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18>
1955년 미국의 하와이 카우아이 섬에서 출생한 신생아 833명이 성인이 될 때까지 추적하는 대규모 사회과학 연구가 있었습니다. 이 시기의 카우아이 섬 주민 대다수는 범죄자나 알코올 중독자 혹은 정신질환자들이었습니다. 심리학자 에미 워너는 전체 연구 대상자 중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자란 201명을 추려냈는데, 이들은 극빈층 가정, 가정불화, 부모의 알콜 중독 또는 정신질환을 갖고 있었습니다. 가정환경이 그러니 이들은 나머지 아이들에 비해 사회 부적응자 비율이 훨씬 더 높았습니다.
그런데 그 201명의 열악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 중에 72명은 별다른 문제없이 평범하게 또는 훌륭하게 잘 성장한 겁니다. 연구를 진행한 에미 워너는 그 72명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분명 그들의 환경은 매우 열악하고, 사회 부적응자가 될 만한 상황들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72명의 아이들이 잘 성장하거나, 훌륭하게 자란 것은 그 아이를 이해해주고, 응원해주고, 격려해주고, 사랑해주고, 받아주는 어른이 그 아이 주변에 한 사람은 있었습니다. 부모님 중에 한 사람이 아니면, 조부모 중에 한 사람 또는 친척, 선생님, 목사님…과 같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어떤 역경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훌륭한 사회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의 어린 시절은 매우 불우했습니다. 저 역시도 사회 부적응자가 될 가능성이 매우 컸었던 사람이었을 겁니다. 저는 종종 제가 이렇게 목회자가 되어 누군가의 영혼을 돌보고, 그들을 돕는 삶을 산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은 그럴 자격도 없고, 그렇게 훌륭한 삶을 살지도 않았었기 때문에 자격으로 보자면 많이 떨어진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제가 이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저를 사랑해주시고, 기다려 주시고, 기회를 주시고, 격려해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우리 하나님의 사랑 때문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바로 얼마 전에 소돔 백성들을 하나님의 심판 속에서 살려내기 위해 중보 하던 제사장적인 역할을 하는 멋진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면 우리는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처음 부름 받았을 때 그는 초신자였습니다. 그 때 먹을 것을 찾아 애굽에 내려갔었다가 자기 부인 사라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여서 하마터면 아내를 애굽 왕 바로에게 뺏길 뻔 했었습니다.
그 때는 신앙적으로,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데, 오늘 본문에 똑같은 사건이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적어도 25년 정도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고, 그 사실을 주변에 있는 다른 부족 사람들도 다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때문에 이 부분을 읽는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실망스런 모습에 실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2절과 3절을 보시면,
“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더니,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라를 아내로 삼기 위해 데려간 그랄 왕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 그 일을 막으시게 됩니다. 아비멜렉 입장에서는 억울한 생각이 들어서 자신은 사라가 아브라함의 누이인 줄 알고 아내로 삼으려 했다고 자신을 변호하게 됩니다.
그리고 7절을 보시면,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에게 사라를 아브라함에게 돌려보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사실 이 부분을 읽을 때 뭔가 부끄럽고 창피한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불신자 아비멜렉이 잘못한 게 아니라, 여호와 신앙을 갖고 있는 더더구나 선지자라고 하는 자가 너무나도 명백한 잘못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리고 8절부터 10절까지 보면 다음날 아침 불신자인 아비멜렉이 선지자라고 하는 아브라함을 불러서 책망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책망을 받을 만한 짓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창피한 일입니까?
그런데 17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으니”
불신자 아비멜렉에게 책망 받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시고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여서 그들이 임신과 출산을 할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족하고 못난 아브라함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로, 치유의 기도자로 사용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개봉한 『계춘할망』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계춘이라는 할머니가 어린 손녀와 단둘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손녀딸을 잃어버립니다. 손녀딸은 비행청소년으로 자라 끔찍한 범죄에 가담하기도 하고, 방탕한 성장기를 보내다가 12년 만에 극적으로 할머니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눈물로 재회하고 다시 할머니와 손녀의 행복한 동거는 시작됩니다. 하지만 계춘할머니는 12년 동안 손녀가 어떻게 살았는지, 얼마나 험악한 시간들을 보냈는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그 영화 속에서 계춘할머니가 뭔가 늘 근심이 있어 보이는 손녀딸에게 이렇게 말했는데, 이 말이 저에게도 큰 감동이 되었습니다.
“세상살이가 힘들고 지쳐도 온전한 내 편 하나만 있으면 살아지는 게 인생이라… 내가 니 편 해줄 테니 너는 너 원대로 살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얼마나 형편없는 사람인지 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얼마나 못나고 연약한 사람인지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도 떠나지도 않으시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내게 손가락질 한다고 해도 언제나 내 편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믿음으로 오늘을 살아내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