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2:1~5>
– 70/10 특별새벽부흥회 <1차> : 블레싱(7) –
우리나라의 근대사는 뼈아픈 슬픔의 역사를 갖고 있었습니다. 1910년부터 일본제국은 우리나라를 35년간 짓밟고 식민통치했습니다.
하지만 1945년 8월 15일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면서 일본의 항복을 받아냈고, 2차 세계대전 종식과 함께 우리나라는 독립과 해방을 맞게 됩니다.
하지만 1945년 8월 15일 해방일로부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선포될 때까지 한반도는 혼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한반도와 중국 일대에서 미국과 소련은 연합군으로서 일본을 상대로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기 때문에 한반도를 놓고 승전국으로서의 보상(전리품)을 바랐습니다. 그래서 미소 공동위원회 등을 열기도 했지만 양측의 이해가 다르기 때문에 결렬되고, 소련은 계속해서 한반도를 통째로 먹으려고 시도했고, 미국은 이를 견제했던 것입니다.
결국 북위 38도선을 중심으로 남한과 북한은 분단되었고, 그 슬픈 역사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힘이 없던 우리는 강대국들의 힘겨루기에 이리저리 치이고 있었던 겁니다. 만약 그 때 소련이 원하는 대로 되었다면 대한민국은 지금 공산국가가 되어 있을 것이고, 북한의 김일성을 신처럼 섬기는 불행한 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소련이 북한의 지도자로 세운 김일성은 소련의 군사지원을 받아 남침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각종 대포들을 2천대 정도를 보유하고 있었고, 탱크도 242대, 전투기와 전폭기도 226대 등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이이 비해 한국은 변변한 대포도 없었고, 탱크와 전투기는 단 한 대도 없었습니다. 1949년 주한 미 군사고문단은 한국 육군은 애국심 하나만 빼면 1775년 미국의 독립전쟁 당시 미군의 수준과 비슷한 군사력이었다고 평가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1950년 6월 25일 새벽 모두가 잠들어 있던 때 북한의 김일성은 이 엄청난 군사력을 앞세워 남침을 감행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단 3개월 만에 부산을 중심으로 한 낙동강 방어선을 제외한 모든 남한 땅을 점령해 버립니다. 북한은 엄청난 현대 화기들로 밀고 내려오는데, 남한은 1775년 미국이 갖고 있었던 군사력으로 방어를 하니 이게 전쟁이나 되겠습니까?
하지만 1950년 9월15일 유엔 사령부의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하면서 미국과 유엔 연합군의 참전으로 전세는 다시 역전되었습니다. 두 달여 만에 한국과 미국, 유연 연합군은 북한의 압록강까지 치고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1950년 11월 25일 인해전술을 앞세운 중공군의 북한 지원을 통해 두 달 만에 남한과 미-UN연합군은 평택과 단양-삼척시까지 밀리게 됩니다.
그리고 1953년 7월 27일 휴전할 때까지 양측은 엎치락뒤치락 했던 것입니다. 한국전쟁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결국 전쟁은 끝내지 못하고 남북한은 70년이 넘도록 분단의 비극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세상의 역사는 힘 있는 자에 의해서 재편되게 되어 있습니다. 슬픈 일이지만 당시 우리나라는 남한과 북한 모두 스스로의 힘은 없었고, 주변의 강대국에 의해서 역사가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어떤 강대국이 누구의 편에 서느냐에 승패가 달려 있었고, [북.중.러 | 남.미.UN] 구도로 지금까지 있는 것입니다. 1775년 미국의 군사력에 평가될 만큼 형편없었던 우리에게 그나마 다행인 것은 미국과 유엔이라는 국제기구가 있었으니 다행인 것입니다.
시편 118편 6절을 보시면,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우리의 인생 속에서도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 엄청난 재정적인 압박에 이렇게 가다가는 내 인생이 산산이 조각나 파산하게 될 것 같은 두려움이 몰려오기도 합니다.
– 이유 없이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 복잡한 인간관계를 해결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습니다.
– 자녀 문제도 그렇습니다. 나름대로 잘 살아왔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자녀는 내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부모가 아무리 똑똑해도 자녀 문제는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안 되는 겁니다.
– 우리 자녀들, 자신의 진로 문제도 그러할 겁니다. 성장기 때 얼마나 많은 꿈들이 있었습니까? 하지만 꿈이 좌절되기도 하고, 내 실력과 능력과 환경이 따라주지 않아 내가 원하던 대로의 삶을 살지 못하게 될 때, 얼마나 낙심이 됩니까? 그 때 누군가가 나를 밀어 주었으면, 나를 도와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편 말씀에서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신다고 고백합니다. 세상의 여러 가지 일들과 상황들 또는 사람들이 나를 괴롭게 하고 두렵게 할지라도 주께서 내 편에 서서 싸워 주실 때 우리는 능히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약하지만 주님이 강하십니다. 나는 가진 게 없지만 주님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십니다. 나는 실패할 수밖에 없지만 주님은 나를 이끌어 승리케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편이십니다. 2020년 내 편에 서 계신 하나님으로 인해 한 해를 승리하길 축복합니다.
