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람데오(Coram Deo)”

<사도행전 4:13~22>

종교개혁을 통해 우리 개신교의 중요한 신학적 기초를 놓은 사람은 ‘존 칼빈(John Calvin, 1509 ~ 1564)’입니다. 그는 마틴 루터와 쯔빙글리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을 완성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가 불과 27세 때 쓴 『기독교 강요』는 가고 오는 모든 세대 속에 기독교 개혁주의 신학의 중요한 기초가 되어, 전 세계 모든 신학자들이 아직까지 참조하고 연구하는 신학서적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종교개혁가였던 칼빈의 일생을 지배했던 중요한 삶의 좌우명 중에 하나가 ‘코람 데오(Coram Deo)’라는 말입니다. 라틴어로 Coram은 ‘면전에서 혹은 앞에서(in the presence of before)’라는 의미이고, Deo라는 말은 Deus(하나님)을 뜻하는 단어에서 온 말입니다. 이 두 단어가 만나 ‘Coram Deo(하나님 앞에서 ; in front of GOD, before the face of GOD)’가 된 것입니다.

이 말은 흔히 ‘사람 앞에서(coram hominibus)’ 또는 ‘세상 앞에서(coram mundo)’라는 말과 대비되는 표현으로 쓰여 지고 있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며,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진리 앞에 서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면전 앞에서 진실하게 살고자 하는 영적 결단으로 쓰여 지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두 부류의 사람들 중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은 사람을 두려워하고, 세상의 명예와 부 앞에서 사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베드로와 요한을 비롯한 사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살았던 코람데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들을 통해 전해지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부활의 복음은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들이 나타났습니다.

13절에서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사도들 대부분은 갈릴리의 어부 출신들입니다. 당연히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유대민족의 최고의 석학들이 모여 있는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들인 ‘관리들, 장로들, 서기관들, 대제사장들’의 심문과 협박에 사도들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으며, 그들이 감히 반박할 수 없는 탁월한 신학적인 논리가 들어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13절에 보면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불과 하루 이틀전만해도 성전 문 앞에서 평생 구걸하며 살던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바로 그 사람이 멀쩡히 그 병이 치료되어 사도들과 함께 서 있는 겁니다. 그리고 22절에 보면 그 사람의 나이가 사십여 세나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백성들의 장로들은 그를 상당히 오랫동안 그를 알고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16절에서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이 사건은 명백한 진실이었고,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목격한 하나님의 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어떻게 합니까? 17절, 18절에 보면, 사도들을 협박하면서 이 후에는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경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사람들은 종교지도자들이었으나 철저하게 세속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돈을 사랑했고, 세상의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세속적 욕망을 위해서라면 명백한 진리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부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대조적으로 사도들의 모습은 코람데오의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시 사도들을 체포할 수도 있고, 죽이고 살릴 수 있는 권세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그들을 협박하고 있던 관리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까지 협박하고 경고하고 있으면 좀 위축될 법한대 사도들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19절과 20절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사람 앞에서, 세상 앞에서 살게 되면 이미 분별력을 잃게 되어 버립니다. 그는 무엇인가의 노예가 되어 있는 겁니다. 하나님과 그 분의 말씀 그리고 믿음보다 그를 지배하고 있는 더 큰 가치는 세상적 욕망인 것입니다. 때문에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 앞에서도 그것을 애써 부인하려고 하고 있는 모습을 본문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의 모습이 얼마나 당당합니까? 사람 앞에서의 삶은 두려움과 거짓만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의 삶은 담대함과 진리와 진실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새해가 밝았습니다. 순간순간 우리는 어떤 것을 결정해야 하는 순간을 맞게 됩니다. 그러나 코람데오의 삶을 사십시오.

Tags: No tags

Add a Comment

You must be logged in to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