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2:1~7>
– 이 시대의 교회들에게(1) –
[Audio 말씀]
예전에 어떤 권사님의 가정에 심방을 갔었습니다. 기도제목을 여쭤보니 ‘결혼한 아들이 다시 믿음 생활을 회복했으면 좋겠다.’말씀하십니다. 말씀을 들어보니 그 아들이 과거 중고등부 때 학생회 회장도 하고, 청년부에서 청년회장까지도 했던 정말 믿음생활을 뜨겁게 했었는데 군대 다녀온 이후부터 신앙생활을 멀리하더니 교회도 안 가고, 날마다 술에 취해 들어오니 우리 권사님이 너무 속이 상하신 겁니다.
전도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만나 얘기하다보면 그 권사님의 아들과 같은 이들이 의외로 꽤 많습니다. ‘나도 예전에 청년 회장이었고, 교회 생활 정말 열심히 했었는데…’하는 분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심지어 믿음이 뜨거워 목회자나 선교사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입학하기도 했었는데, 중도에 포기하신 분도 상당수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떤 분들은 ‘청년회장도 하고, 군대에서 군종도 하고 심지어 신학교까지 갔던 사람이 어떻게 지금은 신앙생활을 저렇게 엉망으로 할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된다.’ 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세월이 지나가도 한결 갔다면 좋겠지만, 마음이 바뀌기도 하고, 그 전의 뜨겁던 믿음이 식어버리기도 하는 게 현실입니다.
2015년에 새벽에 제가 ‘의지박약’이란 주제로 설교를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박약(薄弱)’이란 말 자체가 ‘약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우리의 의지나 믿음이 때로는 너무나 부족한 겁니다. 찬양과 기도 중에 뜨거운 눈물도 흐르고,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고, 날마다 말씀을 읽고 예배하는 기쁨 속에 살면서 분명 내게 믿음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그 믿음이 무너져 내리는 일을 우리도 경험하며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한 때는 내가 큰 믿음의 사람이라 생각했었는데, 지금의 내 모습은 믿음의 바닥을 치는 상황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렇듯 믿음이 한결같지 않고 롤러코스터를 타듯 굴곡과 기복이 있는 것일까요? 굴곡이 없이 하나님 앞에서 변함없고 한결같은 믿음생활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무엇에 마음을 빼앗겼는가?
오늘부터 우리는 『이 시대의 교회들에게』라는 주제로 요한계시록의 일곱 개의 교회들을 살펴보게 됩니다.
지난 1월 중국에서부터 시작된 ‘코로나19 바이러스 팬데믹(Pandemic)’으로 전 세계 사람들은 2020년의 절반을 충격과 공포 속에 지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7백7십여만 명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었고, 43만여 명이 사망했는데 바이러스 퇴치의 완전 종식까지는 아직까지 멀어만 보입니다.
어떤 교회와 목회자들은 이번 코로나 사태를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종말의 시작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물론 성경은 전염병과 메뚜기 재앙 등이 하나님의 심판과 재앙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왕상8:37) 성급한 판단으로 영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혼란을 주는 것은 자제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마지막 때’를 사는 것은 분명합니다. 또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면 그 분 앞에서 겸손하게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오늘부터 7주간 살펴볼 요한계시록의 소아시아 일곱 개 교회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1세기 소아시아 지역의 대표적인 교회들을 향한 주님의 말씀이기도 하지만,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오늘 날의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이 꼭 들어야할 주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는 지금의 터키의 서부에 있는 도시들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사도 요한의 마지막 유배지였던 밧모 섬은 에베소라는 도시 앞에 있었던 작은 섬이었습니다. 바울사도의 전도여행을 통해 소아시아에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 받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에베소 교회는 사도바울이 A.D53년에 여러 해 동안 머물면서 복음을 전해 탄생한 교회였습니다.
사도행전 19장 10절에 보면,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고 되어 있는데, 바울 사도를 통해 에베소교회는 그 지역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모이는 가장 뛰어난 교회 중에 하나가 됩니다.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 2장 2절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에베소교회는 특별히 1세기 초대교회들 사이에 있었던 이단과 거짓 사도들과 거짓 성경교사들의 잘못을 드러내고, 그들로부터 교회를 순수한 신앙위에 세웠던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3절을 보시면,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뿐만 아니라 복음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인내하며, 열심히 주님을 섬겼던 교회였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예수께서 에베소 교회를 칭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4절을 보시면,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바울 사도가 에베소서를 기록할 때인 35년 전에 바울 사도는 그들의 믿음과 사랑을 칭찬했었습니다(엡1:15,16). 그런데 30~40년이 지난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은 변질되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라고 그들을 책망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신앙생활, 교회생활을 안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처음의 그 순수하고 순전한 그 믿음과 사랑을 그들에게서 찾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니, 그들은 주님을 향한 처음 사랑을 버렸습니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얻게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버리거나 내려놓을 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한 손으로 두 가지를 다 잡으려고 하면 뭐 하나 제대로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잡으려면 지금 잡고 있는 것을 내려놔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인들이 ‘주님을 향한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은 주님의 사랑을 버리고 또 다른 무엇인가를 붙잡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 사랑을 버리고 다른 것을 사랑하기로 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 짧은 구절에서 말씀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로마제국 아래에서의 에베소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과 더불어 로마제국의 4대 도시 중에 하나였던 대도시였습니다. 당시 인구가 30만 명 정도 되었었고,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건너가는 무역과 교통의 중심지였던 항구도시로 매우 풍요로운 큰 도시였습니다.
