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53:4~6>
– 대강절(2) –
제가 필리핀으로 들어와 개척을 시작하고 약 1년 뒤인 2014년 4월 16일은 세월호 침몰사고가 있었습니다. 저는 당시 여기서 TV를 거의 안 보고 살았기 때문에 한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잘 몰랐었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소식을 저는 뒤늦게 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계신 국민들은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났던 300여명의 고등학생들과 100여명의 승객들이 타고 있었던 세월호가 침몰해 가는 모습을 뉴스 생중계를 통해 직접 목격했기 때문에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 사고로 무려 304명이 사망했고, 다행히 172명은 구조될 수 있었습니다. 사고 초기 응급상황에 대처만 잘 했어도 모든 승객들이 생존할 수 있었던 사고였기 때문에 더더욱 안타까웠던 사고였습니다.
그렇게 5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침몰하는 배 안에 갇혀 있는 동안 뉴스에는 세월호의 최초 구조자가 구조되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세월호의 선장이었습니다. 세월호를 빠져나와 구명정에 최초로 승선한 사람들은 선장과 기관사 등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침몰하는 배 안에 승객들을 버려두고 자기들만 살려고 빠져나왔습니다. 선장이 승객들에게 구명조기를 입고 빨리 배 밖으로 나오라고 방송만 했어도 한 사람도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조금도 희생하지 않으려고 했던 그 이기심은 304명의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22세의 박지영 승무원 같은 경우는 학생들을 위해 구명조끼도 양보하고, 학생들이 모두 빠져나갈 때까지 소리 지르며 학생 구조에 마지막까지 힘을 쏟았습니다. 배는 침몰해 가는데 3층에 있는 승객들이 입을 구명조끼가 다 떨어져 없자 기울어져 있는 배의 4층으로 올라가 구명조끼를 가져다가 3층에 있는 학생들에게 나눠 입혔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을 먼저 배에서 뛰어 내리도록 했습니다.
물이 가슴까지 차오르는데 학생 중에 ‘언니는 왜 구명조끼 안 입어요?’라고 말하자 박지영 씨는 “선원들은 맨 마지막이다. 너희들 구하고 난 나중에 나갈께”하면서 학생들을 구조하다가 결국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사고 후 학생들의 증언에 의하면 박지영 씨에게 도움을 받으며 구조된 학생들이 생존자 172명 중에 무려 5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자기만 살고자 했던 이기심은 304명의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지만, 타인의 생명을 살리고자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았던 어린 소녀의 희생은 50여명의 학생들을 살렸던 것입니다. 세월호에는 단원고등학교 교사 14명도 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12명은 살아나오지 못했습니다. 비율적으로 선생님들의 희생이 컸던 것은 끝까지 학생들을 살리기 위해 선생님들이 희생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요한복음 15장 13절에 보시면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언젠가 ‘사랑이란(Love is)’ 무엇인가? 라고 질문하는 것이 유행처럼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은 뭐다. 사랑은 뭐다’라고 정의를 내렸지만, 성경에서 ‘진정한 사랑은 희생이다’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가족을 사랑한다면 이기적으로 생활하지 않습니다. 이기심이 가득한 가정은 늘 다툼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희생이 있는 가정은 늘 사랑이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 24절에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희생으로 인해 오늘 우리가 죄 사함과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기꺼이 죄의 벌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리는 성탄절을 두 주 정도 앞두고 있는 대강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 대신하여 죄의 벌을 받는 종으로까지 낮아지셨습니다. 그것을 통해 어떤 일들을 이루셨는지 함께 살펴보시겠습니다.
1. 나의 슬픔을 가져 가셨다
구약 속에 수많은 메시야 예언이 나오지만,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이사야 53장은 가장 많이 알려진 메시야 예언입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중요한 일들 중에 하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창세기 3장 말씀을 살펴봤는데, 최초의 사람인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함으로 그 때부터 인간에게 시작된 재앙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수치’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게 된 아담과 하와는 부끄러움을 느끼기 시작했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이처럼 죄라는 것은 우리에게 수치감을 줍니다. 그래서 죄 짓고 떳떳한 사람이 없는 겁니다. 그 죄가 드러나면 사람들 앞에서 창피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모든 수치를 가리우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함께 나눴습니다.
