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이드1

“전도자”

<요한복음 4:3~15> 

 

 

흥미로운 자료 하나 보여 드릴께요. 15세기에서 17세기에 우리 조선의 남성의 평균 키가 일본 남성의 평균 키보다 약 5~6cm 정도 더 컸다고 합니다. 2016년 유로 사이언스 오픈 포럼(ESOF)에서 발표된 자료에 의하면, 한국 여성의 평균 신장은 1914년 142.2cm에서 100년 뒤인 2014년에는 162.3cm로 무려 20.1cm나 컸습니다. 179개국 중에 상승폭 1위를 기록했습니다. 같은 기간 한국 남성도 159.8cm에서 174.9cm으로 15.1cm 커서 세계 3위의 상승폭을 기록했다는 겁니다. 물론 일본도 이 기간에 크긴 컸지만 여전히 우리나라 국민들이 일본 사람보다 키가 큽니다.

1904년에서 1905년 한국을 방문했던 스웨덴 신문기자 ‘아손 그렙스트(William Andersson Grebst, 1875~1920)’가 쓴 『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 전 한국을 걷다』란 책에 보면,

“한국인들은 일본인보다 머리통 하나가 더 있을 정도로 키가 컸다. … 태도는 자연스럽고 여유가 있었다. …일본인의 특징인 벌벌 기는 비굴함과 과장된 예의 차리기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일본 사람들보다도 키도 크고, 여러 가지 면에서 분명 우수한 유전자를 타고 났습니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 수백 년 동안 일본에게 짓밟히고, 아예 나라를 뺏겨 35년간 식민 지배를 받기도 하고, 근현대사에도 경제적으로 늘 열쇠였습니다. 1980년에는 일본과 우리의 경제력 차이는 약 20배였고(GDP), 2000에는 9배, 2013년에는 4배까지 격차가 줄어 이제는 일본의 턱밑까지 쫓아갔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그동안 우리보다 앞섰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1543년 태풍을 만나 심하게 파손된 대형 선박이 일본의 해변에 밀려왔습니다. 선원 대부분이 중국 명나라 사람들이었는데, 그 중에 세 명의 포루투갈 사람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80cm 정도 크기의 총을 갖고 있었는데, 당시 일본에는 총이 없던 시대였습니다. 일본인들은 배를 수리하고 6개월간 그들을 치료하고 숙식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그들로부터 총 3정을 넘겨받게 됩니다.

그리고 대장장이를 시켜서 6개월간 그 총을 똑같이 복제하는데 성공했고, 그 총기를 힘입어 일본은 임진왜란을 일으켜 우리 조선을 사정없이 유린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일본은 서구문물의 수용이 빠르고 적극적이었습니다. 동양에 비해 꽤 발전되었던 서양의 문물과 학문들을 일본은 모두 수용해 자기네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반면 우리 조선은 오랫동안 쇄국정책을 통해 서구문물을 거부해 오고 있었습니다. ✓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의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이 1653년 상선을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도중에 난파되어 제주도에 표류하게 되는데, 우리 조선은 38명의 선원들을 가두고 13년 동안 귀향 보내 중노동을 시키게 됩니다. 후에 우여곡절 끝에 일본으로 탈출해서 1668년 네덜란드로 귀국하기까지의 고된 여정을 기록한 책이 그 유명한 『하멜표류기』입니다.

그리고 1865년 미국의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을 통해 들어오던 27세의 ‘토마스 선교사’는 조선 땅을 밟자마자 참수형을 당합니다. 그 때까지도 우리 조선은 서구 문물을 무조건 거부했었습니다. 하지만 호시탐탐 조선을 탐내던 일본이 결국 1875년 막강한 화력으로 강화도 초지진으로 밀고 들어와 우리 측에 불리한 불평등조약을 맺게 되고, 이것이 1910년 무력으로 우리나라를 식민통치하게 된 시작점이 된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일본보다는 350년 정도 뒤졌지만 19세기 후반 서구 선교사님들과 함께 뒤늦게 서구 문명을 받아들여 개화가 시작되었고, 그 복음 아래에서 2020년 오늘날의 놀라운 영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무엇이든 명(明)과 암(暗) 즉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있습니다. 일본이 서구문물을 빨리 받아들여 아시아에서 가장 빠른 경제성장을 이룩한 것은 ‘명’이라 할 수 있고, 그렇게 얻은 힘을 주변 나라를 침략하여 제국주의 야욕을 채우는데 쓴 것은 ‘암’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 때가 있었겠지만 만약 우리나라가 조금 더 빨리 서구 문명과 복음을 받아들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여러 가지로 우수한 민족이었던 우리는 어쩌면 좀 더 일찍 아시아 최강의 국가로 발돋움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조심스럽게 해 봅니다.

저는 열아홉 살에 처음 교회에 나와 예수님을 영접했는데, 가끔은 ‘내가 만약 좀 더 일찍 복음을 받아들였다면… 나의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이처럼 우리가 지금 무엇을 받아들이느냐, 어떤 길로 가느냐? 는 결국 우리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다른 인생으로 바꿀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누군가에게 우리가 믿고 있는 이 복음을 전할 때, 또 다른 한 사람의 인생은 놀랍게 변화될 것입니다.