저는 에베소 교회를 보면서 우리 한국교회가 생각났습니다. 19세기 말 서구 선교사님들이 조선에 들어와 구원의 복음을 전하며 조선 땅을 영적으로 기경해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나라는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습니다.
일제 강점기 35년을 지나 독립한 뒤 5년 만에 한국전쟁으로 그나마 있었던 모든 기반시설이 파괴되고, 우리 군인과 민간인 약 1백만 명이 죽거나 실종되었습니다. 전쟁의 폐허 위에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우리나라 우리 국민들은 세계 곳곳에서 보내주는 구호품으로 연명해야 했습니다.
가난하고 아무 것도 없었던 당시 우리 국민이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맨 바닥에 천막만 쳐 놓고, 악기 하나 없이 목이 터져라 찬양하고, 목이 쉬도록 부르짖으며 눈물 흘려 기도했습니다. 자료 사진은 오늘날 세계 최대교회를 이룬 1958년 천막에서 시작된 순복음교회의 모습입니다.
우리 민족에게 있었던 환란과 극심한 가난은 도리어 영적으로는 복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놀라운 교회의 성장과 경제성장을 이뤄냈고, 세계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선진국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렇게 풍요로워지면서 교회도 화려하고 점점 거대해져갔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 우리의 신앙은 과거의 가난한 심령과 간절함과 절박함은 사라져가고 그 자리에 물질적 축복이 점점 크게 자리하게 된 것입니다.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주님을 향한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은 대신에 무엇인가 다른 것을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 그것이 물질적인 풍요일 수도 있습니다. 돈이 많아지고, 하는 일들마다 형통하고, 가는 곳마다 대접 받으면… 하나님 앞에 엎드리지 않게 됩니다.
– 또 그 물질로부터 시작되는 세상적인 즐거움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그 세상의 즐거움이 더 커지기도 합니다.
–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를 들어서 하늘의 지혜를 부어주었더니,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대단히 잘나고 똑똑하다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고, 자기 판단이 옳다고 생각하는 교만이 자기 안에 더 커져가는 것입니다.
– 또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세상의 어떤 잘난 교육가나 사상가나 정치가의 말을 더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세상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적인 기준과 주장을 갖고 교회를 판단하고, 신앙을 판단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적인 일은 가치가 있고, 교회에서 하는 일은 하찮게 여기기도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의 약속은 지키려고 노력하지만, 하나님 앞에 우리의 책임과 의무와 봉사와 헌신은 멀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과 만나서 3시간, 4시간 커피 마시고 수다 떨어도 시간이 부족한 거 같고, 하루에 2시간, 3시간 스마트 폰을 보고, 하루 종일 유튜브로 개인 방송을 보지만… 하루에 30분 40분 성경 읽고 기도하는 시간이 없다면… 우리는 이미 세상에 마음을 다 빼앗겨 버린 것입니다.
여순반란사건 때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두 아들을 잃게 되었는데, 두 아들을 죽인 청년을 양아들로 삼은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1902~1950)을 잘 아실 것입니다. 한국전쟁 때 북한군에 의해 총살당함으로 순교하셨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예수 중독자]라는 글이 있습니다.
『나 예수 중독자 되어야 하겠다. 술 중독자는 술로만 살다가 술로 인해 죽게 되는 것이고, 아편 중독자는 아편으로 살다가 아편으로 인해 죽게 되나니…
… 우리도 예수의 중독자 되어 예수로 살다가 예수로 죽자. 우리의 전 생활과 생명을 주님 위해 살면 주 같이 부활된다. 주의 종이니 주만 위해 일하는 자 되고 내 일 되지 않게 하자.』
여러분은 무엇에 중독되어 있습니까? 무엇에 마음을 빼앗겼습니까? 무엇 때문에 주님을 향한 처음 사랑을 버리셨습니까? 무엇이 여러분과 주님과의 관계를 방해하고 있습니까?
