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16~26>
언젠가 어떤 언론에서 서강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장이신 이상복교수라는 분의 늦깍이 인생에 대해 소개한 글을 본적이 있었습니다. 이 교수님은 9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29살에 대학을 졸업하고, 36살에야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42세에는 유학을 떠났고, 중년이 되어서 대학교수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분이 대학에서 학생들의 갈등과 방황에서 자신의 젊은 시절 모습을 보았는데, 늦깍이 인생으로서 그 만큼 돌고 돌아 지금의 그 자리에 있었기에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저처럼 요즘 학생들도 삶의 중압감을 느끼며 휘청거리며 살아갑니다. 그건 나이가 많거나 적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낮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은 갈등하고 방황하면서 만들어 나가는 것, 그 자체가 그냥 인생이란 사실을 말해주고 싶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 어차피 인생은 갈등하고 방황하면서 만들어지는 것도 맞지만, 이 교수님의 경우는 방황 끝에 잘 된 경우이고, 방황만 하다가 끝나는 인생도 사실은 많이 있습니다.
신앙생활하다 보면 “인생의 방황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끝이나고, 신앙의 방황은 좋은 교회를 만나면 끝이난다”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오늘 본문에는 가인의 자손들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데, 인생의 방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16절에서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라고 되어 있는데, ‘놋’이란 지명의 이름의 뜻이 ‘유리함, 방랑’이란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이전에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였을 때 받은 저주 중에 하나가 12절에서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고 말씀을 하셨었는데, 가인과 그의 후손들이 방황하는 인생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가인과 그의 후손들은 문명을 놀랍게 발전시키는 듯이 보이기도 합니다. 17절에서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했습니다. 고대 원시시대에 성을 쌓았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것이었을 겁니다. 지금도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중국과 유럽 등의 나라에 빠지지 않는 관광지가 오래된 ‘고성(古城)’들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제대로 된 장비도 없이 가인은 성을 쌓고, 그곳에 하나의 작은 도시를 만든 겁니다. 문명적으로 보자면 대단한 발전일 수 있지만, 사실 가인은 아벨을 죽인 이후에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두려웠습니다. 누군가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평안할 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을 쌓은 겁니다.
그리고 가인의 4대손인 라멕은 하나님께서 창조 시에 주셨던 일부일처의 혼인질서를 깨뜨리고 일부다처를 시작한 인물입니다. 라멕의 아들 야발은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20절), 또 다른 아들인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21절), 또 다른 아들인 두발가인은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가 되었습니다(22절).
가인의 후손들 안에서 문명은 놀랍도록 발전해 나갑니다. 그들은 화려한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악기를 만들기도 하고, 각종 금속을 통해 여러 가지 기구와 무기까지도 만들었고, 농업과 목축업 등을 발전시켜 많은 물질을 소유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성을 건축하고, 성읍의 문화 등을 발전시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문화도 만들었습니다.
신학자 앨런 로스(Allen P. Ross)는 “그것은 저주받은 괴로운 세계 안에서 그들이 유일하게 의존할 수 있는 것이다(BKC, p.59)”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깐 마음 한 쪽에 불안함이 있고, 두려움이 있고, 만족이 없으면 그는 그 자리에 무엇인가 채우려고 노력하게 되어 있습니다. 가인과 가인의 후손들의 모습은 그 대표적인 모습인 것입니다.
가인의 후손 라멕은 자신이 약간 피해 본 것을 갖고 화를 참지 못하고 어떤 소년을 죽이고서도 도리어 당당합니다. 그리고 24절에 보면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죄를 자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불신앙적으로 대적하고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가인과 그의 후손은 이렇게 방황할까요? 16절에 힌트가 하나 있습니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이 구절은 이렇게도 읽을 수 있습니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자 그에게는 인생의 방황(놋)이 시작되더라.’
반면, 아벨 대신에 하나님께서 셋(‘대신할 자, 택함을 받은 자’란 뜻)이라는 다른 아들을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는데, 26절을 보시면,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그런데 이 후손들을 향해서는 다른 기록은 없고 오직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를 떠난 사람들은 인생의 방황이 시작되었지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은 하나님의 선택과 약속이 있는 경건한 후손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대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과 시선을 다른 여러 곳에서 하나님께 두십시오. 그 때 우리 인생의 방황은 끝이 나고, 하나님 안에서의 진정한 복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