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이드1

“무덤을 이기시다”

<요한복음 11:32~40> 

– 대강절(3) –

 

 

세계의 8대 불가사이(Wonder) 중에 두 가지가 중국 고대사의 ‘진시황제(BC. 259~210)’와 관계가 있습니다. 진시황제는 중국 역사에 있어 큰 업적들을 남긴 인물입니다.

먼저 기원전 770년부터 BC.221년까지의 중국 고대사를 ‘춘추전국시대’라 하기도 하는데, 특히 각 지역의 뛰어난 왕들이 일어나 전국칠웅이라 불리는 진, 초, 제, 연, 조, 위, 한의 일곱 나라가 서로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진시황은 13세의 어린 나이에 진나라의 왕위에 올라, 도량형을 통일했고, 일곱 나라로 분열되어 있었던 중국을 통일해 황제가 되어 2천년 중국 황조들의 기본 틀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업적 중에 북방의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약 9,000km에 달하는 ‘만리장성’을 쌓았습니다. 여러분이 이걸 그림으로 봐서 그렇지 실제 중국에 가서 이걸 보면 산꼭대기의 높은 능선을 따라 성이 끝없이 쌓여 있고, 아찔한 절벽 끝에도 이 성이 있고, 눈을 들어서 멀리 바라봐도 그 성의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웅장함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걸 보면서 감탄이 나오기도 하지만, 안전 장비도 없이 이 성들을 쌓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군사들과 백성들이 사고로 죽었을까? 를 생각하니깐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또 진시황은 지하에 ‘병마용갱’을 만들었는데, 만리장성과 함께 세계 8대 불가사이 중에 하나입니다. 이 병마용갱에는 키 184~197cm의 큰 병사들 8천여 명의 모형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8천여 명의 얼굴이 다 각각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와 함께 130개의 전차, 520점의 말이 있고, 아직도 다 발굴하지 않아 그 수는 어마어마하다고 합니다. 지하에 거대한 도시 하나가 만들어져 있고, 진시황을 지키는 군대가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진시황은 중국천하를 호령했던 막강한 권력의 절대군주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대단한 인물에게도 두려운 것이 있었는데, 그가 나이를 먹으면서 서서히 늙어갈 수밖에 없었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점점 더 커져갔습니다.

그런 황제의 마음을 알았던 약삭빠른 신하 하나가 늙지 않고 오래 살 수 있는 ‘불로장생(不老長生)’의 약 ‘불로초(不老草)’를 구해올 수 있다고 사기를 칩니다. 마음이 급해진 황제는 신하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불로초를 얻을 것에 대한 기대감에 자원한 그 신하에게 수많은 금은보화와 함께 3,000명의 어린 시녀와 종들을 하사하면서 그 불로초를 구해오도록 명령을 내립니다. 하지만 그 이후 그 신하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중국 천하를 호령하던 절대군주, 엄청난 업적을 이루고, 누구도 그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던 황제였기에 더욱 더 오래 오래 살고 싶었지만, 진시황제는 49세의 나이에 지방순회 중에 사망하고 맙니다. 황궁까지 되돌아가는데 시간이 걸리니 황제의 시신은 썩은 상태로 땅에 매장 됩니다.

 

전도서 9장 3절 말씀에서

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이라 이것은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 중의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아무리 큰 성공을 거뒀고, 아무리 큰 권세를 가졌고, 아무리 많은 재능과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1. 죽음에 이르는 질병

오늘 본문은 한 가정에 찾아온 가족의 죽음에 관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가족은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 동남쪽 4km 지점에 위치한 베다니란 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교회에서 SM City 쇼핑몰 정도 거리에 떨어져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다가 종종 들르셨던 마을이 베다니였고, 그 마을에는 마르다와 그의 자매 마리아 그리고 그들의 오라비인 나사로가 살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그들과 가까웠고 베다니에 들르실 때마다 그들을 만나 교제하셨던 겁니다.

