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1:1~18>
– Acts(32) –
요즘 제주도에는 중동의 이슬람 국가인 예멘으로부터 500여명의 대규모 난민들이 몰려와서 이것이 정치적, 사회적으로 크게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예멘에는 이슬람 종파 간 그리고 정치적 문제로 내전이 계속되고 있어서 살기 위해 탈출한 사람도 있고, 브로커를 통해 한국에서 큰돈을 벌기 위해 온 사람들도 그 안에 있습니다. 이미 유럽에서 무슬림 난민 사태가 사회적으로 크게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 국민들도 한국사회에서 비슷한 문제들이 벌어질 것으로 우려하고 있는 거 같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뉴스에서는 스리랑카에서 온 불법체류노동자 ‘니말 시리 반다라(38세)’씨에게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대한민국 영주권’을 수여했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2011년 취업 비자를 받아 입국했고, 2016년 7월 체류기간이 만료되었는데, 고국에 있는 가족의 생활비와 암에 걸린 어머니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서 고국에 돌아가지 않고 불법체류 노동자로 과수원에서 일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2017년 2월 과수원 인근 주택에서 불이 났는데, 63세 된 집주인 이 모씨는 간신히 대피했지만, 미처 나오지 못한 90세 노모 걱정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때 스리랑카에서 온 불법체류자 니말 씨가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가 그 할머니를 구출해 나왔다는 겁니다.
니말 씨는 할머니를 구출해 오면서 머리, 목, 얼굴 등에 화상을 입어 한 달간 입원치료를 받아야 했고, 유해가스를 마셔 폐가 손상을 입어 오랫동안 치료를 해야만 했기 때문에 치료비만 500만 원 가량이 나왔고, 그 일로 인해 불법체류자라는 것이 밝혀져 오히려 벌금을 물게 생겼고, 추방까지 당하게 되었던 안타까운 상황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안타까운 사연이 소개되면서 여기저기서 온정의 손길이 이어지고, 그를 돕고자 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결국 법무부에서 이 사람의 안타까운 소식과 의로운 행동을 보고, 영주권을 부여해주기로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니말 씨는 영주권자로서 여러 가지 혜택도 받을 수 있고, 합법적으로 거주하면서 일하고 돈을 벌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영주권을 받은 니말 씨는
“한국 사람들에게 고맙고, 대한민국을 사랑한다.”
라고 말했습니다. 미국에도 2014년 통계에 의하면 불법체류 중인 한국인들이 25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트럼프 행정부의 반 이민정책 때문에 모두 추방 위기에 내몰려 있어 단속에 걸리면 추방 1순위로 내쫓긴다고 합니다. 그러니 스리랑카의 니말 씨의 경우에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가스펠(Gospel)이란 말은 주로 미국에서 불리어지는 기독교 음악의 장르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중세영어에서 ‘Good(좋은) + Spell(new : 소식)’이란 단어가 합해져서, 원래는 godspel을 거쳐서 gospel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가스펠은 ‘복음(福音 : 기쁜 소식)’을 말합니다. 내일은 성탄이브여서 우리는 ‘성탄축하발표회’와 ‘새벽송’ 등이 있을 예정이고, 내일 모레는 ‘성탄감사예배’로 드리려고 합니다.
2천 년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전해주신 가스펠은 죄로 인해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에게 하늘의 시민권을 수여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땅의 대한민국 영주권이든, 미국 시민권이든 오늘 밤이라도 죽으면 더 이상 효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받은 가스펠(복음)은 고통과 눈물과 아픔과 죄가 없는 천국에서 영원히 거주할 수 있는 영주권이요. 그 하나님 나라에 거주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그 분의 보호와 돌봄 속에 영원히 살아갈 수 있는 천국의 시민권인 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는 복음 즉 가스펠의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1. 누구든지 오시오
복음의 첫 번째 특징은 누구에게나 그 문이 열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1절 말씀을 보시면,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우리가 지난 두 주에 걸쳐 살펴봤듯이, 사도 베드로는 가이사랴 지역에 주둔하고 있었던 로마군대의 백부장 고넬료와 그의 가족들과 친구들을 만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이었던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시고, 그들이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을 높였던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셨을 때, 120명의 성도들에게 임했던 것과 똑같은 사건이었습니다. 다른 게 있다면 120명의 성도들은 유대인들이었고, 백부장 고넬료와 그의 가족과 친구들은 모두 이방인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들과 함께 여러 날 머물면서 그들과 교제하고, 함께 식사도 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해 그를 직접 목격하고, 가르침을 받고, 기적을 목격한 제자로서 그들에게 예수의 복음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소식은 아주 빠르게 여행자들에 의해서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었던 사도들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파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소식만 전해졌던 게 아니었습니다.
2절과 3절 말씀을 보시면,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유대인들은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평생을 유대교의 전통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유대인으로 평생을 살다가 이제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이들을 할례를 받은 유대인 그리스도인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무할례자라는 것은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표현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베드로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 교제하고 함께 식사한 것에 대해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과 교제하거나 식사하지 말아야 한다는 유대교의 전통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거나 식사하지 말아야 한다는 유대인들의 전통이 왜 생겼냐면, 경건한 유대인들은 우상 숭배자의 집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우상 숭배에 영향을 받을까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집에도 들어가지 않으려 했고, 당연히 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 자체도 죄악시 여겼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여호와 신앙으로서 그들만의 독특한 종교적 문화와 사회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또한 여호와께서 B.C.2091년 아브라함을 우상의 도시인 갈대아 우르에서 선택하셔서 이스라엘의 시조가 되게 하신 것은 그들로 세계 속에 유일하게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선민의식을 뿌리 내리게 했던 믿음이었습니다.