죄의 결과 두 번째는 ‘고통’입니다. 하와에게는 임신과 출산의 고통이 주어졌고, 아담에게는 노동의 고통이 주어졌습니다. 죄라는 것은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육체적이고, 정신적으로 여러 가지 고통과 질병과 슬픔 속에서 살아가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어린 학생들은 여러 인간관계의 문제 때문에 힘들어하기도 하고, 자신이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진로 문제 때문에 불안과 두려움 속에 살기도 하고, 여러 가지 열등감으로 인해 괴로움의 나날을 보내기도 합니다.
어른이 되면 나을 거 같지만 어른들에게 물어 보세요. 가장 행복하고 좋을 때가 우리 학생들이 공부만 하면 되었던 그 때라고 대답하실 겁니다. 학생 때는 나의 문제만 힘들어하면 되었었는데, 어른이 되고 나니 책임과 의무라는 게 더 많아졌습니다. 재정적인 문제 때문에 불안하고, 자녀들에 대한 걱정도 있고, 부부관계도 어려울 수 있고,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걱정도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있습니다. 여러 인간관계에서의 어려움 역시 어른이 되어도 더 복잡하게 나타납니다. 그 뿐 아니라 육체적인 질병에 대한 문제, 건강에 대한 염려와 걱정들도 많아지고 어릴 때보다 더 많은 고통과 슬픔의 문제들 앞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담과 하와는 에덴의 낙원에서 쫓겨나면서 영생의 삶을 박탈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생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게 된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구체적으로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4절 말씀 보시겠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infirmities)를 지고 우리의 슬픔(sorrows)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중에 중요한 것 하나가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질고’라는 것의 영어 단어는 ‘질병과 고통’을 의미하는 ‘infirmities’라는 말입니다. 지난 11월 1일부터 21일까지 ‘다니엘 기도회’라는 것을 했는데, 그 프로그램 안에 짧은 영상을 하나 보고 ‘사랑의 헌금’을 드리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 영상에 등장하는 분들은 대부분이 심한 중증 환자들입니다. 어떻게 저런 병이 있을까? 할 만한 희귀병 환자들도 많습니다. 다니엘 기도회에 벌써 수년 째 참여하고 있는데, 매년 마다 또 다른 환우들의 안타까운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에게 질병과 여러 가지 고통의 문제는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 병이 나으면 또 다른 병이 오기도 하고, 이 문제가 해결되면 더 큰 문제로 인해 고통과 슬픔 속에서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0장 34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예수님께서 앞을 볼 수 없는 맹인 거지 두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고 치료해 주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병자들을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치료해 주시는 장면이 복음서에 많이 나옵니다.
인간이 범죄 한 이후 우리 인간에게는 끊임없이 질병과 고통과 슬픔의 일들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때문에 오늘 본문인 이사야 53장 4절 말씀과 같이 우리 인간은 ‘질고와 슬픔’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가난과 질병과 고통과 인생의 여러 가지 슬픔 속에 있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위로하시고, 치료하시고, 온전케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지금도 우리의 슬픔을 가져가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로 나아가면 됩니다. 여러분이 예수님께로 나아갈 때 주님은 우리의 모든 슬픔을 기쁨으로 바꿔주시는 것입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데뷔해서 20여 년 동안 꾸준히 연기자 생활을 하고 있는 배우 최강희 씨를 잘 아실 겁니다. 데뷔하자마자 꾸준하게 인기를 누렸던 배우입니다. 수십 번의 헌혈과 골수기증과 수억 원을 기부하는 등 선행도 많이 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유명한 연예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낮은 자존감과 함께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자신의 감정을 걷잡을 수 없을 때가 많았고 그래서 매일같이 술과 담배를 통해 그 불안함과 우울함을 달랬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상적인 즐거움을 통해서 해소해 보려고도 했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참석한 교회 예배에서 주변 사람들이 통성으로 뜨겁게 기도할 때, 그녀는 하나님께 ‘하나님 저 좀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라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 있던 슬픔을 가져가시고, 자유함과 기쁨과 평안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종종 거리로 나가서 노방 전도까지 한다고 합니다. 이미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연예인으로서 쉽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
그녀가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진짜 자유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해봤을 때, 세상의 자유는 저를 자유롭게 하지 못했어요. 찝찝하고 다음에 수습해야 되고, 결국 내가 점점 죽어갔어요.”
