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4:19~24
19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서울 강남의 서초동에 위치한 ‘사랑의 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큰 지하 예배당(약 6,700석)’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초대형 교회입니다. 교회 규모
뿐만 아니라, 건축 미학적으로도 대단히 세련되고 멋진 외관을 자랑하고 있고, 심지어 서초역 3,4번 출구가 교회로 들어가는 통로와 연결이 되어 있어 접근 편의성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런 초대형교회를 건축하는데 담임 목사님을 비롯한 수많은 성도들의 눈물과 땀과 헌신 그리고 엄청난 재정
이 들어갔을 거로 보입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 종종 교회들의 최대의 비전과 목표가 ‘성전 건축’인 경우가 많은 거 같습니다.
어떤 교회들은 ‘전도를 통한 교회의 양적인 부흥’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도 합니다. 온 성도들도 예수님의 지상 명령을 받들어 섬긴다고 시도 때도 없이 전도에 열정을 내며 영혼 구원하는 일에 힘을 내기도 합니다. 이 또한 귀한 일 일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교회들은 가난한 이웃들을 돕고 섬기는 ‘빈민 구제 사역과 봉사’에 초점을 맞춰진 교회도 있습니다. 서울에 있는 한 교회도 어디에 홍수가 났다? 어디에 지진이 났다? 어디에 산불이 났다? 이런 재난이 있을 때, 성도들이 짐을 꾸리고, 구호품을 챙겨서 즉시 ‘긴급 구조대’가 조직되어 출발해서 돕는 사역을 정말 잘합니다. 우리 교회에도 언젠간 이런 봉사대가 탄생하면 좋겠습니다.
어떤 교회들은 ‘세계 선교’에 모든 포커스가 맞춰져 있습니다. 수십 개의 단기 선교팀이 연중 세계 곳곳으로 파송되고, 세계 곳곳에 교회를 세우고, 학교를 세우는 엄청난 일들을 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이 모든 일들과 사역들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 하나가 빠졌습니다. ‘존 파이퍼(John Stephen Piper, 1946)’ 목사님은 “교회의 궁극적인 목표는 경배이다. 선교는 경배가 없기에 존재한다. 세상의 끝에 선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경배는 영원하다.”
수백억에서 천억이라는 천문학적 돈을 들여 건축된 교회도, 수 많은 사람들을 전도해 큰 부흥을 이루는 것도, 이 땅의 가난한 사람을 돕는 빈민 사역도 심지어 전 세계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세계 선교도 ‘마지막’, ‘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세상의 종말에는 더 이상 교회
건물도, 전도도, 빈민 구제도, 세계 선교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부터 우리가 천국에 가서도 영원토록 계속 이어지는 게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때문에 교회의 궁극적 사역, 궁극적인 목표는 ‘예배(경배)’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매 주일만 되면 교회로 모여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그 예배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오늘 함께 살펴보시겠습니다.

1. 무엇을 예배하는가?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라는 지역에 들어가셔서 우물가에서 어떤 여인과 나눈 대화 내용입니다. 여러분 이 성경을 읽다 보면 ‘유대와 사마리아’라는 표현을 보셨을 겁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사셨던 1세기로부터는 약 931년 전에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 왕’ 시대에 다윗 왕가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남유다 왕국’과 반란으로 10개의 지파가 세운 ‘북이스라엘 왕국’으로 분단이 됩니다.
그런데 BC. 722년에 앗수르의 침공으로 북이스라엘은 멸망하고, 앗수르는 반란을 일으킬 만한 똑똑한 북이스라엘 사람들을 모두 포로로 잡아가고, 사마리아를 수도로 한 북이스라엘 땅에는 농부와 같이 비천한 신분의 사람들만 남겨 두었습니다. 그리고 앗수르 사람들을 대거 사마리아로 이주시켜 북이스라엘 사람들과 앗수르 사람의 육체적 혼혈과 종교적 혼합이 이루어지게 한 겁니다. 그들은 하나님도 섬기고, 이방 우상도 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BC. 586년 바벨론의 침공으로 남유다 왕국도 멸망하는데, 바벨론은 모든 유다 사람들을 다 바벨론으로 끌고 갔었다가, BC. 537년 유다와 예루살렘에 포로들을 돌려 보내서 성전도 건축하고, 성벽도 재건하게 합니다. 때문에 사마리아와는 달리 유대인들의 경우는 혈통적, 종교적인 순수성의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겁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4장 20절을 보시면,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남북 이스라엘 사람들에겐 수백 년에 걸친 ‘성전의 산 이슈’가 있었습니다. 사마리아를 포함한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 땅에 있는 ‘벧엘’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하고, 유다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정통적으로 엄밀히 말하자면, 예루살렘이 맞습니다.