그런 유대인들이 조상의, 조상의, 조상… 때로부터 이방인들에 대해서 배타적인 마음으로 살아왔고, 그들과의 교제를 죄악시 여기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런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변화를 받아 크리스천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수십 년간 갖고 있던 가치가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한 순간에 변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유대인들의 오랜 종교적 전통에 따라 이방인을 멀리하는 것과 선민의식에 의하면 사도 베드로의 행동은 그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있었던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베드로를 비난했던 것입니다.
이에 베드로는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성도들에게 오늘 본문 4절부터 16절까지에서 가이사랴의 백부장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가게 된 특별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그곳에서의 특별한 성령의 역사하심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3:22절 말씀을 보시면,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게 되는 하나님의 의는 모든 믿는 자마다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믿는 자’가 유대인들만 또는 잘 난 사람들만, 똑똑한 사람들만, 성공한 사람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입니다.
갈라디아서 3:28,29절 말씀을 보시면,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어느 누구든지 국적과 관계없이, 나이와 관계없이, 경력과 관계없이, 인품과 관계없이, 과거의 어떤 행위와 관계없이, 외모와 관계없이, 얼마나 가졌냐와 관계없이…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인 것입니다.
또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어린아이들이나, 건강한 사람들이나, 연약한 사람들이나… 누구나 예수를 믿는 이들이 곧 진정한 이스라엘이요,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경 속에 등장하는 위대한 인물들인 모세, 다윗, 베드로, 바울을 볼 때 어떤 생각이 듭니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킨 위대한 인물이었지만, 그는 그 전에 다른 사람을 돕는다는 이유로 애굽인을 살해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골리앗과의 대결에서 승리함으로 민족을 위기에서 건진 인물이었지만, 그는 후에 충성스런 신하의 아내를 범한 추악한 범죄자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였고, 가장 사랑 받던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한 번도 아닌 세 번이나 부인하는 배신자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위대하게 쓰임 받았으나, 그는 과거 신실한 스테반 집사님을 돌로 쳐서 죽게 한 살인자였습니다.
아무리 사람이 변화되었다고 해도 그 사람의 추악한 과거를 안다면 우리는 선입견을 갖고 그 사람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을 가까이 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 사람의 과거가 어떻든지, 어떤 실수를 했든지, 어떤 연약함이 있든지, 어떤 죄가 있든지, 인격이 부족하든지, 실력이 없든지, 실패를 했든지, 연약하든지, 가난하든지, 성격에 모가 나 있든지, 의지가 부족하든지, 자주 넘어졌다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이 다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 정도로 그에게 문제가 많을 지라도, 모두가 가까이 하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런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실수하고, 실패했지만 주님은 우리의 깨진 인생을 치유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가 어떤 사람이든 복음은 그를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누구든지 복음 앞에 나오면 그의 인생을 고치실 것입니다. 아프면 아픈 그대로 주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주님은 반드시 나를 고치실 것입니다.
2. 예수 이름 부르시오
가스펠의 두 번째 특징은 복음의 핵심인 예수 이름을 부르는 이마다 구원의 역사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17절 말씀을 보시면,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베드로가 이방인인 고넬료와 그의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그들의 마음은 좋은 밭과 같았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았고, 그들은 이방인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전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공로가 전혀 없는데, 예수를 믿기만 했을 뿐인데, 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에 보시면 아버지 때로부터 아들에게 이르기까지 시각 장애를 앓고, 대대로 거지로 살아가고 있었던 바디메오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즘은 장애인들을 위한 많은 복지가 있어 그나마 좀 나아졌지만, 2천 년 전 장애를 갖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가난과 질병으로부터 도저히 벗어날 방법이 없었습니다. 바디메오도 눈이라도 좀 보인다면 그 비참한 인생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비참한 인생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고, 그 예수님이 바로 그 마을에 들어오셨고, 보이지는 않았지만 저기 어디쯤엔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통해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때 바디메오는 예수님을 부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마가복음 10:48절을 보시면,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사람들은 거지 바디메오의 무례한 행동을 꾸짓고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바디메오는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께서는 바디메오를 부르시고, 그의 눈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믿지 않으면 그 이름을 부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믿고, 그 분 안에 구원이 있음을 믿는다면 그 이름을 부르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간절한 만큼 부르시길 바랍니다. 주변의 방해가 있고, 내 성격이 내성적이라 적극적으로 한다는 게 어색할 지라도… 여러분이 절박하면 더 크게 소리를 지르며, 주님을 부르셔야 합니다. 절박한 만큼 성전을 자주 찾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절박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 앞에 나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아직 내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0:12절, 13절 말씀을 보시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국적과 신분이 관계없습니다. 그가 얼마나 배운 사람이든 혹은 지식이 없는 사람이든, 얼마나 경험이 많은 사람이든 아니면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성공을 경험한 사람이든 아니면 실패한 사람이든, 재능이 많든 그렇지 않든…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은 부요하시다 하십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93세에 소천 할 때까지 15만 명의 고아들을 길러낸 고아의 아버지로 불리는 조지 뮬러(George Muller, 1805~1898)는 일생 동안 5만 번의 기도를 응답 받았다고 합니다.
기도의 사람 조지 뮬러가 이런 말을 합니다.
“기도란 그리스도의 능력을 붙잡는 손이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른다면 주님은 그 기도를 외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그 순간 우리는 주님의 능력의 손을 붙잡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주님은 구원하십니다. 그를 모든 죄에서 건져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는 것입니다. 그를 인생의 모든 고통 속에서 건져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케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인 것입니다.