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9:19~29>
우리나라에 ‘공시족’이란 신조어가 어느 때부터인가 생겨났습니다. 공시족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전 세계적으로 청년실업이 심각한 문제이지만 우리나라처럼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는 사람이 많은 것은 그리 좋은 현상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대학생들이 4년 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따낸 학위하고 공무원 시험은 거의 상관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국가 경제적인 면으로 볼 때 큰 손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통계청의 작년 7월 발표한 조사에 의하면 청년층(15~29세) 취업준비생 가운데 공시족이 36.9%로, 취업준비생 10명 중 4명이 공무원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 경쟁이 얼마나 치열하겠습니까? 올해 공무원 9급 공채 시험에 평균 40.9 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고 합니다. 교육행정직의 경우 206.9 대 1의 경쟁이었다고 하니깐 9급 공무원이 되는 길도 보통 일이 아닌 겁니다. 그러니깐 지금 동사무소에서 일하시는 분들도 보통 분들이 아닌 겁니다. 앞으로 그 분들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바라봐야 할 겁니다.
그런데 9급 공무원이 되어 받는 초봉이 여러 가지 수당을 포함해서 약 2백만 원 내외 정도로 보시면 됩니다. 청년들에게 그게 적은 금액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물가를 생각했을 때 많은 금액도 아니기 때문에 우리 청년들의 삶이 얼마나 고달플지가 예상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 10명 중에 4명은 지금도 치열하게 9급 공무원에라도 선택받기 위해 밤잠을 설치며 시험 준비를 하고 있는 겁니다.
세상에서는 월급 2백만 원을 주면서도 자격을 까다롭게 만들어 놓습니다. 공무원 시험 합격률이 1.8% 정도 되니깐 9급 공무원 되고 싶다고 아무나 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세상에서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우리에게 자격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 자격에 미달하면 절대 그 안에 소속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가치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는 게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주어지는 구원이란 것입니다. 믿으라 하는데 이런 가치로 이해할 수 없으니깐 못 믿는 겁니다. 그러나 믿음은 이해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그 말씀을 그대로 믿는 겁니다.
로마서 9장 18절 말씀을 쉬운성경으로 보면,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뜻대로 어떤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푸시고, 또 어떤 사람은 완고하게도 만드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그들에게 믿음을 주시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들의 마음은 믿지 않는 완고한 마음 그대로 내버려 두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들은 ‘우리를 악하게 하는 것도 선하게 하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면 죄에 대한 책임도 우리에게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라는 질문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20절을 보시면,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여기서 바울 사도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했던 토기장이 비유를 예로 들고 있는데, 지음 받은 물건이 지은 자를 향해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느냐? 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어리로 천히 쓸 그릇과 귀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겠냐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선택하시고, 누군가를 유기(遺棄 : 버리다)하신다는 것에 대해서 그 누구도 따질 수 있는 자격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22절, 23절을 보시면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로마서 3:23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고 했고, 로마서 6:23절에서는 그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선물)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인간은 오늘 본문 22절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바와 같이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이었고, 그 진노의 그릇에 대해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며 관용을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2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긍휼의 그릇”으로 선택하시고 구별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과연 그럴 자격이 있어서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자격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긍휼 때문입니다. 그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 바로 우리인 것입니다.
25절과 26절을 보시면,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은 “내 백성 아닌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 받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 역시 진노의 그릇이었고,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과 그 영광을 받을 자격이 전혀 없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긍휼과 은혜를 베푸셔서 하나님께서 귀히 쓰실 그릇으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격 없는 자에게 어떤 은혜를 베푸실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천하게 쓰시려하지 않고 귀하게 쓰시려는 계획을 갖고 계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 안에서 자격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받았다면 이제 여러분은 주님의 뜻에 합당한 귀히 쓰시는 그릇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의 시간과 재능과 능력과 물질과 육체와 삶을 천하게 쓰지 마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귀히 쓰시는 그릇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