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14~21>
우리 한반도는 극동아시아 지역의 아주 중요한 요충지에 위치해 있습니다. 일본입장에서는 우리를 밟고 지나가야 중국 대륙과 러시아로 진출을 할 수 있었고, 중국과 러시아 입장에서는 우리나라를 잘 활용해서 일본의 북진을 막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청나라와 명나라는 오랫동안 힘으로 우리나라를 굴복시키고 우리를 중국대륙에 붙은 하나의 부족국가로 여겼기 때문에 우리는 오랫동안 굴욕적인 외교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 일본은 임진왜란을 비롯해서 호시탐탐 한반도를 침략했었고, 그리고 1876년(고종13년) 일본의 강압적 위협으로 맺어진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조약>으로부터 시작된 일본의 직간접적인 영향이 결국 청일전쟁(1894년)과 명성황후 시해 사건인 을미사변(1895년)으로 일본은 더욱 노골적으로 우리나라의 내정까지 간섭하다가 1910년에 대한제국은 일본의 힘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게 됩니다. 그리고 35년간 나라를 빼앗겼었고, 1950년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극동지역의 패권을 놓고 미국의 개입으로 인한 한국전쟁은 극동의 작은 나라 우리나라를 완전히 폐허로 만들어 버린 겁니다.
그런데 저는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를 보면 이 나라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게 느껴지는지 모릅니다. 우리나라는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모진 환란을 겪은 정말 불쌍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환란 중에 근현대 기독교 세계역사 가운데 가장 찬란하게 꽃핀 민족이 되었고, 놀라운 경제발전을 이룩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는 그들 가운데 있었던 하나님의 축복을 모두 잃어버리고, 완전히 망가진 인생을 살게 된 그들 가운데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신 것인지를 깨닫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내 의지와 기대와 관계없이 사정없이 망가져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여전히 당신의 은혜를 베푸시고 있습니다.
16절, 17절을 보시면,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아담과 하와는 범죄의 결과로 ‘수치심’에 이어 육체적, 정신적인 ‘고통’을 벌로 받게 됩니다. 여자에게는 잉태와 출산에 큰 고통이 따르게 될 것이고, 남자에게 의존적인 인생을 살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남자에게는 노동의 수고와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또한 18절과 19절을 보면, 노동을 통해 수고를 하고 얼굴에 땀이 흐르지만 인간의 범죄로 인해 땅이 저주를 받아서 때때로 제대로 된 수확물을 얻지 못하는 고통도 따르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의 벌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는 말씀과 같이 인간은 결국 ‘죽음’의 형벌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2:17절에서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하셨던 말씀이 그들에게 형벌로 내려지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최초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될 때의 죄로 얼룩지지 않은 순수한 사람은 얼마나 아름다웠습니까? 모든 창조물 중에 으뜸으로 지음 받았고, 다른 동물에게는 없는 놀라운 지성을 갖고 있었고, 만물을 지배할 만한 능력을 갖고 있어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며 땅과 땅에 움직이는 모든 것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에덴의 낙원에 있던 모든 것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런 놀라운 축복의 선물들이 죄로 인해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담이 하와를 향해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2:23)”라고 했던 그가 범죄의 원인을 하와에게 돌리고, 한 몸이었던 그들의 관계가 깨지기 시작했고, 인간은 서로 원망하고, 불평하고, 분노하고,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소유했었고, 누릴 수 있었던 모든 것들을 더 이상 소유할 수도, 누릴 수도 없게 되었던 겁니다. 인생이 엉망이 되어 버렸던 겁니다.
그런데 21절을 보시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고 수치심을 느껴 무화과 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었습니다(7절). 그런데 그 옷은 햇빛이 강하게 내리쬐면 다 말라비틀어져서 하루 이상을 입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좀 더 영구적인 옷이라 할 수 있는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는 겁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런 옷을 스스로 만들어 입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는 겁니다.
여기에 신학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가죽옷은 누군가의 희생이 따르는 겁니다. 그 희생을 통해 그들의 수치와 부끄러움 그리고 고통을 덮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장차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우리의 수치와 부끄러움과 고통을 덮어주시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나의 실수와 죄로 인해 그리고 내 생각과 계획과는 달리 엉망이 되어 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수치와 부끄러움을 덮어주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망가진 인생 위에 하나님의 은혜를 덮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 놀라운 은혜를 묵상하는 복된 날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