그런데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비 나사로가 병으로 시름시름 앓더니 갑자기 죽게 됩니다. 예수님과 가까운 가정이었음에도 이런 어려움이 오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은 누구든 예외 없이 죽음을 맞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는 자들에게 오는 모든 시련과 고난 속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고,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 반드시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32절 말씀을 보시면,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마리아는 예수님께 급히 뛰어 나가 그 발 앞에 엎드려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통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3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여동생인 마리아가 우는 것과 함께 따라 온 마을 사람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비통(悲痛)이란 말의 한자어는 ‘몹시 슬퍼서 마음이 아프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가까웠던 나사로가 죽었기 때문에 또 그 누이인 마리아의 통곡을 보며 함께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리고 35절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는 장면도 나옵니다. 그래서 주변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나사로를 위해 저렇게 우실 정도로 그렇게 나사로를 사랑 하셨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인간적으로 가까웠던 사람들의 슬픔에 함께 아파하시고 우셨던 것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사로가 처음 병들었을 때, 그 누이들이 예수님께 급히 사람을 보내서 주의 사랑하시는 나사로가 병들었으니 오셔서 몸에 손을 얹고 기도해달라고 요청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소식을 듣고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4절)”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는 지금 한시가 급한데 예수님께서는 그 지역에서 이틀을 더 머무시고 느긋하게 베다니로 떠나는 장면이 나옵니다(1~7). 그리곤 제자들에게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11절)”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물론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것을 가리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33절~36절까지에서 예수님께서 비통해 하시고 우시는 장면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과 같이 단순히 나사로의 죽음 자체를 슬퍼한 것인가요? 아니면 슬픔을 연기한 것인가요? 아니면 예수님께서 비통해 하시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가요?

예수님께서 죽음 앞에 울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비통히 여기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것은 사랑하시는 성도 나사로의 죽음 자체를 슬퍼했다 기 보다는 ‘죄로 인해서 결국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는 인간, 죄라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안타까운 현실을 보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비통해 하시고, 눈물을 흘리셨던 것입니다.

 

 

이 그림 기억나실 겁니다. 두 주 동안 우리가 살펴봤지만 최초의 사람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나타난 결과가 세 가지 있다고 했는데, 첫째는 ‘수치’였습니다. 죄를 짓게 될 때 창피함을 느끼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고통’이었습니다. 여자에게는 해산의 고통, 남자에게는 노동의 고통이 주어졌습니다. 그 외에 인간의 모든 고통은 결국 죄로 인해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죄의 세 번째 결과는 ‘죽음’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도 이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덴마크 출신으로 실존주의 철학자의 선구자로 불리는 ‘쉐렌 키에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1813~1855)’라는 분이 있습니다. 현대의 사상가들과 철학가들 중에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 인물입니다. 그가 자신이 죽기 6년 전에 쓴 『죽음에 이르는 병』이란 책이 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사람은 모두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려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암(癌)과 같은 불치병에 걸린 사람만 죽을병을 앓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암에 걸리지 않았어도 여러 가지 사고와 같은 일들로 인해 더 일찍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간은 이 병을 결코 이겨낼 수 없다는 것이 키에르케고르의 말입니다.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기독교인만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

 

우리가 오늘 이렇게 말씀을 통해 그 사실을 명확하게 들여다보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은 자기 상실이며, 자기를 존재하게 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상실했을 때 발생한다”

 

아담과 하와가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을 때부터 인간에게는 ‘죽음이라는 병’이 시작된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 죽음이라는 병에 걸려 죽을 수밖에 없는 나사로와 사람들을 보며 비통해 하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눈물을 흘리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2천 년 전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죽음이라는 병에 걸려 죽어가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2. 절망에 이르는 불신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의 마을인 베다니에 도착했는데, 그 마을 전체가 절망의 그림자가 가득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절망(絶望)’이란 말의 한자어는 ‘끊을 절(絶)’자에 ‘바랄 망(望)’자를 쓰고 있어서, ‘모든 희망이 끊어진 상태, 더 이상 바랄 수 없는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32절에서 마리아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37절에서 어떤 사람은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라고 말하면서 이미 때가 늦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9절에서 마리아의 언니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무덤의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시니깐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2절에서 마리아도 ‘죽었다’는 단어를, 37절에서 어떤 마을 사람도 ‘죽었다’라는 단어를, 39절에서 마르다 역시 ‘죽었다’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죽었다는 것은 다 끝난 겁니다. 이미 죽었기 때문에 모든 희망이 끊어진 상태 즉 절망의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도, 어떤 마을 사람도, 마르다 역시 절망의 상태인 것입니다. 더 이상 어떤 소망도 가질 수 없는 겁니다. 모든 소망과 희망이 끊어진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일들 앞에서 왜 자꾸 우울한 마음에 사로잡히게 됩니까? 이제 더 이상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니 그런 우울감에 젖게 되는 겁니다.

– 우리 학생들 중에 공부 잘해보고 싶은 친구들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그게 안 되는 겁니다. 머리도 안 되고, 체력도 안 되고, 능력도 안 되는 겁니다. 공부를 못하면 다른 재능이라도 있어야 할 거 같은데, 내가 도대체 뭘 잘하는지 나 자신 조차도 잘 모를 때 우울해 질 겁니다.

