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8:16~21>
우리가 살아가면서 좀 더 빨리 성공하고 싶고, 하나님께로 부터도 좀 더 빨리 축복을 받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全能)하시기 때문에 오늘이라도 당장 나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고, 내게 큰 축복을 주실 수 있으신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 시기를 조절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일 겁니다. 왜냐하면 75세에 그를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시면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25년이나 지난 100세 때 아들 이삭을 주신 겁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만약 아브라함에게 바로 응답이 되었다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이 있었을까요? 그 문제를 위해 ‘기도훈련’이 되었을까요? 어떤 어려운 상황과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훈련’이 될 수 있었을까요?
아브라함에게 그 기다림의 시간은 무척 힘들고 어려운 시간들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믿음이 꽉 찼을 때, 아브라함의 믿음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던 믿음, 자기 몸이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던 신앙(로마서4:18~20절)”을 갖고 있을 그 때에 결국 아들 이삭을 주셨던 겁니다.
오늘 본문 17절과 18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숨기는 일이 없을 정도로 이제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가 친밀해 진 겁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하나님께서 하시려고 하는 일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비밀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축복의 원리도 알게 되는 하나님의 벗과 같은 존재가 된 겁니다.
바로 그 아브라함을 강대한 나라로 만들고,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어 그를 통해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하시려는 겁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을 통해 이루어질 이스라엘 한 민족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갈라디아서 3:9절에서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하셨던 것처럼, 아브라함을 통해 이뤄질 전세계 믿음의 공동체요, 하나님의 나라인 영적 이스라엘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9절을 보시면,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계획하셨고, 언약하셨던 그 모든 일의 이루시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깐 여기에 ‘때’가 필요한 겁니다. 먼저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따라 살아가는 믿음으로 충만한 사람이 되는 것이 먼저요. 둘째는 그의 자손들이 믿음의 가문을 형성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가문과 더 나아가 민족이 되게 하며, 더 나아가 전 세계 영적 이스라엘을 이루어가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이뤄질 일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순종하고, 그 후손들이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때 결국 하나님의 언약은 완전한 성취를 이루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언약과 축복을 이루시는 때가 있습니다. 때로 내 생각보다 빨리 되지 않는다고 조급해 할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온전한 그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된다면 그 때는 빨라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25년 걸쳐서 온전한 믿음을 이루었는데, 만약 그 기간이 10년이었다면, 그 기간이 5년이었다면 생각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때를 좀 더 빨리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제가 큰 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사역할 때 간혹 담임목사님 부재 시에 부목사님들 중에 어떤 목사님들은 수천 명 앞에 서서 설교할 영광을 얻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다섯 명 앞에서 말씀을 전하건, 오백 명 앞에서 전하건, 오천 명 앞에서 전하건 제게는 큰 문제가 안 되지만, 좀 젊었던 당시에는 ‘나도 언젠가 저 자리에 서서 말씀을 전하는 영광을 얻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제가 참 세속적인 목사였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의 대변인으로 지명된 사람이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설교자들은 하나님 말씀의 대변인이니, 어찌 이 땅의 대통령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그 자리가 다섯 명이 앉아 있든지, 5천명이 앉아 있든지 모든 왕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는 것 자체로 황공하고 영광스러워 하는 게 정산인 겁니다.
그런데 제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설교하고 싶어 했던 것은 철저하게 세속적인 야망과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었던 겁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참 부끄러운 일인 겁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생각은 하지 않고, 많은 사람 앞에서 영광을 얻으려고 했던 부끄럽고 추악한 죄인 겁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때에 제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제게 이런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너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때가 되면, 때가 차면 우리가 생각하지 않고 있어도 축복을 주시는 겁니다. 우리가 조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내게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걸 채워 나가야 하는 겁니다. 더 주님을 닮아가야 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은 그 축복을 주시는 겁니다. 순종이 빠를수록 하나님의 언약과 축복을 더 빨리 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