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1:8~21>
어제 밤에 우리 아들이 가족 단톡방에 찬양 한곡을 링크해 놓고, 우리 가족을 생각하며 이 찬양을 부르며 많이 울었었고, 지금도 이 찬양을 부를 때마다 눈물을 흘린다는 고백을 함께 올렸습니다.
찬양의 제목은 <선교사>라는 곡입니다.
『아픔 많은 세상에 주의 복음 들고 부르심 따라갑니다.
슬픔과 고통이 가득한 이 땅의 눈물을 닦아주려
어쩌면 내 삶을 전혀 돌볼 수 없을지 모르겠지만,
나를 보내시고 무너진 그 땅에 내 생명 묻으소서
주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이 나의 평생소원
주님의 교회가 이곳에 세워짐이
마지막 호흡이 끝이 날 때까지 나는 나아가리
그 날에 그토록 보고픈 주 얼굴 보리』
제가 만약에 ‘우리 필리핀에 영어 공부하러 가자! 아빠에게 크게 성공할 수 있는 정말 좋은 기회가 왔는데 세부에 가자!’ 또는 저는 목회자니깐 ‘필리핀에 큰 교회가 있는데 연봉도 높고 생활에 아무 지장이 없고 너희들 유학비도 다 지원해 주는 교회에 담임목사로 청빙 받았으니 함께 가자’ 했다면, 눈물로 썩어진 밀알이 되고자 하는 결단 없이 룰루랄라 하면서 왔을지도 모릅니다.
목회자가 먹고 살기 위해, 크게 성공하기 위해, 큰돈을 벌기 위해 사역한다면 그것은 목회자가 세속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속(世俗 : secular)’이란 말은 ‘세상 세(世)’자에 ‘풍속 속(俗)’자를 쓰고 있어서, ‘세상의 풍속’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세속적이란 말의 반대는 ‘거룩하다, 성스럽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세속적이란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과 반대되는, 믿음과 반대되는 이 세상의 풍속과 유행 그리고 가치’와 같은 것을 말합니다.
흔히들 ‘목회자는 세속화되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전서 2장9절에 의하면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라고 말씀하시면서 목회자와 성도 모두가 구분 없이 하나님 앞에 구별된 제사장적인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목회자나 성도들이나 결코 세속화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제가 어제 학생 몇 명을 홈스테이하게 된 우리 집사님께 드린 말씀이 있습니다. ‘학생을 절대로 재정적인 것과 연관해 보시면 안 되고, 하나님께서 그 아이를 집사님께 붙여주셨고, 그 아이가 이곳에서 믿음을 갖게 되고, 그 아이의 인생이 바뀌는 통로가 되기를 기도 하세요’라고 했습니다. 분명 현실적인 문제들이 있지만, 세상에 살면서 세속적인 가치에 물들어 버리면 안 되는 겁니다. 더 높은 가치, 더 이상적인 가치에 우리의 마음을 두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세속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큰 잔치를 벌여 자축하는 행사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잔치 중에 사라가 보니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인 이스마엘이 이삭을 괴롭히고 있는 겁니다. 이 때 이스마엘의 나이가 약 16~17세 쯤 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스마엘은 큰 아들이면서도 첩의 소생이기 때문에 장자로서의 상속권을 배다른 어린 동생인 이삭에게 뺏긴 겁니다. 그래서 이복동생인 이삭이 너무나도 미워 괴롭혔던 것 같습니다. 그 모습을 보던 사라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10절을 보시면,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어찌보면 사라가 너무 잔인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브라함도 첩의 아들이지만 아들 이스마엘을 내쫓아야 하는 상황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괴로워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12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아브라함이 그 일이 근심이 될 때 하나님께서 아예 결정을 내려주시는 겁니다. 그리고 본처인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말한 대로 이스마엘을 내보내라고 하시는 겁니다. 이런 상황이 이 성경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사라가 그렇게 말한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모순적인 거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12절 하반절에 영어번역(NIV)에서는 ‘왜냐하면(because)’라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그 이유가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는 겁니다. 이스마엘은 세속적인 방법에 따라 살아가는 우리 인간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고, 이삭은 믿음의 방법으로 말미암는 삶을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을 상징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은 오직 하나님의 방법, 믿음의 방법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을 내보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은 아들 이삭을 통해서 그 언약이 성취될 것이기 때문에, 20장에서 아비멜렉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이 엉망이 될 위기가 있었던 것처럼, 이복동생인 이삭을 향한 불붙는 시기와 분노로 가인이 동생 아벨을 쳐 죽였듯이 그런 비극이 또 일어날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더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자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세속적 가치와 결별하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축복와 언약이 없습니다. 오직 믿음 안에서 그 축복과 약속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있는 모든 세속적 가치와 결별하십시오. 그런 삶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없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스마엘을 내보내는 것이 고통스러울 지라도 이제 세속적 가치와 결별하라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