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27:3~4>
북한의 김정은은 아버지 김정일이 갑자기 죽으면서 2011년 스물일곱 살의 나이에 북한의 최고지도자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 시대에 국가의 권력을 세습하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김일성과 김정일 그리고 김정은에 이르기까지 3대 세습을 이어가고 있는 겁니다.
김정은은 너무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아무래도 정치 권력의 기반이 취약했고, 그래서 ‘공포정치’라는 이름으로 권력서열 2위이면서 고모부인 장성택을 처형하게 됩니다.
그런데 처형의 이유를 보니 ‘김정은에 대한 불경죄’라는 거였습니다. ‘김정은이 후계자로 공식 선언하는 당대회에서 마지못해 건성으로 박수를 쳤다. 김정은의 연설을 들을 때 삐딱하게 앉아 들었다. 김정은이 현지지도를 할 때 뒷짐을 지거나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었다. 인민군 열병식 때 김정은은 경례를 하고 있는데 장성택은 경례를 하지 않고 다른 곳을 보고 있다…’ 이런 태도에 관한 이유들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고모부이면서 서열2위인 장성택을 인민이 보는 앞에서 공개처형을 했던 겁니다. 말도 안되는 일이지만 3대 세습도 그렇고, 북한 주민들도 굶주리는 데 핵실험에 몰두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 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권력과 전쟁에 광분해 있는 김정은과 북한 정권의 실체입니다.
북한의 도발에도 우리나라가 섣불리 어떤 강경한 대응을 하지 않는 이유는 김정은과 북한은 전쟁에 미쳐있는 정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무고한 국민들에게 큰 화가 미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의 잠언은 “어리석은 자의 분노와 질투”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 우리에게 지혜의 말씀을 주시고 있습니다.
먼저, 3절 말씀을 보시면
“돌은 무겁고 모래도 가볍지 아니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분노는 이 둘보다 무거우니라”
공사장에서 돌과 모래를 날라본 사람은 아실 겁니다. 이게 보통 무거운 게 아닙니다. 그 무거운 것을 지고 가는 것은 육체적으로 심한 노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들 보다 더 심히 무겁고 감당하기 어려운 짐이 있는데, 이 구절에서는 그것을 “미련한 자의 분노는 이 둘보다 무거우니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의 지혜가 없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 생각과 계획하는 것이 항상 악한 것을 가리킵니다. 그는 지혜자의 충고를 결코 듣지 않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겁니다.
이런 어리석은 자가 분노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겁니다. 혹여 손에 흉기라도 들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누구 하나 큰 해를 당할 수도 있는 겁니다.
돌이나 모래를 나르는 것이나, 미련한 자의 분노나 모두 힘들고 어려운 상황인 것입니다. 그러나 질적으로 큰 차이가 있습니다. 돌이나 모래를 나르는 것은 단지 육체적인(물질적인) 어려움이라 할 수 있고, 미련한 자의 분노의 경우는 첫 번째가 영적이고 정신적인 고통으로 경험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그 일로 인해 육체적인 고통 역시 따라오게 되어 있는 겁니다.
때문에 우리가 어리석은 자의 분노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겁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어리석은 자의 말과 행동이 아무리 짜증나고 힘들게 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대항할 필요가 없습니다.
북한이 종종 남한에 군사적 도발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도 총 쏘고 미사일 쏘고 전면전으로 가다가는 수많은 무고한 국민들의 희생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어리석은 자에게 휘말리지 말고, 우리는 때를 기다리면서 국력을 더욱 키우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흡수통일을 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울 수 있는 통일의 길인 것입니다.
4절을 보시면 비슷한 구절 하나가 더 나오는데,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
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창수’라는 것은 물이 흘러 넘치는 상황을 가리킵니다. 그걸 막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구절의 원문 직역은 “노함은 잔인하고 분노는 잔혹하다 그러나 질투 앞에 설 자가 누구겠는가?”라는 것입니다.
분노가 잔인하고 잔혹한 결과를 가져오는데, 질투라는 것은 그 보다 더 처참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막을 것이 없다는 겁니다. 질투라는 것은 모든 것을 다 태워버리는 파괴적인 폭력성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어리석은 자의 분노의 경우와 같이 누군가로부터 질투의 감정을 일으키게 되면 그 때부터 그 사람은 이성이 마비가 되고, 상한 감정의 상태에서 공격적이고, 파괴적으로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질투를 유발하면 안 되는 겁니다. 1절과 2절에서처럼 자랑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런 것을 통해 자꾸 질투를 유발하게 되면,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실 누군가가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고, 공격하고, 파괴하려고 하면 그 때처럼 어려울 때도 없습니다. 그런데 지혜로운 사람은 어리석은 자의 분노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자로 하여금 질투를 유발시키지 않습니다. 그것이 지혜로운 자의 태도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