“제가 만난 예수님은 자유예요. 여러분도 그 진짜 자유를 맛보셨으면 좋겠어요.”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질병과 고통과 슬픔과 눈물과 우울함과 열등감과 절망을 가져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이유 중에 하나도 바로 이 이유 때문인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 나의 이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하지만 그게 잘 안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나의 모든 슬픔과 눈물과 우울함과 불안과 열등감과 아픔을 가져가시는 주님께로 나아가십시다. 최강희 라는 배우가 ‘하나님 저 좀 살려 주세요’라고 기도했던 것처럼 기도하셔도 됩니다. 우리의 모든 슬픔을 가져가 버리시는 주님께 나아가시길 축복합니다.
2. 나의 죄악을 가져 가셨다
우리에게 시작된 모든 고통과 눈물은 결국 우리 인간의 죄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슬픔과 눈물도 가져가시지만 최종적이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의 모든 죄를 도말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죄를 범한 사람들을 반드시 벌하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6장23절의 말씀과 같이 ‘죄의 삯은 사망’이라 하셨는데, 우리가 그 죄의 형벌을 받으면 우리는 지옥의 형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실 방편을 하나 만드셨는데, 그것이 바로 ‘대속(代贖) 제물’이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의 구약시대 때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 죄를 용서 받기 위해서 양과 같은 가축을 끌고 와서 그 야의 머리에 안수를 합니다. 안수하는 이유는 자신의 죄를 그 양에게 전가 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양이 자신의 죄를 대신해서 속죄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양을 죽여 피를 흘려 제물로 바치면 그 사람의 죄를 용서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대속 제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죄를 지을 때마다 양을 잡아 죽여야 했으니, 그 구약의 제사가 영원하고도 완전한 제사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20장 2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한 영원하고도 완전한 대속물이 되시려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 이사야 53:5절에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태어나기 700년 전에 이 말씀으로 예언했습니다. 장차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 인간들의 모든 죄와 허물 때문에 찔림을 받고, 상처를 입고, 매를 맞고, 벌을 받아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죄인들을 위해 친히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가져가 버리신 것입니다.
중세 유럽의 왕실에는 ‘휘핑 보이(Whipping Boy)’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왕자들은 장차 나라를 이끌어 가야 할 왕이 되어야 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철저한 교육과 훈육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왕자들 중에 개망나니 같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나라의 왕 다음으로 존귀한 존재가 왕자였기 때문에 교사들은 왕자를 혼내거나 체벌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왕자와 함께 놀아주기도 하고, 친구도 되어 주는 종은 왕자의 모든 생활에 함께합니다. 당연히 왕자가 교육을 받을 때도 같이 합니다. 왕자가 잘 해주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왕자가 잘못했을 때, 궁중의 교사가 존귀한 왕자를 체벌할 수 없기 때문에, 왕자의 벗인 종을 ‘휘핑 보이’로 삼는 것입니다. 휘핑(Whipping)이란 말은 ‘채찍질’이란 뜻인데, 왕자 대신 왕자의 가까운 친구이며 놀이 상대였던 종이 채찍질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휘핑보이’는 ‘희생양, 속죄양’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은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을 대신해서 벌 받는 종이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악합니까? 얼마나 음란합니까? 얼마나 교만합니까? 얼마나 이기적입니까? 얼마나 더럽습니까?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교만과 완악함과 거짓과 위선이 가득하지 않습니까? 마치 의지박약인거처럼 하나님 앞에 죄 짓지 않고 살겠다고 결단했지만 얼마 가지 못해 또 범죄하고 또 넘어지는 게 우리 아닙니까? 우리는 정말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죄를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으로,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수많은 죄를 갖고 있는 나를 위한 휘핑보이(Whipping Boy)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우리의 모든 죄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습니다. 때문에 용서 받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우리가 약해도, 우리의 의지가 형편없어도, 우리가 죄가 많아도, 우리가 실패자여도, 우리가 자격 없는 죄인이어도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기꺼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 벌 받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멀리 옮기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