– 우리 성도들도 아무리 노력하고 노력해도 이 세부에서의 삶이 나아지지 않는 거 같고, 여전히 재정적으로 어려운 일들과 불안정한 상황들이 반복되고 있고, 나에게 더 이상의 나은 생활을 바란다는 것이 헛된 바람과 같이 느껴질 때 우울해 질 수 밖에 없을 겁니다.

– 영적으로는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데, 예수님을 닮고 싶은데… 여전히 나의 모습은 연약하고 실패하고 또 넘어지고 죄에 빠지는 겁니다. 정말 의지박약과 같고, 형편없는 믿음을 갖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나올 때마다 부끄럽고,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많은 죄들 때문에 나 자신에 대해서 자꾸 좌절이 되는 겁니다.

우리 각자의 삶의 자리는 모두 다르지만 우리는 엘리야 선지자처럼 ‘하나님 나 좀 차라리 죽여 주세요’라고 말하며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는 것입니다. 왜 이런 생각이 드는 겁니까? 내 인생은, 내 꿈은, 내 미래는 ‘죽었다’고 생각 들기 때문입니다.

 

– 나는 더 이상 소망이 없다고,

– 더 나아질 수 없다고,

– 더 새로워질 수 없다고,

– 더 성공할 수 없다고,

– 나는 이제 끝났다고…

 

우리는 나의 더 나은 미래를 ‘불신’ 즉 믿지 못하는 겁니다. 그런 믿음이 없으니깐 절망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매일 우울함과 두려움과 절망과 좌절감 속에 지내고 있는 것입니다.

케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절망에 대한 가장 안전한 해독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다보면 누구나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기도 합니다. 마리아도, 어떤 사람도, 마르다도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도 종종 절망적인 상황 속에 놓이게 됩니다.

그런데 그 절망이라는 독이 우리의 정신과 마음과 영혼과 인생에 퍼져 점점 우리를 죽음으로 몰고 가고 있지만, 그 절망에 대한 가장 안전한 해독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 23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믿음은 모든 두려움과 우울함과 염려와 걱정과 좌절과 절망을 우리의 인생에서 몰아내기 시작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절망을 몰아내시는 것입니다.

 

3. 생명에 이르는 믿음

앞부분에서 말씀드렸지만 믿음은 우리 안에 있는 절망이라는 독을 해독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믿음이 우리를 다시 살려내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생명인 것입니다. 때문에 주님께서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그 믿음을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가 묻혀 있는 무덤의 돌문을 열으라고 하시자, 마르다는 ‘주여 오빠가 죽은 지 이미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오빠의 시체는 벌써 썩어서 냄새가 나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미 죽었다는 겁니다. 이미 끝났다는 겁니다. 죽었기 때문에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40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릴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오늘 그 믿음을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 주변에 ‘군중과 무리’는 항상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언제나 약장수 구경하듯이 구경만 하고 있는 구경꾼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구경 한 것 외에 무엇을 했는지 모릅니다. 성경은 그들에 대해서 별 말씀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군중들 사이에 항상 주인공들이 등장합니다. 어떤 사람들이냐면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적으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네 믿음대로 되라. 네 믿음이 복되도다.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0장 29절에서 예수님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믿는 자들은 군중들 속에서 축복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간증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간증의 주인공들을 보면 어쩌다 보니 우연히 그렇게 된 게 아닙니다.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철저하게 믿고, 그 믿음대로 된 것입니다.

제가 교회 개척에 대한 부르심을 처음 받을 때, 주님께서 저에게 보여주신 비전의 환상이 하나 있었습니다. 저는 안전한 배에 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감히 그 안전한 배 밖으로 발을 내밀어 물 위를 걸을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저에게 도전하셨습니다. “배 밖으로 발을 내밀어 나가는 자만이 물위를 걸을 수 있게 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기도하면서 이 싸움을 했습니다. 제 연약한 마음과 작은 믿음은 배 밖으로 발을 내미는 것을 자꾸 말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 안에 계신 성령께서는 믿음으로 배 밖으로 발을 내밀라고 말씀하시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믿음으로 발을 내밀었고, 지금 이 세부에서 주님의 교회를 세워가고 있는 것입니다.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영국의 사회학자이며 철학자인 ‘존 슈트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믿음을 가진 1명은 흥미만 있는 99명과 맞먹는다.”

 

믿음은 안 될 것도 되게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 무덤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영혼을 살리고, 우리 인생의 죽어 있는 여러 영역들을 살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여러분 개인과 가정과 자녀와 학교와 직장과 이 사회와 세상을 살리는 생명의 능력이 될 줄 믿습니다. 여러분 안에 죽어 있는 나사로들이 믿음으로 다시 살아나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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