 

 

1. 전도는 찾아가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유대라는 지역에서 갈릴리라는 지역으로 가시는 길에 있었던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3~4절). 본문을 이해하려면 이 지역을 중심으로 한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고 있으면 조금 도움이 될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왕 때에 북이스라엘 왕국과 남유다 왕국으로 분열되었습니다. 그러니깐 이스라엘이 두 나라가 된 것입니다.

분열왕국으로 수백년을 보내다 BC.722년 앗수르(앗시리아)에 의해 북이스라엘이 멸망합니다. 앗수르는 북이스라엘이 독립하지 못하도록 똑똑하고 잘난 백성들은 포로로 잡아가기도 하고, 앗수르 백성들 중에 상당수가 북이스라엘 땅에 이주해 그곳 사람들과 결혼해 혼혈백성이 되도록 해 버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오늘 본문에서 ‘사마리아’라고 불리는 북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백성으로서의 혈통적, 종교적 정체성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남유다 같은 경우는 이스라엘의 12지파 중에 유다지파를 중심으로 왕국의 명맥을 유지하다가 BC.586년 바벨론에 의해 멸망합니다. 그런데 바벨론은 유대 땅을 경작할 천한 농부들만을 그곳에 남겨두고, 나머지 유다 사람들은 모두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아갔던 겁니다. 하지만 70년 뒤에 유대인들은 다시 유대 땅과 예루살렘으로 그대로 돌아와 종교적, 혈통적 정통성을 유지하며 신약시대까지 계속 그 땅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페르시아 제국과 헬라제국과 로마제국으로 이어지는 제국의 역사 속에 ‘갈릴리’라는 곳은 점차 많은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이 되어, 비록 예루살렘 사람들로부터는 촌사람들이라는 무시를 받긴 했어도 유대인들의 정통성을 유지하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니깐 예수님 당시 유대와 함께 갈릴리는 유대인 거주 지역이었고, 사마리아는 과거 앗수르로부터 온 사람들과 북이스라엘 사람들의 혼혈민족이 거주하는 지역이었습니다. 때문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혈통적, 종교적으로 혼합된 사람들로서 이스라엘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거의 이방인 취급해서 상종을 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유대인들이 갈리리 지역으로 갈 때는 직진해서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 대부분 사마리아를 우회하여 멀리 돌아서 갈릴리 지역으로 갔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5절을 보시면,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그리고 6절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우리 시간으로 낮 12시 햇볕이 강하게 내려쬐는 정오에 유대인이었던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의 수가라는 하는 동네의 한 우물곁에 앉으시는 장면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유대인이었습니다. 때문에 유대인으로서 사마리아 땅으로 들어가는 것은 그들 사이에선 불경스런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땅의 수가라는 마을에 들어가셨고, 그것도 가장 뜨거운 시간인 낮 12시에 우물가에 가셨다는 것은 이상한 행동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중동 사람들은 지금도 정오를 전후해서는 일을 하지 않고 잠을 자거나 쉽니다. 그리고 조금 시원한 이른 아침이나 늦은 오후에는 움직이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사마리아의 수가라는 마을에, 그 시간에, 그것도 우물에 가셨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7절을 보시면,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예수님이 유대인들이라면 다 멀리 돌아서 가야 하는 사마리아를 직접 오신 것은 아무도 물을 길으러 나오지 않는 그 정오의 시간에, 물을 길으러 나올 수밖에 없는, 사연이 많은 이 여인을 만나시려고 오셨던 것입니다.

전도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 있는 것처럼 그 복음을 기다리고 있는 누군가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제가 열아홉 살에 교회를 나오게 된 것은 열여덟 살 후반기에 저에게 특별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고아처럼 버려져 자랐었습니다. 그러다 그 해 12월 26일 어디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 저의 아버지, 자식들을 버린 그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제가 장남이며 자식이라는 이유로 저는 주소가 써 있는 종이쪽지 하나를 들고 그 추운 겨울에 아버지의 시신이 있는 곳을 찾아갔고, 얼음처럼 꽁꽁 얼어 있는 시신을 앞에 두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5일간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어야 했습니다. 처음 죽음이라는 실제적인 현실과 두려움 앞에 5일 동안 저는 꼼짝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저의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저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때부터 저는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이끌리어 마음으로 계속 하나님을 찾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장례를 마치고 열아홉 살이 되었을 때, 저는 주님의 부르심을 느끼고 있었고, 이제 정식으로 교회에 나가 예배에 참석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의 구주로 영접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 나오신 것 같지만, 주님께서 그 전부터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셨고, 마음을 움직이셨고 그래서 여러분이 이 자리에 계신 것입니다.