1. 순종의 사람 편에 서계신다.
하나님께서 내 편에 서 계시길 원하지만 불순종하는 사람, 말씀을 거스르는 사람,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사람 편에 서 계시지는 않는 것입니다.
1절 말씀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하나님께서 불신자였던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도 불순종하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순종해야 하는 걸 몰라서 불순종하는 게 아닙니다. 순종해야 하는 줄 알면서도 순종이 안 되고 있는 겁니다.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을 겁니다. 아직 그것까지는 못하겠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그건 순종하기 싫은 거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그것만큼은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유야 어떻게 되었건 그것은 불순종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아브라함에게 이 말씀에 순종한다는 게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더구나 아버지 데라가 반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데라는 ‘나 죽기 전에는 안 된다. 나는 떠날 수 없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연로한 아버지를 거역할 수 없었을 것이고,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것이 지체되었습니다.
그 문제 뿐 아니라 아브라함을 두렵게 하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었습니다.
– 첫 번째는 먼 여정 속에 있는 여러 가지 위험 요소들이었습니다. 고대 사회는 무법천지였기 때문에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들이 여행 중에 보호받을 수 있는 장치들이 없었습니다.
– 두 번째는 가족과 친척 즉 자신의 부족을 떠난다는 것 역시 가족의 안전을 보장 받지 못할 무모한 계획인 것입니다.
– 세 번째는 75세에 뭔가 새로운 것을 다시 시작한다는 것 역시 어려운 일입니다. 제가 지난 7년 동안 교회를 개척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하나님께서 다시 하라 하면 또 해야겠지만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 또 다른 하나는 신앙과 감정 사이의 여러 가지 의심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잘 못 들은 거 아닌가? 내가 잠시 환각 상태에 빠졌었나? 내가 꿈을 꾼 건가? 이 모든 게 아무것도 아닌데 내가 괜히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건 아닐까?…’ 아브라함이 절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의심들로 인해 순종과 불순종 사이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 부분에서 위대한 이유는 이런 여러 가지 불순종의 요인들이 있었지만 믿음으로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증거들이 나타난다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흥미로운 구문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1절 : I will show you(내가 너에게 보여 줄)
2절 : I will make you,
I will Bless you
I will make your name great
3절 : I will bless those who…
I will curse;
I will be blessed…
이게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내 편에 서서 일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삶이 역사가 되고, 기적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눈앞에 보여 지는 게 아무것도 없고, 보장된 것도 없지만 믿음으로 순종하며 나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순종의 사람 편에 서계십니다. 하나님은 순종의 사람을 위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19세기 청교도 시대에 가장 존경받던 설교자 중에 한 사람인 ‘토마스 왓슨(Thomas Watson, 1620~1686)’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라기보다는 우리의 특권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것만을 명령하시기 때문이다.”
여러분, 순종하는 것이 복입니다. 우리가 순종할 때 하나님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2. 지키시고 복이 되게 하신다.
하나님은 순종의 사람의 편에 서계시고,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일들과 역사들을 일으키십니다. 그 중에 하나가 그를 지키시고 그의 삶이 복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3절 말씀을 보시면,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 구절은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모와 같은 모습으로 대응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 자녀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고, 좋은 관계 속에 있는 친구들에게 부모라면 어떻게 합니까? 불러다 떡볶이도 해 주고, 피자도 시켜주고, 생일날 뭐도 사주고… 그러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자녀를 괴롭히는 녀석에게는 부모가 어떻게 해 주겠습니까? 만나기만 하면 걷어차고 싶은 마음이 크지 않겠습니까? 경찰에 고소해 버리고 싶기도 하고, 아주 혼줄을 내주고 싶은 게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아브라함에게 이런 약속을 주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보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갔었을 때 바로 왕에게 아내인 사라를 뺏길 뻔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호하셔서 사라도 아브라함 품으로 다시 돌아왔고, 애굽에서 나올 때 바로 왕으로부터 엄청난 양의 종들과 가축과 재물들을 이끌고 나오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지키시고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대로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편에 계시기 때문에 이런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에게는 복을 주시고, 저주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를 저주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르는 우리에게 동일한 축복과 약속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믿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를 괴롭히고 그런 사람이 있으면 제가 속으로 그럽니다. ‘어? 나한테 잘 해야 할텐데? 안 그러면 위에 계신 분이 화내실 텐데?…’ 좀 장난스럽게 생각하는 거지만, 농담반 진담반이라는 말과 같이 저는 정말 그런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저를 만나는 사람이 복을 받게 될 것이고, 저와 좋은 관계 속에 있는 이들이 복을 받게 될 것이고, 반대로 저를 괴롭히면 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이런 믿음은 저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을 따르는 믿음을 갖고 있는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순종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서 우리 편에 계실 때에 3절의 약속의 말씀이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2020년을 승리하는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내 편에 계시면 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 편에 서계십니까? 순종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그 약속들을 이루기까지 결코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