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이 아닌 온유함으로”

<디모데후서 2:14~26> 

‘논쟁(論爭)’이란 말은 ‘말할 론(論)’에 ‘다툴 쟁(爭)’자를 쓰고 있는 바와 같이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이 말이나 글로써 다투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말과 글로써 다툰다고 하지만 주먹만 안 휘두를 뿐이지 상대방의 마음에 적잖은 상처를 줄 수 있는 게 논쟁이란 겁니다.

때문에 앞으로 계속 볼 관계라면 되도록 논쟁을 피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논쟁은 말 그대로 ‘말다툼’입니다. 그러면 한 쪽은 이기고 한 쪽은 져야 싸움이 끝나는 겁니다. 한 사람은 옳고, 다른 한 사람은 죄인이 될 수도 있는 겁니다. 앞으로 내가 계속 봐야 할 관계의 누군가를 죄인 만들어서 내가 얻을 유익이 뭐가 있겠습니까?

예를 들어 교회 성도들 사이에 그런 일들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논쟁으로 교인 중 한 사람은 의인이고 한 사람은 죄인 만들어 놓고, 원수가 되었는데 언젠가 천국에 갔다면 그 때 그 분 얼굴을 제대로 볼 수나 있겠습니까? 또 부부 사이에도 누군가가 말로서 이긴자가 되고, 누군가가 굴복하는 것도 결코 좋은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부부라도 말다툼에서 진 사람은 마음 속 어딘가에 분노가 자리 잡고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건전하고 건설적인 토론은 권장 할 만 합니다. 이것은 함께 더 잘 해보자는 목적이 있는 겁니다. 누군가 논쟁(말다툼)하려고 막 달려들 수도 있을 겁니다. 그 때 ‘아 그러시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그럴 수도 있겠네요…’라고 넘어가는 것도 하나의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4절에서도 또 하나의 어리석은 논쟁에 관한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너는 그들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라”

이 구절부터 말씀하시는 ‘논쟁(말다툼)’은 디모데가 목회하고 있었던 에베소 교회에 들어온 이단에 관한 말씀입니다. 교회가 헛된 논쟁의 전쟁터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해보려고 어렵게 교회를 찾아 갔는데, 교회에 가보니 교회 중직이란 사람들이 맨날 싸우고만 앉아 있다면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이었던 그 새신자는 더 이상 그 교회에 출석하고 싶지 않을 겁니다. 만약 그 새신자가 영영히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다면 그 피 값은 누가 책임져야 하겠습니까?

때문에
-(15절)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16절)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17절)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당시 에베소 교회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인 ‘후메내오와 빌레도’는 플라톤의 철학에서 비롯된 영지주의적 가르침을 펼쳤습니다. ‘영은 거룩하고 육은 악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부활하셨지 육은 부활하지 않았다(18절).’라고 한 겁니다. 이런 잘못된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은 인정하면서 참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을 부인하기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것을 18절 하반절에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고 경계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에베소교회의 목회자인 디모데와 교회의 중직자들은 그런 거짓 가르침에 대하여 방어를 해야 했고, 그러다 보니 논쟁이 심해질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22절, 23절을 보시면,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22절의 ‘청년의 정욕’은 문맥을 통해 볼 때 육체적 욕망이라기보다는 지식적 정욕으로 보는 게 맞습니다. 한참 공부하고 젊을 때는 꽤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싸움에서 안 지려고 하고, 논리에서 안 밀리려고 하는 욕구가 강합니다. 어떻게든 말로써, 지식으로써, 논리로써 상대방을 누르려는 것이 청년의 정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살다보면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압니다. 때로는 상대방에게 져 주고, 알면서도 참고, 기다려 주고, 이해하고, 받아 주는 것이 논리에서 이기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을 아는 때가 있습니다. 이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내가 그 한 사람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24~26절을 보시면,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논쟁이 아닌 온유함으로 잘 가르쳐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잘못된 것을 그냥 눈감아 주라는 것이 아니라 온유함으로 훈계할 때 혹 그가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회개할 기회를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여러분, 중요한 진리에 관한 것이 아니면 다 져줘도 괜찮습니다. 꼭 내가 말로써 상대방을 이겨먹어야 하는 건 아닙니다. 다 알지만, 나는 이미 더 좋은 방법을 알고 있지만 때로는 상대방의 말을 받아주고, 격려해 주고, 칭찬해 주면 그 사람 한 사람이 성장하고 살아나지 않겠습니까? 혹 교정이나 훈계가 필요하다면 감정적으로 다가가지 말고, 하나님 아버지의 넓은 사랑으로 그리고 온유함으로 말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인해 나는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 한 사람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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