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7:15~29>
요즘 정치하는 어떤 목사로 인해서 한국기독교가 욕을 많이 먹고 있습니다. 지난 10월에 있었던 어떤 집회에서 이 사람이 뭐라고 했냐면 자기 자신을 가리키면서
“앞으로 대한민국은 OOO목사 중심으로 돌아가게 돼 있어요. ‘하나님 꼼짝마’ 왜 그런 줄 알아요? 나에게 기름부음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보좌를 딱 잡고 살기 때문에 ‘하나님 꼼짝마,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 내가 이렇게 하나님하고 친하다 말이에요.”
이 사람은 수년전부터 ‘막말 파문’이 있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신성모독적인 발언에, 과대망상증까지 있어 보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혹은 야훼)’라고 하는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부르는 것이 망령되다 생각해서 성경을 읽다가도 그 이름이 나오면 야훼 대신에 ‘주님’이란 뜻의 ‘아도나이’로 읽었다고 합니다. 또한 성경을 기록하던 서기관들의 경우 성경사본을 만들 때 야훼의 이름이 나오면 쓰던 붓을 빨아서 새 붓으로 그 이름을 썼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 정치하는 목사의 생각과 정신이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진보정치의 가치와 성경과 기독교의 가치는 여러 부분에서 충돌하기도 합니다. 진보진영에 속한 정치인과 지식인들은 교회와 기독교를 공격하기도 하고, 보수적 기독교 단체와 지식인들 역시 진보진영을 비난합니다. 우리는 진보와 보수가 아닌 성경의 가치를 통해 이 사회와 정치와 세상을 볼 수 있는 균형 잡힌 눈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보수도, 진보에도 치우치지 마시고, 성경을 통해 모든 것을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정치하는 교회와 목사님들은 그것이 복음과 조국을 위한 길이라는 애국과 충정의 마음으로 할지는 모르지만, 도리어 그것이 복음의 문을 점점 닫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우고, 교회를 앞세우고,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면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데 도리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더디게 만드는 길일 수 있습니다.
성경 속에 있는 이야기들 중에도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뜻이 충돌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이삭이 나이 들어 앞이 보이지 않고 앞으로 얼마나 더 살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족장으로서 장자의 축복을 하길 원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이삭은 쌍둥이 형제 에서와 야곱 중에 형인 에서에게 장자의 축복을 해 주려고 했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뜻과 이삭의 뜻이 충돌하는 장면입니다. 왜냐하면 리브가가 임신했을 때, 하나님께서 형이 아닌 동생에게 장자의 축복이 있게 될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삭은 그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큰 아들로서 늘 든든하고 그의 마음에 들었던 쌍둥이 형인 에서에게 장자의 축복을 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리브가와 동생 야곱은 눈이 어두워 잘 분별하지 못하는 이삭을 속여 그 축복기도를 가로채려 했던 것입니다. 리브가와 야곱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그 뜻을 이루려하는 것이지만 그 방법이 옳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길 원한다면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야 옳았던 것입니다.
리브가는 급히 남편 이삭이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야곱에게 에서의 옷을 입히고, 손과 팔 등에 염소 털을 붙여 에서처럼 꾸밉니다. 그리고 야곱은 아버지 이삭이 좋아하는 음식을 들고 이삭에게 나아가 ‘아버지’하고 부릅니다. 아버지 이삭은 ‘누구냐?’하고 묻습니다.
오늘 본문 19절에 보시면
“야곱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내가 하였사오니 원하건대 일어나 앉아서 내가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아버지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야곱은 아버지 이삭에게 자신이 ‘에서’라고 속입니다. 그리곤 음식을 맛있게 드시고, 하나님의 축복을 마음껏 자신에게 해 달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삭은 생각보다 빨리 에서가 사냥에 성공한 것이 놀라워서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왔는냐’고 물었습니다. 야곱은 20절에서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순조롭게 만나게 하셨다”라고 다시 한 번 아버지를 속입니다. 이삭은 목소리가 에서가 아니라 야곱의 목소리라고 의심이 되었기 때문에 24절에서 “네가 참 내 아들 에서냐”라고 묻고, 야곱은 “그렇습니다”라고 또 다시 아버지를 속입니다. 눈이 어두웠던 이삭은 장자와 입 맞추기를 원했고, 야곱은 27절에서 형 에서인 것처럼 거짓으로 아버지 이삭에게 입 맞추게 됩니다. 다시 아버지를 속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삭은 동생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합니다.
리브가와 야곱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상황은 이대로 가다가는 형인 에서가 장자의 축복을 받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감쪽같이 속여서라도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길 원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리브가와 야곱은 여러 차례 이삭을 속이는 장면이 오늘 본문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이 사실을 알게 된 에서는 동생 야곱을 죽이려 하고, 야곱은 급히 밧단 아람으로 도망가 20년 동안 부모님도 못보고 타지에서 고생하며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못된 방법으로 이루려고 했던 야곱은 도리어 더 많은 고생과 시련의 시간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인간적인 방법이나, 세속적인 욕심으로 이루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시간을 더 더디게 만들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 좀 더디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표를 내 시간표에 맞추려고 하지 말고, 우리의 시간표를 하나님의 시간표에 맞춰가는 것인 진짜 믿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선하게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순종하며 그 인도하심을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