 

찬양 중에 『시간을 뚫고』라는 찬양의 가사는

당신은 시간을 뚫고 이 땅 가운데 오셨네

우리 없는 하늘 원치 않아 우리 삶에 오셨네

자신의 편안 버리고 우리게 평안 주셨네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우리 삶에 오셨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사람이 신을 찾아 나서는 것이지만,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의 이 여인과 같이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아픔과 염려와 근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시는 것입니다. 미래가 두렵고, 진로의 문제가 걱정되고,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인생의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괴로움과 고통 속에 있는 이들을 찾아가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작은 예수가 되어 주셔서 이 복음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을 찾아가시는 한 주간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2. 준비된 영혼이 기다린다

예수님께서 우물에 도착하자 한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으러 그 우물에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말합니다.

 

9절을 보시면,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유대인 남자가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했던 이 일에 그 여인은 깜짝 놀란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풍속으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는 상종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고 인종차별하며 상종도 하지 않았다면, 사마리아 사람들 입장에서는 얼마나 기분이 나쁜 일이겠습니까? 그러면 사마리아 사람도 유대인들에게 결코 좋은 감정을 가질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이 여인과의 만남을 보면 그런 분위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고, 도리어 이 여인이 유대인이었던 예수님께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깐 말이 계속 이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감정적으로 반응하거나 거부하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면 더 이상 말이 이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유대인인 이 남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나한테 말을 걸어오지?’라는 그 사람에 대한 관심이 생겼습니다. 이 여인은 준비된 영혼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교회 앞에 있는 알리시아 아파텔에는 자녀들 데리고 어학연수나 유학을 온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고, 우리 성도님들도 많이 살고 계십니다. 알리시아에 사시는 우리 집사님 중 한 분이 여기 오셔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교회가 바로 앞에 있으니깐 우리교회를 나오셨습니다. 처음 교회 나오셔서 은혜 받으시고 너무 좋으셨나봅니다.

어느 날 알리시아 풀장에 있는데 어떤 엄마가 있길래 갑자기 우리교회로 인도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서 말을 걸었는데, 그 분이 흔쾌히 나오시더라는 겁니다. 이 분이 누구냐면 지금은 대구로 귀국하셨지만, 병원에서 일하시느라 16년 동안 교회를 떠나 있으셨었던 정민혜 집사님이십니다. 우리 집사님에게 전도 받고 우리 교회에서 2년 동안 신앙 회복하고, 열심히 신앙생활하다 대구로 돌아가셨습니다.

나중에 전도한 우리 집사님이 저한테 ‘목사님, 저는 그런 사람 아닌데(그렇게 모르는 사람한테 말을 걸고 전도하고 그러는 사람) 갑자기 저도 모르게 교회 얘기를 하고 전도하게 되었어요.’ 그러시는 겁니다. 준비된 영혼이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준비된 영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용기를 내서 그들에게 한 번이라도 복음을 들을 기회를 주시길 바랍니다.

 

 

3. 그는 놀라운 전도자이다

예수님은 그 여인이 누군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다섯 번이나 이혼 경력이 있었고, 지금은 여섯 번째 남자와 정식적인 결혼절차 조차도 밟지 않고 살고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여인이 그 마을 사람들에게는 어떤 사람처럼 보였겠습니까? 이 여인이 왜 그 뜨거운 12시 정오에 물을 길으러 왔겠습니까? 그 시간에 마을 사람들은 그늘에서 쉬거나, 잠을 자거나 하지 움직이는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여인이 지나가면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손가락질 하는 사람도 있고, 싫은 티를 내는 사람도 있었고, 들으라고 모욕적인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 여인과 가까이 지내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그녀를 좋아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때문에 그 여인은 남들이 쉬고 잠자는 그 뜨거운 뙤약볕에 물동이를 지고 허겁지겁 서둘러 우물에 물을 길으러 왔던 것입니다.

 

13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절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그 뜨거운 뙤약볕에 물을 뜨러 온 여인은 목이 마른 것처럼 인생의 깊은 갈증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남자도 만나보고, 저 남자도 만나보고, 이 남자와 살아보기도 하고, 저 남자와 살아보기도 하며 그렇게 많은 남자들을 거친 여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갈증은 채워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의 것들은 계속 목마르게 되어 있습니다. 채우고 채워도 결코 만족할 수 없을 것입니다.

 

프랑스의 물리학자이며, 수학자이며, 철학가인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가 남긴 유명한 말은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만드시 하나의 공간 즉 공백이 있다. 이것은 어떠한 피조물로도 채울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만이 채워 주실 수 있는 공백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 공백을 채우려고 그렇게 애쓰고 있는데, 이 세상의 물질적인 것으로 그 영적인 공백은 결코 채울 수 없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은 영적인 것으로만 채울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만드신 공백이기 때문에 그 공백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이 채울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더 이상 목마르지 않는 샘물이 되는 것입니다.

 

28절부터 30절을 보시면,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모든 사람들이 외면하던 그 여인은 그 마을 사람들을 다 전도한 최고의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진정한 샘물이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제 친구가 저를 전도해서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고 있구요. 저는 여러분 중에 수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위대한 전도자가 나오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여러분, 다음 주는 우리교회 7주년 이면서 ‘블레싱 세부 전도축제’로 11시에 모입니다. 여러분 주변에 이런 목마름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랑하는 가족, 친구, 이웃들을 전도하여 그들에게 한 번이라도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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