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준을 높여라”

<창세기 6:9~12> 

필리핀 세부에서 한인교회를 개척해서 사역하는 것은 쉽지 않은 도전인 거 같습니다. 유학생과 2개월에서 6개월 혹은 1년 정도의 짧은 거주민들이 많다보니 이 땅에서 하나의 교회가 든든하게 세워진다는 것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날마다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교회가 개척 4년 만에 지금의 공간보다 3배 이상이나 넓은 곳으로 확장이전하게 되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새 성전 이전>이 말로 되는 것은 아니고, 이 일을 위해 온 성도들의 기도가 모아져야 하고, 재정적인 헌신이 뒤따라야 가능한 일입니다. 재정적으로 열악한 세부 이민생활이라는 환경에서 이 일은 우리에게 커다란 도전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레벨을 올려야 이 비전과 미션도 성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즘 인테리어 공사를 한참 하고 있는데, 며칠 전 우리 집사님이 강단(stage)을 만들기 위해서 한 밤 중에 인부들을 써서 각목더미를 공사현장에 옮겨다 놨습니다. 그런데 아침 일찍 건물주가 연락이 온 겁니다. 그래서 만나봤더니 강단을 나무로 짜지 말라는 겁니다. 이유인즉슨 건물에 개미가 많은데 나무로 강단을 짜면 다 갉아먹어 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문과 문틀만 나무로 쓰고 나머지는 되도록 개미가 못 갉아먹는 재질을 써서 만들라는 주문이었습니다. 만약 나무를 쓸 경우에는 개미가 타지 않는 아주 값비싼 나무를 사용해서 하라고 합니다.

워낙 건물주가 까다로운 사람이어서 건물 계약부터 설계 그리고 공사에 이르기까지 계속 간섭하고 깐깐한 조건을 내걸고 있어서 이래저래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었는데, 강단에 나무를 쓰지 말라는 말에는 ‘그러면 도대체 공사를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하는 생각에 그 날은 약간 짜증이 나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건물주 말이 틀린 건 없고, 일리도 있습니다. 조건이 까다롭지만 그렇게 하면 개미도 안 타고 더 튼튼하게 인테리어도 할 수 있는 겁니다. 물론 거기에 들어가야 할 추가적 비용은 지불해야 합니다. 어쨌든 그래서 엊그제 너비3m, 길이12.5m 짜리의 큰 강단을 앵글철재로 밤새 용접해서 만들었고, 그 위에서 아무리 뛰어도 끄덕없을 정도로 튼튼하게 제작했습니다.

기준이 까다롭고 높다는 것은 그것을 맞춰야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여러 가지 면에서 어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준을 높이면 높일수록 그 사람의 레벨도 함께 올라간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그것은 그에게 좋은 일입니다.

11절과 12절을 보시면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노아가 살던 시대의 사람들의 도덕적이고 영적인 수준을 잘 말해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짧은 두 구절 안에 ‘부패(썩었다)’라는 단어를 세 번이나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노아가 살던 시대가 얼마나 타락한 때였는지를 짐작케 해 줍니다.

‘소돔과 고모라’라는 도시는 ‘동성연애’가 아무렇지도 않고 어쩌면 자연스러운 성적문화였던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살던 롯에게 천사가 방문했을 때, 천사의 외형이 아름다운 남성의 모습이다 보니깐 그 도시의 남자들이 와서 동성연애를 요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런 문화 속에서 살면 사람은 그런 정신과 가치에 물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있었지만 롯의 태도와 자세는 많이 소돔화 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 롯이 그 두 딸과 빠져나왔는데 롯의 딸들은 아버지 롯에게 술을 먹이고 동침해서 자식을 낳게 되는 장면은 충격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깐 그런 환경 속에서 자라다 보니 롯의 두 딸의 도덕적, 영적 기준은 아주 떨어져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9절을 보시면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라고 되어 있습니다. 노아는 달랐습니다. 그런 문화 속에서 쉽게 그런 문화에 물들어 노아도 롯과 같이 그렇게 살 가능성이 컸을 겁니다. 하지만, 이 구절을 통해 볼 때 노아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 앞에서 매우 의롭고 선하게 살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하반절에서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말씀을 보면, 노아는 하나님과 늘 동행했던 겁니다. 사람도 어떤 사람하고 시간을 오래 보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달라질 수 있는 겁니다. 거룩하고 경건한 사람하고 시간을 오래 보내면 그는 거룩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과 많은 시간을 보내면 그도 온유하고 겸손해 질 수 있습니다. 신실하게 믿음생활 하는 사람과 가깝게 지내면 그도 영적으로 더욱 충만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경건한 사람하고 시간을 오래 보내면, 교만하여 약한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하고 말을 섞다보면, 온갖 음담패설과 더러운 일을 즐기는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면… 나도 어느 순간 물이 들 수밖에 없는 겁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사람은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그 사람에게 그것이 기준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며 늘 하나님을 바라보니 그의 기준은 늘 하나님이셨던 겁니다. “이 때 하나님이라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이런 생각을 하니깐 기준이 높아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노아의 때에 경건한 삶이 쉬웠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과 가까이 있었더니 그는 영적인 높은 기준의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적인 기준, 도덕적인 기준, 사랑의 기준, 믿음의 기준, 인격의 기준을 높이십시오.

Tags: No tags

Add a Comment

You must be logged in to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