결국 그런 것들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오락가락 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런 것들이 우리의 믿음과 주님을 향한 사랑 그리고 교회를 향한 섬김과 사랑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것은 아닙니까? 그것들이 내 믿음과 주를 향한 사랑을 바닥으로 끌어 내린 것입니다.
2. 회개하고 처음 사랑을 가지라
한 때 주님을 뜨겁게 사랑했던 에베소교회의 식어진 사랑과 믿음을 보며 안타까워하시는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영적으로 다시 회복할 방법을 알려주시고 있습니다.
5절 말씀을 보시면,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우리의 식어진 사랑과 바닥을 치고 있는 믿음이 다시 예전처럼 회복하려면 우리의 믿음이 어디서부터 문제가 생겼는지를 점검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회개하고 처음의 그 믿음과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5절 말씀을 보시면,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게 되는 이유,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지 않고 계속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는 이유, 우리의 신앙생활이 점점 퇴보하는 이유, 신앙생활이 재미가 없고, 교회 나오는 것이 재미없어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쓴 뿌리’가 생긴 것입니다. 쓴 뿌리라는 것은 쓴 열매를 맺게 하는 원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쓴 뿌리이기 때문에 그 삶의 열매는 당연히 쓴 열매를 맺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쓴 뿌리는 우리를 병들게 하고, 시험에 빠지게 하고, 영적인 성전을 파괴시켜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쓴 뿌리에 대해 기록한 히브리서 12장 말씀을 전후해서 14절에서는 다른 사람들과의 ‘화평함’과 하나님 앞에서는 ‘거룩함’을 말하고 있고, 16절에서는 ‘음행하는 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성경을 통해 볼 때 영적인 음행과 육체적인 음행 두 가지 모두를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쓴 뿌리는 다른 사람과의 갈등으로 우리 안에 뿌리를 내릴 수 있습니다. 믿었던 사람의 말 한 마디에 상처를 받기도 하고, 누군가 나를 깍아 내리거나 자존심에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그 대상이 교회 멤버 중에 한 사람일 수도 있고, 심지어 목회자에게로부터 받을 수도 있는 상처이기도 합니다. 특히 목회자와 같이 교회에서 중요한 직책을 담당한 분으로부터 상처를 받게 되면, 그 쓴 뿌리는 그로 하여금 교회를 멀리 떠나게 만들기도 합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의 마음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여러분에게 상처 되는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내게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내가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고, 그 사람의 말이 사실도 아닐 수 있습니다. 괜히 그 사람의 말 때문에 우리가 더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을 포기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럴수록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말씀으로 그 문제를 해결해 나가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미성숙한 말과 행동을 내게 했다고 해서 나도 미성숙한 모습으로 반응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또는 영적으로 그 쓴 뿌리는 거룩함과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 영적인 음란과 우리의 육체를 음행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살펴보시면 거의 대부분이 ‘돈과 성’ 이 두 가지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돈을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함으로 영적 음행을 저지르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인 우리의 몸을 성적인 도구로 더럽히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역시 쓴 뿌리입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 계속 머물게 되면 우리의 믿음은 그 순수함을 잃어버리게 되고, 우리는 주님을 점점 더 멀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5절에서 주님께서는 “회개하고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이라는 사람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지만, 그 안에 어느 순간부터 자라난 교만이라는 쓴 뿌리는 결국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실 수밖에 없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축복의 촛대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다윗에게 옮겨지게 된 것입니다.
언제든, 누구든,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든… 주님께서 경고하고 계시는데 회개하지 않으면 그 촛대는 옮겨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축복과 그 은혜를 받을 만한 사람에게 그 촛대가 옮겨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를 통해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지금 세계 최 강대국들이라고 하더라도 단 몇 개월 만에 최악의 나라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잘못된 것을 버려야 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처음의 그 순수함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20세기 최고의 설교자이며, 20세기 선지자로 불렸던 A.W.토저(1897~1963) 목사님께서 그 분의 책 『세상과 충돌하라』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는가? 무기력하고 미지근한 신앙생활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가? 야곱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과거의 성자들의 영적 수준에 도달하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서원을 해야 할 것이다. … 하나님은 서원을 귀하게 여기며, 그것을 통하여 당신과 함께 일하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원했던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 죄의 문제를 철저히 해결하겠다고 서원하라.
-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겠다고 서원하라.
- 험담을 하지 않겠다고 서원하라.
- 자신을 방어하지 않겠다고 서원하라.
-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지 않겠다고 서원하라.
어쩌면 이런 믿음의 결단과 서원들이 에이든 토저 목사님이 66세의 나이로 천국에 들어가실 때까지 식지 않는 뜨거운 마음으로 20세기 선지자와 같이 주님을 섬길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 분에게서 하나님의 촛대는 영원토록 머물렀던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을 버린 교회였습니다. 무엇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겼습니까? 회개하고 처음 사랑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의 촛대는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