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5:2~3>
– 40일 특새 : 갑절의 은혜를 구하라(20) –
영국의 제 56대 총리를 지낸 ‘데이비드 캐머런(David W. D. Cameron, 1966~)’ 전 총리는 자신이 기독교인이며, 자신의 자녀들이 주일학교를 다니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가 2014년 한 부활절 환영 행사에서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핍박을 받는 종교는 기독교”라고 언급했습니다. 때문에 영국이 박해받는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함을 말했었습니다.
영국 성공회의 2019년 보고서에 의하면 종교적 신념으로 박해받는 사람 중에 ‘80%’가 기독교인이라고 밝혔습니다(영국 트루로 성공회 교구 필립 마운스텐판 목사 / 미국 크리스천포스트). 현재도 144개 국가에서 기독교인들은 박해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유독 기독교만이 이렇게 박해를 받을까요? 간혹 신앙적으로 변질된 교인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질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더 도덕적이고, 더 정직하고, 더 선하게 살려고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만이 유독 박해를 받는 이유는 기독교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타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타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상을 만들지 말고 절하여 섬기지 말라’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우상을 거부했고, 그것은 핍박의 원인을 제공했던 것입니다. 타종교와의 교류와 연합과 같은 것들도 우리에겐 불가능한 문제이기 때문에 기독교가 세상 사람의 눈엔 종교적 독선처럼 혹은 편협한 종교처럼 보이는 겁니다. 또 요즘 사회에 동성애 문제가 심각한데 그것 역시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 말하기 때문에 즉 타협하지 않기 때문에 기독교가 마치 성소수자들을 향한 비인권적인 집단처럼 비춰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에서는 적당히 타협해야 더 너그러운 종교처럼 보이는 겁니다.
타협한다면 진리가 아닌 것입니다. 진리가 타협하지 않는 것처럼, 진정한 믿음 또한 타협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처음 믿음을 갖고, 믿음이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기로에 설 때가 있습니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믿음은 더 이상 영적인 성장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이 그렇다 하면 그런 것이다!’라고 타협하지 않는 믿음은 더 큰 믿음의 진보를 이루어 가고, 그의 삶 속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이 그런 기로에 서 있는 모습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된 지 수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어떤 중요한 결정을 하게 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믿음으로 결단하기도 했었습니다. 물질적인 손해가 온다 할지라도 믿음으로 결단했었습니다.
주님께서 그 모습을 보시면서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들을 때에 손에 잡혀지는 것도 없고, 당장 눈에 보여 지는 것도 없는데 ‘나는 이게 뭔가?’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2절을 보시면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하나님께서 방패가 되어 주셔서 그와 그의 가정을 보호해 주시고, 그의 상급이 되어 주셔서 물질적인 여러 필요들을 공급해 주시는 것들도 감사하고 좋은 것이지만, 아브라함은 마음속에서 ‘저는 지금 자식이 없는데 그럼 전에 주신다고 하신 후손은 언제 주시려합니까? 저와 제 아내는 점점 나이가 더 들어가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3절을 보시면,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지금부터 약 4,100년 전 아브라함이 살던 고대 사회에서는 자신의 상속자가 없을 때에 자신의 노후를 위해, 장례를 위해, 재산의 상속을 위해 종들 중에 주인이 가장 신뢰하는 종을 양자로 삼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했던 자식이 안 생기자 당시 고대사회 사람들의 문화 속에 있었던 대안을 생각했던 겁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자식을 주신다 하셨는데 시간이 지나도 사라가 임신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겁니다. 그렇게 수년이 흐르자 아브라함의 믿음은 흔들렸고, 다른 대안을 찾은 것입니다.
사람은 이처럼 믿음으로 안 되면 다른 방법 또는 타협안을 찾기도 합니다. 하지만 믿음은 끝까지 믿는 겁니다. 진리는 다른 게 섞이면 안 되는 것처럼, 순수한 믿음은 그냥 끝까지 믿는 겁니다.
야고보서 1:6, 7절에 보시면,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아브라함은 중간에 믿음이 흔들렸던 겁니다. 기도했는데 오랫동안 응답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나이는 점점 더 들어갑니다. 상황은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눈에 보이는 것도 손에 잡히는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냥 믿는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지금 아브라함의 상황이 그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흔들렸던 것입니다.
저도 주님의 부르심에 따라 확신을 갖고 세부에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한인교회를 개척하고 사역하는 중간 중간 너무 힘들고 어렵고 앞이 막막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주셨던 그 말씀에 대한 확신이 흔들렸었던 겁니다. 그러면 자꾸 딴 생각을 합니다. ‘내가 지금 한국에 가서 목회를 더 잘 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도 주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불쑥불쑥 올라오기도 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타협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풀무불에 들어가면서 까지도 끝까지 믿음을 지켰던 것처럼 끝까지 믿는 것, 타협하지 않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여러 가지 상황들과 환경들이 우리의 믿음을 흔들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의심을 물리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