회 집사고, 자기가 선교를 얼마나 하고 있고, 자기가 구제를 얼마나 하고 있고…’ 이런 식으로 떠들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어요. 그렇게 말하고 돌아다니는 사람들 중에 대부분은 가짜입니다. 속지 마세요. 그 사람들은 교회를 이용하고, 종교를 통해 자신의 신뢰를 쌓아가는 겁니다. 그 사람에게 교회와 신앙은 사업 수단일 뿐입니다.
정말 진실하게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하고, 선교하고, 구제하는 사람은 그렇게 떠들지 않습니다. 떠들지 않아도 사람들이 다 알만큼 열심히 하기 때문에 나팔을 불지 않아도 되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 입으로 그걸 자꾸 말하는 건, 뭔가 그 속에 다른 계획이 있는 겁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보통 사람들 중에 성전에 사무실이 있다든가, 집이 있는 사람이 누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도비야가 성전에 자기 방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 도비야의 영향력이라는 게 얼마나 컸던 겁니까? 도대체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도비야에게 얼마나 많은 걸 받았기에 저렇게까지 되었겠습니까?
도비야가 사용하고 있던 그 방은 원래 하나님께 제사 드릴 때 여러 가지 기구들을 넣어 놓던 곳이고,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사람들, 문지기들과 같이 성전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곡식 창고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느헤미야가 어떻게 해요? 8절,9절에
“내가 심히 근심하여 도비야의 세간을 그 방 밖으로 다 내어 던지고, 명령하여 그 방을 정결하게 하고 하나님의 전의 그릇과 소제물과 유향을 다시 그리로 들여 놓았느니라”
특히 도비야는 ‘암몬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1~3절에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가나안 땅으로 갈 때 암몬 사람들의 땅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돈을 주고 양식과 물을 사려고 했는데, 그들이 거절했고 심지어 자신의 땅을 통과하여 가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23:3절에 보시면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 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암몬 사람 도비야에게 성전의 방을 내어준 것은 그 율법을 거스르는 악한 일이었던 겁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0절 말씀을 보시면
“내가 또 알아본즉 레위 사람들이 받을 몫을 주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자기 밭으로 도망하였기로”
이것은 12년 전에 느헤미야가 개혁운동을 통해서 새롭게 했고, 느헤미야가 총독으로 있는 동안은 지켜져 왔었던 일이 느헤미야가 자리를 비운 사이(1~3년)에 다시 옛날로 돌아간 것을 말합니다.
레위 사람들은 백성들이 내는 십일조를 통해 생활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느헤미야의 공백기에 백성들의 십일조 규례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던 겁니다. 그래서 레위 사람들은 다시 먹고 사는 문제를 걱정하게 되었고, 그들은 다시 각각 흩어져 농사를 짓거나, 목축을 하며 살았습니다.
느헤미야가 12년 전 개혁운동을 했을 때,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결단했었습니다. 10:39절 말씀을 보시면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려두지 아니하리라”
라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어떻게 되었어요?
13:11절에 보면
“내가 모든 민장들을 꾸짖어 이르기를 하나님의 전이 어찌하여 버린바 되었느냐 하고 곧 레위 사람을 불러 모아 다시 제자리에 세웠더니”
그렇게 유다 백성들은 다시 십일조 생활을 시작하고, 성전의 곳간에 레위인들에게 나누어줄 곡식들을 저장하고, 느헤미야는 그 일을 담당할 사람들을 다시 임명하여, 하나님의 성전이 운영될 수 있도록 합니다(10~13절).
느헤미야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암몬 사람 도비야는 대제사장 엘리아십을 매수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수 천명 중에 영적 긴장을 놓고 있던 한명이 뚫린 겁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성전의 일을 해야 할 사람들인 레위인들은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이 안 되니깐, 다시 성전을 떠나 농사 지러 갔습니다. 거기에 율법에서 금하고 있는 ‘암몬 사람 도비야’가 방을 하나 차지하고 있는 겁니다. 이건 재앙의 시작과 같은 겁니다.
왜냐하면 18절 말씀에
“너희 조상들이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래서 우리 하나님이 이 모든 재앙을 우리와 이 성읍에 내리신 것이 아니냐…”
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성벽 재건을 완공하고, 백성들이 율법을 지켜 살도록 하고,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다시 성전의 일을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백성들 가운데는 큰 기쁨이 있었고, 그렇게 느헤미야가 총독으로 있었던 12년 동안 평안을 누렸던 겁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에게로 간 사이에 영적인 틈이 벌어진 겁니다. 그런데 만약 느헤미야가 조금만 늦었어도,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일은 커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작은 틈 하나가 큰 댐과 제방을 무너뜨릴 수도 있는 재앙의 시작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우리가 10년 전에 신앙생활 잘 했었다고 변함없이 계속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에 한번쯤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 봤던 사람은 많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불신자보다도 못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의 작은 틈을 주고, 영적인 작은 틈이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져 버려서, 다시 신앙의 열심을 내기가 어려워져 버리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기억하세요. 그건 18절 말씀과 같이 ‘재앙의 시작’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40일간 특별기도회라는 이름으로 매일같이 모여서 주의 말씀을 사모했습니다. 40일 동안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주셨었습니다. 우리를 위로해 주시기도 했고, 우리에게 새로운 용기와 비전을 주시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믿음의 삶을 살 것을 결단하기도 했습니다.
특별기도회는 마치지만, 우리의 삶에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마십시오(엡4:27). 그것은 마귀에게 발판을 하나 만들어 주는 것과 같은 겁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