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7:16~34>
인류 역사 속에 근•현대 이전의 사회는 매우 종교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유교와 불교의 종교적, 사상적 지배 아래에서 사회가 발전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종교가 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유교적 전통에 따라 조상에게 제사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때문에 사실 종교가 없는 게 아니라 조상을 숭배하는 유교신자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유럽 같은 경우도 2천년의 기독교 역사 아래에서 문명이 발전해 왔습니다.
그런데 근•현대에 들어 과학이 급속하게 발전하고, 인본주의와 실용주의가 발달하면서 무신론(無神論)과 같은 것들이 많은 사람들의 사상을 지배하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 ~ 1900)’같은 사람입니다. 그의 대표적인 말이 “신은 죽었다(독일어 : Gott ist tot / 영어 : God is dead)”라는 말입니다
그의 책 『우상의 황혼』에서 그는 “플라톤, 공자, 유대교 교사들과 기독교 교사들. 이들은 거짓을 지껄이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권리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기독교와 불교 그리고 소크라테스 등은 삶을 부패시키는 퇴폐적인 무리로 봤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반기독교 사상을 펼치며 근•현대 최고의 철학자로 평가받던 니체는 40대 중반에 정신병에 걸려 10년 동안 제정신을 회복하지 못한 채 살다 55세 때 죽게 됩니다.
그런데 ‘신은 죽었다’ 혹은 ‘신은 없다’라고 믿는 사람을 ‘무신론’ 혹은 ‘무교’라고 할 수 있는데,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 사람도 하나의 신앙이 있는 겁니다. 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신념과 생각을 믿는 겁니다.
그러니깐 이 세상에 종교가 없는 사람, 신앙이 없는 사람은 없는 겁니다. 그 대상이 어떤 신이든, 자기 자신의 신념이든… 그는 어떤 신앙을 갖고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아덴(아테네)로 선교여행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16절을 보시면,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그리스는 철학이 매우 발달한 나라였습니다. 철학의 아버지인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사람들이 모두 그리스 사람들입니다. 소크라테스의 고향 아덴은 그 철학의 중심지였습니다.
21절을 보시면,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그렇게 철학이 발전하면서 여러 가지 신화들이 발전했던 겁니다. 그런데 그리스신화를 보면 굉장히 비도덕적이고 난잡한 신들의 모습이 많이 나옵니다. 신들은 근친상간(近親相姦)은 기본이고, 폭력에 윤간(한 명을 여러 사람이 강간하는 것)의 모습도 나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의 마음에 있는 욕망을 하나의 신화로 만들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하나의 죄에 대한 알리바이를 만든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비도덕적인 일을 저지르면 내 몸에 신이 잠깐 들어와서 한 짓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바울 사도가 아덴에 갔더니 온갖 신들의 우상이 도시 전체에 가득했던 겁니다. 그러니 바울 사도가 마음에 격분이 일어나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유대인과 헬라인을 가리지 않고 전도도 하고 변론도 하게 되었던 겁니다.
22절과 23절을 보시면,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신과 우상을 만들다 만들다 더 이상 이름 붙일 게 없으니깐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이름을 붙인 겁니다. 바울이 보기에 기가 막힐 노릇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24절부터 창조주이시며, 천지의 주재(主宰)시며, 어디에나 계신 무소부재(無所不在)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주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게 됩니다(24~31).
30절을 보시면,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회개(悔改)’라는 말은 ‘돌이키다’라는 행동적인 언어입니다. 더 이상 알지 못하는 신과 같이 허무한 신을 섬기지 말고 이제 주님께로 돌아오라는 겁니다.
그리스 사람들처럼 자신의 욕망을 위한 신들을 만들었든지, 사람들이 만든 어떤 종교적인 신이든지, 니체와 같은 철학자라든지 아니면 자기 자신의 어떤 신념을 믿든지, 어떤 힘 있는 사람을 의지하든지, 세상의 돈을 의지하든지… 그 모든 것들이 ‘신’이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모든 것들을 “알지 못하는 신에게”와 같은 허무한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더 이상 그런 허무한 신에 끌려 다니지 마십시오. 이제 돌이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모든 고난의 수렁에서 건져주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실 참되신 하나님 앞에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의 ‘알지 못하는 신’과 같이 허무한 것을 신앙하고 있는 것은 우리 가운데 없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