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2:10~19>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편리하게, 쉽게, 빠르게 살아가고 싶어 합니다. 그러다 보니 힘들게 일하고 돈을 벌고 싶어 하지는 않습니다. 일도 되도록 땀 흘리지 않고, 육체적으로 힘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쉬운 일을 찾고, 그러면서도 들인 수고에 비해서는 많은 돈을 벌고, 큰 영광을 누리고 싶어 하는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런데 인생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일들을 해 보지만, 무엇이든 쉬운 일은 없는 거 같습니다. 이 일이 힘들어서 그만두고 더 쉽게 돈 벌 수 있는 일이라고 선택해 보지만 그 일에도 나름 여러 가지 어려운 점들이 있는 겁니다.
제가 처음 목회자가 되고 싶었을 때, 목사가 되면 매일 그렇게 좋아하는 교회에 하루 종일 있을 수 있고, 매일 찬송하고, 성경보고, 예배하고, 기도하고… 그냥 매일 천국에서 사는 것 같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목사는 그 외에도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주일예배를 마치고 우리 성도들은 가족들과 함께 모두 돌아가 편안한 주일오후를 대부분 보내실 텐데, 저는 오후와 저녁시간을 다음 날 설교준비를 위해 아내와 시간을 보내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매일 하루에 3~4시간 이상은 새벽기도회 설교 준비로, 금요기도회나 주일설교를 위해서는 적어도 10시간에서 16시간 정도를 묵상과 설교원고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매일 다른 설교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개척한지 5년6개월 동안 약 2천편의 다른 설교를 준비해서 했고, 이 일을 적어도 앞으로 20년을 더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설교만 하는 게 아니고, 성도들의 양육과 훈련, 심방과 돌봄 그 외에 여러 가지 행정적인 일들까지 일이 쌓여있습니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왕관이 크면 클수록, 누려야 될 영광이 크면 클수록 견뎌내야 할 무게는 그 만큼 더 큰 것입니다. 왕관의 크기와 영광의 크기만큼 거기에는 반드시 그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왕관을 쓰려고는 하면서 그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은 그 왕관을 쓸 자격도, 영광을 누릴 자격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세 명의 왕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유다의 몰락기에 활동하다가 유다 왕국이 몰락하는 것까지 목격한 선지자였습니다. 남유다 왕국의 왕 중에 요시야 왕은 매우 선한 왕이었지만, 전쟁터에서 전사하게 됩니다.
그 뒤를 이어 그의 아들인 ‘살룸(여호아하스)’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런데 살룸은 부친인 요시야 왕과는 달리 아주 패역한 왕이었습니다. 에스겔19:3절에서 “사람을 삼키는 사자 새끼”라고 불릴 정도로 그는 권력을 갖고 백성들에게 악을 행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보시면,
“너희는 죽은 자를 위하여 울지 말며 그를 위하여 애통하지 말고 잡혀 간 자를 위하여 슬피 울라 그는 다시 돌아와 그 고국을 보지 못할 것임이라”
여기서 ‘죽은 자’는 전쟁터에서 전사한 선왕인 요시야를 가리킵니다. 요시야의 죽음이 백성에게 큰 슬픔이 되지만, 그보다 더 큰 슬픔이 오게 되는데 살룸 왕이 애굽의 바로느고 왕에게 포로로 잡혀가게 된다는 겁니다(왕하23:31~35). 그는 고국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합니다. 그리고 애굽 땅에서 비참하게 죽게 된다는 예언인 것입니다. 살룸 왕이 왕위에 있었던 시간은 3개월 밖에 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왕을 소개하고 있는데, 13절과 14절을 보시면
“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부정하게 그 다락방을 지으며 자기의 이웃을 고용하고 그의 품삯을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가 이르기를 내가 나를 위하여 큰 집과 넓은 다락방을 지으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창문을 만들고 그것에 백향목으로 입히고 붉은 빛으로 칠하도다”
왕이 되어 3개월을 통치한 살룸 왕 다음으로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이 왕위에 오릅니다. 그러나 이 왕은 권력을 통해 사치심과 과시욕을 채우려던 사람이었습니다. 나라가 몰락해가는 마당에 백성들은 고통 중에 빠져 있었는데, 그는 백성들에게 과한 세금을 거둬들여 자신의 왕궁을 화려하게 건축합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품삯은 주지 않는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탐욕과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고, 백성을 압박하고 포악을 행한 자였습니다(17절).
그는 25세 때부터 36세 때까지 11년간 왕위에 올라 있었지만, 주변에 있는 나라들(갈대아군, 아람군, 모압군, 암몬군)이 남유다를 쳐들어왔고,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도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치고, 여호야김을 쇠사슬로 결박해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아 갑니다. 하지만 18절 말씀에 의하면 백성들은 그를 위해 슬퍼하지도 통곡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19절 말씀과 같이 예루살렘 문 밖 즉, 타국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살룸, 여호야김)의 아버지 요시야 왕은 달랐습니다. 15절, 16절에서
“네가 백향목을 많이 사용하여 왕이 될 수 있겠느냐 네 아버지가 먹거나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아니하였느냐 그 때에 그가 형통하였었느니라.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요시야 왕은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권력을 이용하여 사심을 채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형통한 인생을 사는 비결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주셨을 때 그것이 권력과 같은 힘이 될 수도 있고, 재물이 될 수도 있고, 재능이 될 수도 있고, 어떤 환경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왕관을 쓰고 있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주시거나 맡기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거기에는 책임과 의무 그리고 나를 향한 비전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뜻을 다할 때 그는 요시야 왕처럼 형통한 자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