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25:1~19>
어제 말씀을 나눌 때 잠시 언급했지만, 그 누구든 무엇이든 무서울 게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도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어떤 지위와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그들일 것입니다. 이들이 무엇을 하든 그들을 제재할 사람이 없으니, 그들은 사람들에게도 함부로 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들의 태도는 오만하고 거만하기 이를 때 없을 것입니다. 그들에게서 온유와 겸손과 타인을 향한 배려와 존중의 모습은 발견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그들 위에 더 큰 권세와 힘을 갖고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의식할 수 있다면, 그들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권력자는 대통령이고, 그보다 높은 권력자는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은 스스로 될 수 없고 국민이 세운 겁니다. 그렇다면 그를 그 자리에 세운 이들이 더 큰 권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때문에 대통령이 국민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의 정치와 국정운영은 달라질 것입니다.
찬양의 가사 중에 ‘왕의 왕 주의 주 하늘과 땅과 모든 것 지으신 주…’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가장 높은 권력과 권세를 갖고 있는 ‘왕(王) 위의 왕, 주(主) 위의 주’이신 것입니다. 때문에 이 세상에서 어떤 높은 자리에 앉아 있고, 큰 권세를 갖고 있다 할지라도 그 보다 더 높은 존재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 의식은 그의 태도를 바꾸게 될 것입니다. 그의 삶에서 오만과 거만의 모습이 아닌 겸손과 낮아짐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신명기 25장은 여러 가지의 규범들과 명령들을 담고 있습니다. 먼저 17절과 18절을 보시면
“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곧 그들이 너를 길에서 만나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광야를 지날 때에 60만 명(전체 200~300만 명)의 큰 인원이 움직이다 보니, 연약한 자들(노약자, 병든 자, 어린 아이들…)이 행렬에서 뒤에 쳐져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광야의 약탈자들인 아말렉 족속은 지쳐서 뒤쳐져 있는 약한 자들을 치고,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그 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슬픔의 사건이었습니다.
현대전에서도 무장한 군인들이 아닌, 민간인들을 공격했을 때는 목적이 어떤 것이든 그것은 국제적으로 큰 비난의 대상이 됩니다. 아말렉은 그 뒤쳐진 사람들이 임산부든, 어린아이들이든, 연약한 노인들이든, 병든 사람들이든…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죽이고 약탈하는 잔인한 족속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이 그렇게 잔인했을까요? 18절 하반절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그들이 그들보다 더 높으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았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그런 일을 했을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규범에 대해서 쉽게 어기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양심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몇 가지 예를 본문에서 말씀하시고 있는데, 1절부터 3절까지에서 어떤 범죄자가 재판을 받고, 그 죄에 따라 태형을 받는데, 3절에 보시면
“사십까지는 때리려니와 그것을 넘기지는 못할지니 만일 그것을 넘겨 매를 지나치게 때리면 네가 네 형제를 경히 여기는 것이 될까 하노라”
처벌에도 인간이 견딜 수 있는 어떤 한계점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40대까지는 때리지만 그 이상은 금하셨습니다. 지나치게 때리면 혹 태형을 받는 중에 죽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적절한 벌을 내리되 그의 인권과 생명을 존중해 주라는 것입니다.
5절부터 10절까지는 『형사취수제(兄死取嫂制)』 즉 형이 자식이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아 첫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는 형의 자식으로 입적되어, 형의 족보를 이어가는 제도를 말합니다. 물론, 우리 현대인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제도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이스라엘의 기업(가나안 땅)과 깊은 관계가 있었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독특한 규범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이 왔을 때 그것을 모두가 동의하고 기뻐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때로는 내 마음에 맞지 않고, 동의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13절부터 16절까지는 정직하고 공정한 저울을 써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속이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정직하고 진실합니다. 속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증한 악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16절).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경외하는 삶)을 살게 될 때, 다른 사람들에게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순종합니다. 정직하고 진실하며 속이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