그런데 21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모든 계시를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성전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에 있는 벧엘이란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산에서도 말고,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게 된다는 이상한 말씀을하시고 있는 겁니다.

‘예배(禮拜)’라는 말의 한자로는 ‘예도 예(禮)’, ‘절 배(拜)’를 쓰고 있어서 ‘예를 갖춰 절한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영어에서는 ‘Worship’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가치(Worth) + 신분(Ship)’이란 의미의 말이 만난 합성어입니다. 그래서 ‘존귀한 가치를 지니신 분께 마땅
히 드리는 영광과 존경’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존경하는 훌륭한 선생님을 뵈면, 저절로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하는 것과 비슷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연약하고, 실수를 할 수도 있는 죄인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여러분이 존경하는 분에게 예를 표하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 그분의 영광이 얼마나 큰지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면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 때는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예배 했지만, 그들은 어느 순간부터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아니라 그 성전 자체가 우상이 된 것입니다. 어떤 종교의식이 우상이 된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화려한 성전이나 종교의식이 그들이 섬기는 예배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참된 예배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요즘 대형 교회들을 중심으로 시설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웬만한 방송국에 있는 장비들이 다 있고, 강단 배경에는 LED 전광판을 설치한 교회도 많아서 비주얼이 얼마나 화려한지 모릅니다. 물론,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에만 너무 집중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예배하게 되면서 참된 예배의 본질을 잃어 버리게 되는 것과 같아지는 겁니다. 멋진 악기와 화려한 연주와 테크니컬한 찬양 인도자와 방송국 같은 강단의 시설들은 있는데, 그 자리에 하나님께서 안 계시다면 그 모든 것들이 헛된 것일 뿐입니다.
제가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한 교회는 상가의 작은 지하실에서 개척된 교회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근처에 있는 주택을 하나 매입해서 그 집을 교회로 개조했습니다. 계단을 몇 개 올라가면 거실이었던 곳과 방들을 터서 60명 내외가 들어가는 작은 예배당을 만들었습니다.
스무 살 즈음 어느 날, 수요예배에 참석하려고 오르는데 찬양 소리가 들려왔고 그 계단을, 제 가슴이 뛰기 시작했고, 거실 문이었던 알루미늄 샷시로 된 문을 삐걱하고 열고 들어가는데, 하나님의 임재가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저는 그 하나님의 임재에 압도되어 그 샷시 문 앞에 무릎을 꿇었고, 거기서 펑펑 울며 주님께 예배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초라한 예배당 이었지만, 하나님은 거기 계셨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갑자기 정전이 되는 바람에 우리는 마이크도, 조명도, 에어콘도 없는 특별한 예배를 드렸습니다. 찬양팀도 마이크와 전자 악기 없이 기타와 비올라 연주 만으로 예배해야 했고, 영상과 자막이 안 되니 성도들도 가사를 모른 채 찬양을 따라 불러야 했습니다. 추석 명절 기간이라 명절 음식까지 준비했었는데, 너무 아쉽기도 했습니다. 모두 무더위 속에 땀범벅이 되어 겨우 예배를 마쳤습니다.
한국에서 일하던 우리 초신자 성도가 두 주간 휴가를 받아 세부에 와서 함께 예배를 드렸는데, 이 성도님이 더위를 엄청 타는 분이고, 그래서 예전에 세부에 계실 때 냉장고에 콜라를 상자로 쌓아두고 드시던 분입니다. 그런데 교회 정전됐다고 하니깐 ‘그냥 가지 말까?’라고 고민이 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다리도 불편해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3층까지 겨우 올라와 맨 앞에 앉아 예배를 드렸습니다. 저도 너무 더우니 그 초신자 성도님이 예배 내내 걱정이 됐습니다.
