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임마누엘”

<이사야7:10~17>

성경 속에 등장하는 이름 중에 아주 인기 있는 이름 하나가 마태복음 1장23절에 나오는 ‘임마누엘(Immanuel)’이란 이름일 겁니다.

왜냐하면 뜻이 너무 좋습니다. 마태복음 1:23절에서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이 담겨 있는 이름의 뜻이니, 교회 이름 중에도 많고, 성가대 이름도 많고, 미국의 헐리웃 스타나 유럽의 유명인들도 이 이름이 들어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이름은 마태복음 1장에서 처음 등장한 것이 아니라, 오늘 본문인 이사야 7장에서 처음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특별한 이름이 나오게 된 배경이 있었습니다.

1절과 2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시니”
이 말씀이 임하게 된 때는 유다의 아하스 왕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하스 왕에게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라는 건데, 사실 남유다 왕국은 이 때 국가적인 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하스 왕에게 주께서 그 나라를 구원하신다는 징조를 구하라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러면 이 얼마나 희망과 위로가 되는 메시지입니까?

당시 북쪽의 앗수르라는 나라는 강력한 군사력을 앞세워 세력을 점점 확장해 나갔습니다. 그 아래에는 아람이 있었고, 그 아래에는 북이스라엘이 있었고, 그 아래 지역에는 남유다 왕국이 있었습니다. 앗수르가 세력을 확장해 나가니깐 위협을 느낀 아람은 북이스라엘과 연합해서 앗수르를 대항하려고 했습니다. 또 아람은 남유다까지 힘을 합하려고 했었던 겁니다. 그러나 남유다는 당대 대세였던 앗수르를 늘 동경했습니다. 그래서 아람은 북이스라엘과 연합해서, 앗수르를 대항하기 전에 남유다를 먼저 침공해서 세력을 키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남유다의 아하스 왕은 북쪽의 아람이나 앗수르가 계속 부강한 강대국이 되는 이유를 그들이 섬기고 있는 우상 때문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앗수르의 다메섹까지 가서 답사를 하고 돌아와 예루살렘 성전을 우상을 섬기는 단으로 바꿔 버립니다.

그런데 역대하28:22절과 23절을 보시면,
“이 아하스 왕이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여, 자기를 친 다메섹 신들에게 제사하여 이르되 아람 왕들의 신들이 그들을 도왔으니 나도 그 신에게 제사하여 나를 돕게 하리라 하였으나 그 신이 아하스와 온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였더라”

우리도 신앙 생활하다가 어려움을 겪게 되면 두 가지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왜 열심히 주님을 섬기는데, 열심히 봉사하는데 이게 뭡니까?’하면서 시험에 빠져 교회와 주님을 점점 멀리하기도 합니다.

또는 그런 신앙의 시련에 빠졌을 지라도 자신의 부족함을 돌아보며, 주의 뜻을 구하면서 오히려 더 매달리고 부르짖고 통곡하며 이전 어떤 때보다 더 절박함과 간절함을 갖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겁니다. 기도의 어머니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한나가 불임 때문에 부정적 반응이 아니라, 절박한 기도와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갔던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하스 왕은 곤고할 때에 더욱 범죄한 케이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기회를 주시는 겁니다. 여호와께서 구원하실 것이라는 징조를 구하라는 겁니다.

그러나 아하스는 12절에서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이 말씀이 자칫 겸손한 모습으로 오해될 수 있으나, 사실은 그 마음이 앗수르의 우상에게 이미 완전히 몰입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고 구할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하루 만에 유다 용사 12만 명이 죽고, 20만 명이 사마리아로 포로로 잡혀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14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나님께서 찾고 구하는 자에게 즉 믿는 자에게 어떤 징조를 주신다고 말씀합니까?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을 예언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처녀가 잉태했다는 것은 사람의 힘이 아닌,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메시야 즉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고, 세속적 가치와 욕망 속에 사는 사람들의 형통을 보면서 아하스 왕과 같이 그런 것을 동경하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신앙의 방법이 아니라 세상적 방법으로, 세상의 가치와 힘으로 어떻게 해 보려는 아하스의 죄를 짓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구원’이라는 뜻) 임마누엘(‘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을 통해 나타나는 것을 믿으십시오.

오늘 세상적 가치를 동경하던 마음을 돌이켜 다시 믿음의 가치로 방향 전환하십시오. 예수 임마누엘 되신 주님께서 내 인생의 시련 속에 임하여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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