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6:12>
– 다니엘 하루3번 기도(새벽⑩) –
독일과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 국가들입니다. 70년이 넘게 지났지만 역사는 그들이 저지른 반인륜적인 범죄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나라가 똑같이 범죄를 저질렀지만 과거사를 대하는 태도는 대조적입니다.
독일은 공개적으로 그것도 아주 자주 그들이 저지른 전쟁범죄에 대해서 사죄하고 반성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4대 총리인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1913~1992)’는 1970년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의 전쟁 희생자 비석 앞에 독일 총리로서 무릎을 꿇고 사죄하기도 했습니다. 현 메르켈 총리 역시 시시 때때로 과거사를 참회하고 반성하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리고 독일은 나치에 의해 수백만명이 죽은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일’을 1996년부터 챙겨서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치 전범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를 두지 않고 70년이 지났어도 혐의가 확인되면 처벌을 하고 있습니다.
반면 일본의 아베총리는 “침략에는 정의가 없다.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라고 말하면서 사죄는커녕 침략을 정당화하고, 역사를 왜곡하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2015년 12월 말에 대한민구 현 정부가 일본으로부터 돈 몇 푼 받고<한․일 일본군 위안부 협상 타결>을 통해 이 문제를 최종적인 종결을 약속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만약 일본의 총리를 비롯해서 그들이 독일과 같이 진정으로 사죄하고 반성한다면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고, 용서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진정한 사죄와 반성 없이 돈 몇 푼으로 과거 역사를 덮어버리려고만 하는 역사왜곡의 태도를 우리 국민들은 인정하기 어려운 겁니다.
우리 국민들이 넓은 마음으로 그들을 용서해 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용서를 받는 사람들이 용서의 은혜를 모른다면 그 용서는 그들에게 아무 의미가 없게 됩니다. 그러나 용서의 은혜를 참으로 아는 사람은 그 용서를 받을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12절 말씀을 보시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주기도문 속에 죄 용서에 대한 내용이 들어있는데,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번역된 헬라어에는 약간 다른 뜻의 단어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헬라어 ‘오페이레마타(Ofeilemata)’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데 ‘빚 또는 부채’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탕감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빚도 탕감하여 주시옵고”라고 번역할 수 있겠습니다. 누가복음에는 헬라어 ‘하마르티아(hamartia)’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데, ‘어떤 목표에 미달하거나, 벗어났다’는 의미로 보통 ‘죄’로 번역됩니다. 어쨌든 그것이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이든,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이든, 그 빚을 탕감해 주는 것도 어렵고, 내게 잘못한 어떤 죄를 용서해 주는 것 역시 쉽지 않은 겁니다.
그런데 내가 어떤 상대의 그 빚과 그 죄를 용서해줄 때, 그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면 그 빚을 탕감 받고, 그 죄를 용서 받는 사람이 그 ‘용서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것은 내가 누군가의 빚을 탕감해 주거나, 누군가의 죄를 용서해 봤을 때만이 그 용서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비로소 알 수 있는 겁니다.
‘모울(C.F.D. Moule)’이란 신학자가 있습니다. 그가 “자신이 하나님께 대하여 지은 죄가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일단 깨달은 사람의 눈에는 남들이 자신에게 끼친 해가 상대적으로 극소화되어 나타난다. 반면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끼친 해를 과장해서 보는 사람은 또한 자신의 잘못은 극소화하여 보게 되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5:20절에서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깨닫는 사람에게는 사죄의 은총이 넘치고 그것이 본인에게도 그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가 다가오는 겁니다.
그러나 본인이 ‘내가 뭐 그렇게 큰 죄가 있나? 죄는 저 사람, 저 사람이 졌고, 저런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이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죄는 작고, 다른 사람들의 죄는 크게 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내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의 티만 갖고 정죄의 태도를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임하는 ‘용서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미사여구와 함께 기도를 늘어놓는다 하더라도 용서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의 기도가 과연 하나님 앞에 온전히 올라갈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기도문’을 통해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바로 이 부분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겁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해본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해 주신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오늘 비판과 판단과 정죄의 마음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용서하십시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하늘의 용서의 은혜를 맛보게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