예배가 시작되고 마이크도, 전자 악기도, 영상 자막도 없이 찬양팀이 찬양을 부르기 시작하고, 마이크와 전자 악기 소리가 없으니 회중에 앉아 있는 성도들의 찬양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데 온몸에 전율이 흐르고, 전혀 덥지 안더랍니다. 나중에 예배가 끝나고 밖에 나오니 비로소 덥더랍니다. 며칠 전, 우리 초신자 성도님이 이 예배에 이런 신기한 경험과 함께 주님께서 큰 은혜를 주셨다고 간증하시는 겁니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의 저자 ‘오스왈드 챔버스(Oswald Chambers, 1874~1917)’는 “전적으로 연약하여 의지하는 것은 항상 하나님의 영이 자신을 드러내실 기회가 되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때로 내 주변의 있는 매력적인 것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막기도 하고,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 뒤바뀌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의 유일한 회중은 오직 하나님 뿐이신 것입니다. 화려한 음악과 영상도, 대단한 그 누구도 아닌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신 것입니다.

2. 하나님께 발견되라!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21절에서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는 말씀은 파격적인 말씀 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때부터 정해 놓으신 ‘모리아 산’에 세워진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해야 함을 절대 변하지 않는 진리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북으로 분단되면서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은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하기 위해 남유다 왕국의 예루살렘을 오고 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래서 벧엘에 단을 쌓아 놓고 그곳에서 예배하게 했었던 겁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수백 년 동안 벧엘이 예배하는 곳이었고, 그들 역시 그곳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사야 1장 11, 12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무수한 제물을 갖고 와서 수많은 제사가 성전에서 드려지고 있었지만,
12절에서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오니…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사하는 사람들의 겉모양은 누가 봐도 여호와 하나님을 신앙하는 신앙인의 모습이지만, 그들의 속은 위선과 거짓과 탐욕으로 가득한 모습을 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5장 8절에서 예수님은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일반적인 종교들은 어떤 종교적 의식과 행위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들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식으로 사람들을 가르칩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아무리 화려하고 웅장하고 대단해 보이는 종교의식과 행위를 하더라도, 그 중심과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받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6장 7절에서
“…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삶의 변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의식과 행위가 아니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이고, 그들의 삶의 열매로 그들이 참된 신앙인인지 아닌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때문에 야고보 사도를 통해서도 ‘행위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라고 하셨
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23절을 보시면,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앞에서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서
“…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즉, 성령을 받은 사람들만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
할 수 있고, 그들만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복음
을 믿음으로 죄사함과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거듭난 사람들이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감사와 찬송과 영광과 예배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참된 예배’인 것입니다.
그런데 23절 하반절에 보면,
“…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제가 부목사로 섬길 때, 수천 명의 성도들 앞에서 찬양을 인도하고 있었는데, 제 마음에 이 성경 구절을 떠오르게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 여기 이렇게 수천 명의 성도들이 함께 멋지게 찬양하고 있는데요.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니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는 “다는 아니다. 나는 참되게 예배하는 자에게 지금도 목마르다. 나는 그런 예배자를 찾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 강단에서의 그 깨달음 이후 저 역시도 하나님께 발견 되어지는 예배자가 되고자 하는 마음이 더 깊어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찬양을 인도할 때에든, 아니면 예배 안내로 성도들을 섬길 때든지, 회중 가운데 앉아서 찬양하고 말씀을 들을 때에도… 하나님 앞에 발견되려 중심으로 예배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담임목사로 맨 앞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든지, 때론 부목사님이 설교할 순서에는 맨 뒤에서 성도들 안내하며 예배할 때에든지 누구보다 가장 열정적으로 예배하려 하는 이유는 단 하나, 하나님께 발견되어지는 참된 예배자가 되고픈 마음 때문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세계적인 찬양 인도자 중에 ‘메트 레드맨 (Matthew James Redman, 1974)’이란 분이 있습니다. ‘마음의 예배(The heart of worship)’ 그리고 ‘나의 왕 앞에서(Undignified : 춤추며 찬양해)’ 라는 한국 교회 청소년, 청년들에게도 작곡하신 분입니다.
너무나 잘 알려진 곡을 이분이 청소년일 때, 이 사람을 가르친 청소년부 지도자인 ‘마이크 밀라비치’라는 분이 청소년 시기의 메트 레드맨 그리고 사역자로서 메트 레드맨의 모습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3천명이 모이는 곳이든, 3명이 모이는 곳이든 동일한 열정으로 예배를 인도했다. … 레드맨은 일찍이 경배가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것이기보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끄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그는 항상 한 분의 관중 앞에서 공연했다.”
우리의 예배는 사람에게 보여지는 예배가의 유일한 관중인 한 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아니라,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예배자를 찾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매주 예배를 드리지만, 하나님 앞에 발견되어지는 참된 예배자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 무엇을 예배하는가?
- 하나님께 발견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